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6화 (6/153)

〈6 화〉

“헉, 이 향수는 진짜 수상한데요!”

“시끄러워. 오늘따라 호들갑이 심 하군, 너.”

짜증스레 뱉은 세드릭이 두 번째 향수병을 쥐었다.

사실, 리키온의 의심은 합당한 것 이었다. 아리엘 윈스턴이 그간 향수 로 얼마나 다양한 수작질을 부려 왔 던가. 조향사라기보다는 마녀에 더

가깝지 않나 싶을 정도로 아리엘은 다양하고 해괴한 효능을 지닌 향수 를 만들어댔다.

개중 제일 황당했던 건 맡은 순간 눈앞의 사람에게 반한다는 사랑의 묘약…… 아니, 묘향이었고, 제일 위 험했던 건 어디 뒷골목에서나 납품 될 색향(으초)이었다.

다행히도 세드릭에게는 아닉시아 향 외에는 어떤 향도 효과가 없었 다. 그래도 아리엘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괴상한 향들을 개발해오고 있었다.

과연 이번에도 계략인 걸까?

‘헤어져요.’

하지만 헤어지자고 말하던 아리엘 의 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여태껏 그녀에게서 본 적 없던, 고 요하고 당당한 눈빛.

그녀가 그날 정말로 자신을 포기했 다면, 더 이상 번거로운 짓을 하지 는 않을 것이었다.

세드릭은 문득 시험해보고 싶어졌 다.

아리엘이 자신을 포기한 건지 아닌 지.

“아이고, 전하, 그렇게 거침없 이…… 괜찮으십니까?”

두 번째 향을 분사한 세드릭이 천 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 큼 미묘한 표정이었다.

제 주인의 침묵에 덜컥 겁을 먹은 리키온이 한 번 더 입을 열 때였다. 손을 들어 올린 세드릭이 칙, 하고 리키온의 얼굴에 향을 분사했다.

“ 0 01-1”

화들짝 놀란 리키온이 비명을 지르 며 코를 틀어막고 외쳤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어? …… 어라?”

리키온이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 고는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뭐지.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전하? 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합니 다. 이건 마치…… 오후 햇살을 받 으며 들판에 누워있는 기분……, 산

들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휘감는 기 분……

혼자 중얼거리던 리키온이 돌연 주 먹을 불끈 쥐었다.

“맙소사! 이런 활기는 십대 이후 처음 느껴봅니다! 아,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지요. 저는 오후 업무를 얼른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 다!”

활기를 주체할 수가 없다는 듯 리 키온이 달리다시피 집무실을 빠져나

갔다.

혼자 남은 세드릭은 짧게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향수병을 훑었다.

[도움이 되기를.]

세드릭은 그 단정한 글씨체를 한참 이나 지켜보았다.

# 쓰 #

“아직도 많이 남았네.”

찰랑찰랑 유리병에 담긴 향수를 바 라보며 나는 혀를 찼다.

저번에 리나가 꽃잎을 너무 많이 빻는 바람에, 향수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고 말았다. 이래서야 처치 곤란 이었다. 그냥 버리기엔 재료가 아까 워서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는 있는 데, 밖에 잘 나가지 않는 탓에 나가 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다음엔 조금씩 만들어야지.”

뒤늦게 반성한 나는 향기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펴놓은 페이지에는 ‘아닉시아 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효과는 충분했으려나.’

나는 세드릭을 떠올렸다.

어제 소포를 보낸 뒤로 딱히 연락 온 건 없었다. 특별히 문제가 있지 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됐지, 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향기 노트의 한 페이지를 만지작거렸다.

‘이 페이지 한 장이, 천금보다 귀

한 가치를 갖고 있겠지.’

아무도 발명하지 못한, 인조 아닉 시아 향을 만드는 조합법.

이건 오직 아리엘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아 리엘 윈스턴은 세드릭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아리엘 아가씨?”

문 두드리는 소리가 상념을 깼다.

사용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부르십니다.”

“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내려가겠다고 말씀드려.”

“예, 아가씨.”

사용인이 나가고, 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요 며칠간 조향실에만 틀어

박혀 있었던 탓에 백작과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웬일로 식사를 같이하자 부르는 걸까.

식당에서 마주친 백작은, 묘한 눈 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품평이라도 하듯 훑는 눈길이었다.

“소문이 자자히 퍼졌더구나, 아리 엘.”

“예?”

“너와 에반스 공작의 이별 소식 말 이다.”

“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세논 지구에서 만난 영애들에게 깽 판을 친 것이 주효했던 모양이었다.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 구나. 그래, 되지도 않는 사랑놀이는 그만할 나이도 됐지.”

나는 대답 대신 양고기를 썰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백작이 갑자기 폭탄을 던졌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중매가 들어 왔단다. 아리엘.”

네?”

나는 양고기 썰던 손을 멈췄다. 백 작이 태연히 와인 잔을 기울이며 말 했다.

“마르셀 후작가의 차남. 너도 알다 시피 마르셀 후작가야, 요즘 해외 무역으로 외화를 긁어모으는 집안이 지. 그런 집안과 연을 맺는 건 나쁘 지 않아. 게다가 차남이니 잘 구슬 리면 데릴사위로 들일 수 있을게 다.”

“아니, 데릴사위고 뭐고…… 중매

라니요.”

입맛이 뚝 떨어진 나는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지금 저보고 혼인을 하라는 말씀 이신가요?”

