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
“이 넘쳐흐르는 에너지는맙소 사, 레이디. 방금 제게 뭘 뿌리신 겁니까?”
로빈이 잔뜩 흥분한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꺼림칙한 표정으 로 대답했다.
“그냥 방향제 같은 거였는데요.”
“아뇨, 저는 이 느낌을 잘 압니다. 방금 그것…… 정력제였지요?”
로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곤 속 삭였다.
나도 모르게 황당한 표정이 튀어나 왔다. 방금 뿌린 향수는 그저 피로 회복 효능이 있는 평범한 향수일 뿐 이었다.
뭐, 간혹 평소에 약 같은 걸 많이 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향도 민감하 게 받아들인다고 하던데……오
잠깐. 설마? 나는 로빈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이디.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이 런…… 하, 이렇게 저돌적인 여성은 난생 처음입니다.”
로빈이 내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화들짝 놀란 내가 손을 잡아빼려 했지만 로빈의 악력이 더 셌다.
“다른 남자라면 기겁해서 도망갔을 지 모르지만, 전 다릅니다. 이런 화 끈함, 마음에 들어요. 당신의 유혹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레이디.”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이 미친 약쟁이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야. 이거 당장 안 놔 요?”
“후후, 노골적으로 유혹한 뒤엔 튕 기는 것까지 잊지 않으시는군요. 정 말 제 취향을 빼다 박으셨습니다, 레이디!”
“윽!”
로빈이 얼굴을 들이미는 통에 악취 가 또 콧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오
만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악취가 남 아 있다니. 아무래도 이 냄새는 약 을 하고 난 뒤 남은 잔향이 아닌가 싶었다.
어떡해, 진짜 약쟁이인가 봐. 나는 질겁하며 붙잡힌 손을 내 쪽으로 끌 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로빈은 무척 힘이 셌다.
“나갑시다, 레이디. 마음이 통한 차 에 더 망설일 것도 없지요.”
“신고할 거예요. 여기! 웨이터!”
웨이터가 놀란 눈으로 황급히 다가
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이 미친놈 좀 신고해 주세요. 윽, 내 손을 어디다 갖다 대!”
로빈이 붙잡은 내 손을 자기 가슴 께에 짚었다. 쿵쿵쿵, 옷감 너머로 미친 듯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 다.
“느껴지십니까? 제 심장 고동 이…… 레이디를 향한 사랑의 고동 입니다. 아, 웨이터. 이해해주게. 내
레이디께서 워낙 고양이처럼 앙칼지 신 분이라. 돌아가봐도 좋아.”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그 향 수에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 효능 도 있었나?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레시피를 뜯어고칠 것을 다짐하며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뺨이라도 올 려붙일 생각이었다.
그때 였다.
“무슨 짓이지?”
잔뜩 낮게 가라앉은, 고막을 긁는 듯한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 세드릭 에반스가 거짓말처럼 저 뒤에 서 있 었다.
“어, 당신은…… 에반스 공작 전 하?”
로빈이 멍청한 얼굴로 멍하니 물었 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어
오더니, 날 부여잡고 있던 로빈의 손을 내쳤다.
끈질기던 손이 손쉽게 떨어져 나갔 다. 그리고 그 자리엔 붉게 손자국 이 남았다.
그걸 지그시 노려본 세드릭이 로빈 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무, 무슨 짓이냐고 하셔도…… 저, 저희는 그저 데이트를 즐기고 있던 참입니다.”
“데이트?”
세드릭이 이죽거렸다.
“정신 나간 성범죄자가 아녀자를 희롱하는 장면으로 보이던데, 내 눈 에는.”
“희, 희롱이라니요!”
로빈이 희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마,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저와 레이디는 서 로 호감을 느껴서……!”
“닥쳐, 혀가 너무 길군.”
세드릭이 내 손목을 들어올렸다. 아직도 붉게 손자국이 남아 있는 손 목을.
“어떻게 할까요, 레이디 윈스턴.”
내 손목을 내려다보며 세드릭이 말 했다.
“똑같이 자국을 내놓는 건 어떻습 니까.”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춤 의 검을 살짝 뽑았다. 스릉, 하며 검집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놀라 주저앉은 로빈이 엉 덩이걸음으로 슬글슬금 물러나기 시 작했다.
“저, 전하! 선처해 주십시오! 제가 경솔했습니다!”
“경솔했다고?”
“예, 예! 제가 거부하시는 레이디 의 손목을 억지로 쥐었습니다! 하지 만 레이디께서는 말로만 밀어내신 거고 사실은……,”
“인정했군. 데려가.”
“예. 전하.”
세드릭의 뒤를 지키고 있던 두 명 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로빈의 어깻죽지를 들어올렸다.
“뭐, 뭐야! 이거 놔!
로빈이 한껏 저항했지만, 기사들은 짐짝이라도 다루듯 그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의 온 시선 이 죄다 그에게 쏠렸다.
로빈이 강제 퇴장되고 난 뒤, 레스 토랑 안은 경악으로 쥐죽은 듯 고요 함에 잠겨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세드릭이 털썩, 로 빈이 앉았던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마르셀 후작이 자식 농사를 단단 히 잘못 지은 모양입니다. 성범죄자 를 다 길러내고.”
