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화 (9/153)

〈9 화〉

# # 쏘

‘레시피를 홀랑 팔아버리는 건 좀 아깝단 말이야.’

아닉시아 향을 만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현재 아리엘만이 유일했다.

그걸 홀랑 팔아버리는 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과 같았다.

“역시, 레시피를 팔기보단 향수 자 체를 파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그랬다간 본격적으로 장사 를 해야 해서 부담스럽긴 한데……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리나가 말 을 걸었다.

“아가씨, 아까부터 무슨 혼잣말을 하시는 건가요?”

리나가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그 눈빛에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왔

다. 보름 전만 해도 나와 눈만 마주 치면 토끼처럼 놀라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나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슬슬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아, 네!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재료 수급을 위해 두 번째로 세논 지구를 찾은 참이었다. 오늘은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저번에 내게 시비를 걸었던 개나리 색 드레스 같은 존재도 보이지 않았 다.

전에 들렀던 꽃집을 다시 찾자, 꽃 집 청년이 나를 알아보곤 반갑게 웃 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나는 꽃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소담한 크기의 꽃집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참 잘 꾸며져 있었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 다. 병석에 눕기 전에는 향수 가게 를 자주 돌아다니곤 했었다. 그런 가게들 역시 이 꽃집처럼 그리 넓지 않았다. 나는 청년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이런 질문 몹시 실례지만……

“네,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레이 디!”

청년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렇게 답해 주었다. 나는 용기를 얻고 조 심스레 물었다.

“이 정도 크기의 가게는…… 매입 가격이 어느 정도 되나요?”

“네? 매입가요?”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청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다행히 청년은 내 뜬금없는 질문에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어디 보자, 요 몇 년간 시세가 오 른 것까지 치면…… 흐음, 한 이천 만 비스 정도 되지 않을까요?”

“이, 이천만 비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이 세계도 부동산 가격은 장난이 아 니구나!

“네, 아무래도 세논 지구가 땅값이 비싼 편이라…… 하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꽃집 청년 을 바라보았다. 수더분하게만 느껴 지던 청년이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 수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그렇…… 군요. 답변 감사해 요.”

“하하, 뭘요. 관심 있으시면 괜찮은 부동산 소개해 드릴까요?”

“아…… 아뇨. 다음에 부탁드릴게

요. 지금은 자금이 조금 모자라 서……

한 천구백오십만 비스 정도가 모자 라네요. 하하.

그런 말을 삼키며 나는 비틀비틀 꽃집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독립을 조금 만만히 보기 는 했었다. 아리엘 윈스턴은 귀족 영애니까. 귀족이란 즉 흔히 이야기 하는 금수저 포지션이 아니던가? 그 러니 독립하기 위한 초기 자금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이든 저곳이든 세

상은 그리 녹록치가 않았던 것이다.

‘드레스니 보석이니 하는 것들을 다 팔아도, 이천만 비스는 턱도 없 겠지?’

향수 가게를 열어볼까, 했던 소담 한 꿈이 저 멀리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어떻게 하지? 좌판을 열 수 는 없잖아.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 는 나를 리나가 걱정스레 바라보았 다.

“아가씨, 고민 있으세요?”

“그냥, 좀 막막한 게 있어서…… 하아, 리나.”

“네?”

“리나에게 돈이 엄청나게 급한 일 이 있다 쳐. 진짜 엄청나게 급한 일 이야. 근데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 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할래?”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 는데요?”

“음…… 스무 살 연상 아저씨한테 시집가게 된다고 치자.”

“으엑.”

리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급한 일이면…… 으음, 역 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죠.”

“근데 저금한 돈이고 뭐고 탈탈 털 어도 그만한 돈이 없으면?”

“그럼…… 역시 빌려야 하지 않을 까요?”

“빌린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 긴, 당연한 대답이었다. 내게 돈이 없으면 남의 돈을 빌리는 수밖에 없

으니까.

그런데, 아리엘 윈스턴에게 과연 돈을 빌려줄 만한 인맥이 있을까? 나는 리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리나. 혹시 내 친한 친구, 하면 떠오르는 이름 있어? 돈도 빌 려줄 만큼 친한 친구 말야.”

“네? 아가씨의 친한 친구…… 요?”

리나의 얼굴에 순간 곤혹스러운 그 림자가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나는 좌절했다. 예상은 했지만, 아리엘 윈스턴에게 친구 같

은 건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친구라 해 봤자 같은 또래의 아가씨일 텐데, 이천만 비스라는 거 금을 선뜻 빌려줄 리는 없겠지.

그럼 은행 신세를 져야 하나? 이 세계는 은행 이자가 어느 정도 되려 나……?

“아가씨, 혹시 용돈이 부족하신 건 가요? 집사님께 말씀드리면……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아는 사람이 사업을 좀 하려고 하는데 자 금이 부족하대서 대신 고민을 좀 해 주고 있거든. 하하.”

“아! 사업이면 이야기가 쉬워지 죠.”

쉬워진다고?

나는 멍하니 리나를 바라보았다. 리나가 방싯 웃으며 말했다.