“그래. 너도 이제 그럴 나이이지 않으냐?”

백작이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말 했다.

아니, 아니. 나는 머리를 짚었다.

물론 아리엘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

셋이니, 혼기가 찬 건 맞았다. 이 세계의 귀족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정략결혼을 밥 먹듯 한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기 싫었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삶인데, 얼굴도 모르 는 남자와 홀랑 결혼하라고?

“용모도 매우 출중한 영식이라고 하더군. 황실 기사답게 신체적 조건 도 훌륭하고.”

“키도 훤칠하다지.”

잘생기고 키 큰 데다 몸까지 좋은 남자와 홀랑 결혼하라고?

그럴 순 없…… 나?

흠, 흠. 나는 순간 혹하려던 정신 을 얼른 다잡고 대답했다.

“아직 중매는 조금 이른 것 같아 요, 아버지. 조금 더 자유를 누린 다음에……『

“결혼 시장은 항상 열려 있는 게 아니다. 마르셀 가의 차남이면 보기 드문 매물이야.”

내가 다시 한번 거절하자, 백작이

짜증스러운 눈을 했다.

“좋아. 원하는 게 뭐냐.”

“네?”

“선 자리에만 나가면 네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겠다.”

원하는 거라면 아무거나?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는 단번에 대답했다.

“돈이요.”

“이번 달 용돈, 올려주세요.”

백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 다보았다.

“집사에게 용돈을 더 얹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건 들었다. 그래, 요즘 다시 그 괴상한 소꿉놀이에 빠져 있 는 모양이더군.”

‘괴상한 소꿉놀이’란 건 조향 작업 을 말하는 거였다. 백작은 내가 요 며칠 조향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게 영 탐탁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든 말든, 나는 돈이 필요했다. 향수에 들어가는 허브들은 값이 무 척 비쌌다. 아리엘이 아무리 잘나가 는 백작가 영애라곤 하나, 용돈으로 충당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백 작이 말했다.

“2만 비스. 선 자리에만 나가면 바 로 주마.”

2만 비스라.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 정도 금액이면 당분간 재료 걱정을 할 필

요 없는 건 물론이고, 괜찮은 조향 도구도 몇 구비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한 번에 그 정도면, 나 쁘지 않은 거랜데?

“좋아요.”

나는 덥석 그 제안을 물었다. 저녁 식사 몇 시간 정도야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로빈 마르셀.

선 자리에 나와 있는 상대를 발견 하자마자, 나는 하마터면 이마를 철 썩 칠 뻔했다.

화사한 금발에 요정 같은 녹색 눈 동자. 그리고 로빈 마르셀이라는 이 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이 남자가 소설 속 조연이었다는 걸.

그것도 저열하리만치 조잡한 악역 이었다는 걸.

“레이디 윈스턴!”

나를 본 남자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생기기는 참 잘생겼다. 남자의 태양처럼 환한 미소에 레스토랑 안 의 여자들이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 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되지.

누가 알까? 이 자가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의 샴페인에 약을 타 납치 하려 했던 개잡놈이라는 사실을.

‘ 튈까.’

이런 쓰레기랑은 저녁 식사는커녕 공기조차 함께 마시기 싫었다.

‘윽, 그나저나

나는 반사적으로 코를 부여잡았다.

나는 원래부터 후각이 예민한 편이 었고, 아리엘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 다. 하지만 로빈의 몸에서 나는 이 악취는 예민함을 떠나서 좀 심했다.

“레이디, 어디 불편하십니까?”

로빈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나는 간신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어디서 조금 메스꺼운 냄새 가 나서……/

“아, 그렇죠. 저 역시 느끼고 있었 습니다.”

로빈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레스토랑이면서, 실내 공 기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이거 지배인에게 한마디 해야겠군요.”

지배인은 무슨. 나는 기막힌 눈으 로 로빈을 노려보았다. 네 몸에서

나는 냄새야, 네 몸에서.

로빈이 정말 지배인을 호출하려는 듯 손을 들었다. 나는 얼른 그를 말 렸다.

“아, 잠시만요. 마침 제게 도움 될 만한 게 있거든요.”

“도움 될만한 거라면……?”

“향수요.”

나는 두말할 것 없이 파우치 안에 서 작은 향수병 하나를 꺼냈다. 너 무 많이 만들어서 처치 곤란이던 바 로 그 향수였다. 피로를 단번에 풀

어주는.

이 향수는 효능도 효능이지만 향기 역시 좋았다. 이걸로 저 남자의 악 취를 어떻게든 덮어보자.

점점 심해지는 냄새에 나는 황급히 손을 놀렸다.

“아, 들었습니다. 레이디께서 향수 를 모으는 취미가 있으시다고요. 과 연 아리따운 외모와 어울리게 고급 스러운 취향을 가지셨…… 읍!”

칙. 나는 망설임 없이 로빈에게 향 수를 분사했다. 난데없이 향수를 얻

어맞은 로빈이 질끈 눈을 감았다.

청량한 향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휴, 죄송해요. 냄새가 너무 심해서 급하게…… 어, 저기…… 괜찮으세 요?”

로빈의 눈은 초점이 나가 있었다.

마치 정신이 나간 듯 멍한 그의 얼굴에 대고 나는 손을 이리저리 흔 들었다.

“로빈 님?”

“이, 이 기분은

로빈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의 얼굴은 황홀경으로 젖어 있었다.

왜 저래…… 나는 의자를 조금 뒤 로 밀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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