그렇게 뱉은 세드릭이 로빈 앞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단번에 비워냈 다.
“그래서.”
탁, 소리와 함께 와인잔을 내려놓 은 세드릭이 나를 쳐다보았다. 새빨 간 눈이 찌르듯 빛을 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건 제가 공작님께 여쭈고 싶은 말인데요.”
“아. 저야 뭐.”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묘하게 방만한 자세였다. 그 의 표정은 아까 로빈을 만난 순간
내가 지었을 법한 표정과 흡사해 보 였다. 참을 수 없이 불쾌한 악취를 맡은 듯한.
“사업차 들렀습니다. 거래 상대가 부득불 공개된 장소에서 식사를 해 야 하겠다기에.”
세드릭이 어딘가로 시선을 툭 던졌 다.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세드릭의 약속 상대인 듯한 중년 남성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 는 게 보였다.
“밀폐된 장소에서 만나면, 내가 뭐.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아는 건 지.”
픽 헛웃음을 흘린 세드릭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또 그 찌르는 듯 한 붉은 시선이었다.
“그래서, 레이디께서는. 그 자식과 어쩐 일로 식사를 하고 계셨던 겁니 까?”
“저는……
곧이곧대로 대답하기가 조금 창피
했다. 세상에, 저런 놈과 맞선 명목 으로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니. 한숨을 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 했다.
“아버님께서 선을 주선하셔서요. 한 번은 만나보라고 하시기에 나온 거예요.”
“……선?”
세드릭이 단어를 되짚었다. 그 한 글자가 몹시 생소하다는 듯.
“네. 저런 놈인 줄 알았더라면 안
나왔을 테지만요.”
뭐 밟았다, 정말.
아무리 돈이 좋아도 약쟁이에다 성 희롱범과 함께 식사할 만큼 내 비위 가 강하진 않았다.
난 일단 세드릭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로 했다.
“아무튼 방금은 감사했어요. 도통 제 말을 듣지 않더라고요. 또 힘은 얼마나 센지……/
나는 투덜거리며 아직 손자국이 남
아 있는 손목을 매만졌다. 머리 위 에서 느린 대답이 들렸다.
아하. 그러니까, 레이디께서는.”
세드릭이 천천히 기대 있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붉은 눈이 더 가 까워 졌다.
“제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선고하시 고는, 일주일 만에 새로운 영식과 미래 계획을 짜고 계셨다는 겁니 까?”
“……예?”
뜻밖의 대사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뜨곤 느릿느릿 말했다.
“계약으로 묶인 연애라고는 하나, 나름 반년 이상 지속된 관계인데. 레이디께서 마지막을 이리 처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리 처사하다뇨?”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예의라니? 나는 조금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공작님 말씀은, 제 가 공작님을 생각해서 다른 영식과 선을 보는 일은 좀 미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신가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죄송하지만, 전하.”
나는 이 기막힌 이야기에 눈썹을 찌푸렸다.
“공작님께선 저와의 관계를 불쾌하 게 여기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불쾌?”
세드릭이 그 단어를 되짚으며 미간 을 좁혔다. 확실한 건, 그가 예전은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 실히 불쾌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래. 불쾌할 수도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드릭의 말 에도 틀린 것이 없었다.
아무리 형식상이라고는 해도, 일단 우리 둘은 공식적인 연인 관계였다. 게다가 세드릭 에반스의 유명세가
유명세이니만큼 세드릭과 아리엘은 꽤나 유명한 커플이었다.
그런 관계를 깨자마자 다른 남자와 선을 봤다는 게 알려지면 한동안 구 설수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렇군. 나는 뒤늦게 내 실 수를 인정했다.
세드릭이 맞았다. 이별에도 예의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반강제로 이 어진 계약 연애였다 해도 그랬다.
“아닙니다, 전하. 생각해 보니 제 불찰이 맞는 것 같아요.”
순순히 내 잘못을 인정하자, 뜻밖 이었는지 세드릭이 슬며시 한쪽 눈 썹을 들어올렸다.
“전하의 본심이 어떻든 전하와 저 는 공식적인 연인이었으니까요. 바 로 다른 영식과의 선 자리에 나온 건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전 하.”
세드릭은 내 사과를 받아들이는 대 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언제부터 였습니까?”
“ 네?”
“언제부터 나와는 연애뿐이고, 결 혼은 다른 남자와 하겠다고 마음먹 은 겁니까?”
그건 정말 뜬금없고 의외로운 질문 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천천 히 대답했다.
“……딱히 공작님관 연애만 하자고 정해뒀던 건 아니에요. 아니, 그건 제가 정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 라…… 애초부터 제게 선택지가 없
는 문제 아니었던가요?”
세드릭이 대답 대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내 표정은 물론, 피 부 너머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감각 에, 순간 등골로 소름이 내달렸다. 나는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서.
“제가 에반스 공작부인이 될 수 없 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요.”
아리엘이 아무리 애를 써도, 온갖 사랑의 묘향을 만들어 세드릭에게 들이대도.
아리엘 윈스턴은 결국 그저 아리엘 윈스턴일 뿐이었다. 그 이름 뒤에 ‘에반스’가 올 일은 없었다. 그 이름 의 진짜 안주인은 따로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