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8화 (8/153)

〈8 화〉

“그러셨습니까?”

세드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 다.

“이상한 일 이 군요. 사교계 에 서 는 애칭처럼 에반스 부인이라 불리기를 즐기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뜨끔한 표정을 숨겼다. 작중 에서 아리엘이 그녀의 측근들과 함 께, 스스로를 에반스 부인이니 뭐니 지칭하며 시시덕거린 건 사실이었 다. 그걸 이 남자도 알고 있었을 줄 이야.

“그랬…… 던 시절이 있기는 했습 니다만…… 부끄럽네요. 어린 시절 의 추태로 생각해주시고 부디 너그 러이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세드릭은 대답이 없었다. 그가 잠 시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내 진짜 의도를 가늠해보려는 듯.

잠시 뒤에야 그의 입술이 열렸다.

“원하시는 건, 여전히 같습니까?”

“ 네?”

“깔끔한 이별. 그걸로 괜찮겠습니 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에요.”

세드릭이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깜 빽였다.

눈을 감았다 뜬 순간부터 세드릭의 얼굴에선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 가 섬뜩할 정도의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레이디의 뜻이 그러시 다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태엽 인형 같은 무표정에 비해 더 없이 정중한 작별인사였다. 나는 그 에게 묵례하며 마주 인사했다.

“저야말로, 실례가 많았어요. 그동 안 감사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드릭이 등을 돌 렸다.

그대로 거래 상대에게 걸어가려나 싶던 순간, 문득 그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향수.”

“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드릭 이 표정 없이 말했다.

“효능이 좋더군요.”

“덕분에 제 부하가 전에 없던 능률 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닉시아 향을 이야기하는 건 줄 알았는데, 다른 향에 대해 말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로 회복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이었다. 이 남 자가 선물 받은 향수를 부하와 공유 할 정도로 친절한 상사인 줄은 몰랐 지만.

“감사했습니다. 그럼.”

세드릭이 짧게 묵례하곤 멀어져갔 다.

나는 문득 벌리려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사실, 묻고 싶었다. 아닉시아 향의 효능은 어떠했느냐고.

다른 향수들이야 하인들에게도 뿌 리듯 선물하고 다녔지만, 아닉시아 향만큼은 오로지 세드릭을 위해 준 비한 것이었다. 그러니 유일한 고객 의 피드백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하지만,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 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저 남자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건, 아닉시 아 향에 문제가 없었다는 소리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 미련 없이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아가씨!”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가 헐레

벌떡 내게 달려왔다.

“아리엘 아가씨!”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신 겁니 까! 주인님께서 화가 이만저만 나신 게 아닙니다!”

윈스턴 백작이?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짐작 가 는 일이…… 있긴 했다. 레스토랑에 서의 사건을 떠올린 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찾으시던가?”

“예, 단단히 벼르고 계십니다!”

“지금 뵙자고 전해.”

저택 안에서 마주친 백작은, 역시 단단히 성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라 렸다.

“아리엘 윈스턴!”

깜짝이야. 나는 곱지 않은 눈으로 백작을 마주 보았다.

“왜 부르십니까, 아버지?”

“왜 부르냐고! 허, 기가 막혀서!”

백작이 탕,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 다.

“방금 마르셀 후작가에서 전보가 들어왔다! 로빈 마르셀이 치안대에 갇혀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 리냐!”

역시 그 이야기였군. 나는 한숨 쉬 며 이마를 문질렀다.

“도대체 맞선 상대를 감옥에 처넣 는 레이디가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 이냐!”

“마르셀 영식께선 죗값을 치르신 것뿐이랍니다, 아버지. 잘못한 게 없 다면 치안대가 잡아가지도 않았겠 죠.”

“뻔뻔하기는! 로빈 마르셀이 레스 토랑에서 칼부림이라도 벌였단 말이 냐!”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짓은 안 저 질렀지만…… 제게 수준 낮은 발언 들을 좀 하셨어요.”

“수준 낮은 발언?”

“제가 자길 유혹했다느니, 정력제 를 뿌렸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 들요.”

“……뭐야?!”

백작이 눈을 크게 부라렸다.

“그놈 입에서 그따위 소리가 나오 다니!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한 게 냐, 아리엘!”

“아니, 저는…… 그분께 악취가 좀 심하게 나기에 향수를 뿌려드린 게 다인데요.”

“그놈의 향수!”

탕!

백작이 또 탁자를 내리쳤다.

“그따위 해괴망측한 취미는 진작에 그만 두라 했지! 결국 이런 일이 생 기지 않았느냐! 제기랄! 맞선 상대 를 감방에 넣었다고 다들 신나서 입 방아를 찧겠군!”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어깨만 으쓱 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백작은

다 내 잘못이라고만 하니, 힘들여 해명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은 탓 이었다.

혼자 분통을 터뜨리던 백작이 말했 다.