“투자자를 구하면 되잖아요!”

“투자자7”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리엘의 조향 실력은 이미 사교계 에서 유명했다. 그런 아리엘이 향수

사업을 하겠다며 투자자를 구한다고 하면 한둘 쯤은 넘어올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그럴듯한 계획 이 펼쳐졌다.

“아리엘 윈스턴 백작 영애께서 입 장하십니다.”

집사의 안내에, 수많은 시선이 내 게로 쏠렸다.

오드리 백작 영애가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이번 무도회를 주최 해 준 고마운 영애였다.

“……어서 와요, 아리엘 영애. 정말 오셨군요.”

“물론이죠, 오드리 영애 다른 분도 아니고, 오드리 영애께서 주최한 무 도회인데.”

나는 생긋 티 없는 웃음을 걸쳤다. 그 미소를 바라본 오드리의 표정이 형언할 수 없이 미묘해졌다.

그래, 희한하기도 하겠지. 자기와 썩 좋은 사이도 아니었던 내가 제

무도회에 참석한 게.

나는 무도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 다. 달콤한 음악 속에서 춤을 추던 남녀들이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 나같이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보통 악녀들은, 성격은 안 좋아도 인맥은 끝내주지 않나?’

그런 장면들 자주 나오잖아. 제 편 을 날개처럼 두른 악녀가 주인공을 쪽수로 몰아붙이는 거.

그런데 어째 아리엘 윈스턴에겐 그 런 인맥조차 없는 듯했다.

‘뭐, 별 상관은 없지만.’

친목이나 다지려고 나온 자리는 아 니었다.

내가 잘 보여야 하는 건 단 한 명 이면 충분했다.

‘저기 있다.’

머지않아 나는 목표를 포착했다.

무도회장 한 편에서, 티 하나 없이 밝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짙은 금

발의 레이디.

저 레이디가 바로 이 제도를 평정 한 사교계의 여왕, 샤를로트 제노스 였다.

눈을 반짝이며 그리로 발걸음을 돌 리려던 때였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익은 여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에반스 공작 전하를 뻥 걷어차셨

다는 아리엘 윈스턴 양이 아니신가 요?”

아. 기억났다.

세논 지구에서 내게 시비를 걸어왔 던 개나리색 드레스였다. 이름이, 패 트리샤였던가?

나는 대중 웃어준 뒤 다시 샤를로 트를 향해 떠나려 했다.

“아, 반가워요, 패트리샤 양.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어딜 가는 거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 다.

“또 어떤 가엾은 영식을 감옥에 집 어 넣으시려 고요?”

패트리샤가 외치자, 그녀의 일행들 이 와르르 웃어젖혔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사교계에 널리 퍼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아리엘 양이라곤 해도, 무 고죄가 뭔지는 아시겠죠? 로빈 공의

친구들이 백방으로 힘을 쓰고 있어 요. 로빈 공이 풀려나면, 재판장에 서는 건 아리엘 양이 될걸요!”

“무고죄. 잘 알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 없는 사람을 허위로 신고하는 죄, 잖아요? 로빈 공은 죄를 지었으 니 제가 무고죄로 재판장에 설 일은 없겠군요.”

“아직도 거짓말을 하시는 건가요! 로빈 공처럼 점잖으신 분이,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추행을 했을 리가 없

잖아요?! 정신이 어떻게 돼버리신 게 아니고서야 말이죠!”

“그러게요.”

나는 한 차례 더 끄덕거렸다.

“정신이 아프신 분도 아닌 것 같던 데,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저도 의 문이네요. 그럼 이만, 저는 볼일이 있어서.”

“뭐, 뭐라고요? 잠시만요!”

패트리샤를 지나쳐 다시 샤를로트 에게로 향하려는데, 부챗살이 내 어

깨를 막았다. 패트리샤가 열 오른 얼굴로 외쳤다.

“제 친우이신 로빈 공의 명예를 위 해서라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 겠군요. 듣는 귀가 이렇게 많은데 뻔뻔히 거짓말을 하다니! 역시 영애 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로군 요!”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 체 이 여자는 아리엘에게 무슨 원한 이 있길래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 달인 걸까.

주위는 모두 이 때아닌 소란에 흥

미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렇게 주목을 받아서야 모른 척 넘어갈 수 도 없었다. 그걸 인지했는지 패트리 샤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저희 진솔하게 터놓고 얘기해 볼 까요? 솔직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요. 한 남자한테 일 년씩이나 매 달리다 버림받은 여자에게 도대체 어느 영식이 호감을 가지겠어요?”

파티에 참가한 인간들이 신이 나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단 한 명도 다가오진 않고 멀리서 속닥

거리기만 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묘 한 기분이었다.

나를 향한 시선들에 볼이 따가웠 다.

내가 패트리샤의 도발에 걸려 흉하 게 흥분하길 바라는 시선들.

내가 저들의 오락을 위해 가십거리 를 제공해주길 원하는 시선들.

그 시선들에 더욱 탄력받은 패트리 샤가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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