“감옥 갈까 무서워서 앞으론 누가 너와 선을 보려 하겠느냐!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수습하는 수밖에 없다. 당장 중앙 지구 치안대로 가 서, 로빈 마르셀을 손수 선처하고 오거라!”

“ 예?”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것만은 개 짖는 소리인 양 듣고 흘릴 수 없었다.

“제가 그러기 싫다는 건 둘째 치 고, 일단, 아버지. 로빈 마르셀을 선 처할 수 있는 권리는 제게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로빈을 끌고 갔던 건 에반스 공작 전하의 수하들이 었으니 까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분이 직접 처벌하라 명한 범죄

자인데, 제가 선처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 아닐까요?”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냐? 로 빈 마르셀을 잡아간 게, 에반스 공 작이 었다고?”

백작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 다. 이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한 듯 했다. 마르셀 후작가에서 최대한 저 들 유리한 정보만 넣어 전보를 친 것이 분명했다.

“네, 우연히 주변을 지나치던 전하 께서 상황을 두고 보지 못하시고 직 접 나서 주셨어요. 감옥에까지 들어

갈 줄은… 저도 미처 몰랐지만.”

“……에반스 공작, 세드릭 에반스 가 네 일에 직접 나섰다고?”

백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에반스 공작과는 헤어졌다고 하질 않았느냐?”

“예, 완전히 남남이지요.”

“그런데 왜…… 잠깐, 혹시 공작이 뒤늦게 네게 마음이라도 자각한 건 아니냐?”

“하하하. 그럴 리가요.”

백작의 순진무구한 추측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백작 역시 방금 자 신의 발언이 터무니없었다는 걸 알 고 있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제길…… 아무튼, 네 말이 틀린 건 아니구나. 공작이 직접 개입했다 면 이쪽에서 선처를 운운할 수는 없 지.”

내 말이 그 말이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냐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 려 했다.

그러나 백작이 조금 더 빨랐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나.”

“예?”

“소문이 퍼지기 전에 새로운 맞선 상대를 구하는 수밖에.”

“……예?”

어떻게 사고가 그리로 흘러가는지 백작의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었다.

백작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 았다.

“다행히 보류해두고 있던 선 자리 가 하나 있기는 하다, 아리엘. 최대 한 빨리 약속을 잡아볼 테니 대기하 고 있거라. 상대는 오르겐 후작이 될 게다.”

후작? 나는 그 단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후작 영식도 아니고, 후작?

피어오르는 불길함에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 오르겐 후작이라는 분께 선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백작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곤, 뻔뻔하게도 답했다.

“올해로 마흔이 됐을 게다.”

“정략결혼치곤 평범한 나이 차지.”

웃기지 마라, 망할 영감탱이야. 스 무 살이 평범한 나이차면 당신도 스 물 연상 할머니한테 새장가 들든가!

……하는 말을, 나는 간신히 씹어 삼켰다.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엄청난 인내심이었다.

‘하지만, 마흔 살한테 시집가는 것 까지 참아줄 수는 없지.’

귀족들이 나이차 나는 결혼을 밥 먹듯이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시 대상, 문화 차이, 다 좋았다. 웬만한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 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곤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선 제가 하루빨리 시집가 기만을 바라시는군요. 최대한 괜찮 은 혼처와.”

“뭐? 그야 당연하지. 좋은 혼처로 보내지 않을 거였다면 내가 너를 왜 그 나이까지 귀히 길렀다고 생각하 느냐.”

역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 게까지 대놓고 딸을 물건 취급할 줄 이야. 이건 문화 차이일까? 아니면 이 백작이 유별하게 못된 아버지인 걸까?

어느 쪽이든 크게 중요한 건 아니 었다. 아무튼 윈스턴 백작에게 딸은 좋은 값에 팔아치워야 할 소유물일 뿐이었다. 소유물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선 빚을 갚는 수밖에 없었다. 키워준 빚 말이지.

나는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아버지. 잘생기고 훤 칠한 동년배 영식이면 몰라도, 아버 지뻘인 분과 선을 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뭐라 했느냐?”

“제가 만약 좋은 혼처로 시집가지 못한다면, 그 손해는 어떻게든 메꿔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 지.”

“손해를 메꾸겠다고? 네가?”

백작이 기가 찬 듯 비웃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네가, 곱게만 큰 네가 그 어마어마 한 손해를 어떻게 메꾸겠다는 게 냐?”

나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표정에 백작이 당황한 듯 미간을 좁혔다.

백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리엘 윈스턴에겐 대단한 검술 실 력도 없고,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능

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주 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백작은 소꿉놀이라고 무시하고 있 긴 하지만.’

윈스턴 백작은 아리엘의 조향 능력 을 존중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그러나 백작의 편견과는 달리, 아 리엘이 지닌 조향 능력은 세드릭 에 반스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로 대단 한 능력이었다.

백작은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몸

에 걸치고 있는 수많은 보석과 값비 싼 드레스보다, 조향실에 있는 향기 노트 하나가 몇백 배는 더 값질 수 있다는 걸.

어쩌면 윈스턴 백작이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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