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5화 (5/153)

〈5 화〉

“그게 무슨 소리죠?”

“굳이 따지자면, 헤어지자고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제 쪽이거든요.”

“……네?”

“성인 남녀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이별 선 고 들었다고 에반스 전하를 데려갈 사람이 없을 거라니요? 비약이 너무 심하신 것 같네요.”

나는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 렸다.

개나리색의 표정이 볼만하게 변했 다. 주변 드레스 군단들의 표정도.

그들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음엔 충격 어린 표정을, 그다음으론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나는 그들이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친절히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 나 지났을까.

마침내 개나리색이 외쳤다.

“하하, 하…… 그러니까 지금 에반

스 전하께서 영애에게 차였다는 이 야기인가요? 지금 그 소리를 우리가 믿을 것 같아요?”

차였다니……, 그래도 명색이 공작 인데.

조금 상스러운 용어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믿든 말든 나로선 별 상관이 없었다. 그냥 나와 세드릭이 헤어졌다는 소문만 널리 퍼지면 그 만이니까. 누가 차고 차였든 말이지.

“아무리 혼처가 걱정돼도 그렇지,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시다 니! 정말 다시 봤어요, 영애!”

“안 믿기시면 별수 없고요. 아, 그 나저나 제 혼처에 대한 걱정을 아주 많이 해주고 계신 것 같은데, 이참 에 영애께서 참한 영식 한 명 소개 해주시는 건 어떠세요?”

“뭐, 뭐라고요?”

나는 빙긋,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 쳤다.

“저는 사실 공작님처럼 날카로운 냉미남보다는, 조금 더 둥글둥글 귀 여운 인상을 선호하거든요. 성격도 착하고 저만 바라보는…… 음, 말하

자면 강아지상이랄까?”

그러고 보니 정말 내 이상형이 세 드릭과 정반대이긴 하네. 그나마 다 행인 일이었다.

“그런 참한 영식 있으면 영애께서 한 분 소개해 줘요.”

내 말에 개나리색이 어깨를 부들부 들 떨었다.

이렇게까지 반응해줄 줄은 몰랐는 데. 별생각 없이 던진 농담에 개나 리색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금 저를…… 우롱하는 건가요, 영애?”

“아뇨, 중매 부탁한 건데요.”

“하……!”

개나리색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부채를 정신 사나울 만큼 접었 다 폈다 반복했다. 곧 그녀가 홱 부 채를 접더니 말했다.

“오늘 일은 기억하겠어요, 영애!”

뭘 기억하겠다는 건지.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나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살짝 묵례했 다. 그러자 개나리색이 부들부들 떨 며 등을 확 돌렸다.

“가자, 얘들아!”

“패, 패트리샤!”

“같이 가!”

드레스 군단들이 병아리 떼처럼 개 나리색을 따라갔다.

패트리샤라는 이름이었군. 딱히 기 억할 가치는 없는 것 같아 나는 그

이름을 흘려보냈다.

그나저나, 아리엘 윈스턴은 사교계 에서 적이 꽤나 많은 모양이었다.

‘뭐, 그럴 만도 하긴 하지만

아무리 사랑에 미쳤었다곤 해도, 연적에게 독 향을 선물했던 여자다. 적 하나 안 만들고 살았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이란 것들이 다 저 드레 스 군단 수준이라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몇 마디 했 다고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도망치

다니.

어깨를 으쓱이며 나는 꽃다발에 코 를 묻었다. 꽃다발은 여전히 향기로 웠다.

“됐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옆 보조 탁자에서 꽃잎을 빻던 리 나가 고개를 들었다.

“헉, 완성하셨나요?”

“응!”

나는 뿌듯한 얼굴로 방금 막 완성 한 향료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긴 했었다. 후각을 잃은 이후로 한 번도 향수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할 수가 없 었다는 게 정확하겠지.

그게 어언 오 년 전이라 실력이 녹슬지 않았을까 걱정이었는데. 다 행히도 이 세계의 생소한 도구에 적 응하고 나니 금방 향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향수는 효능이……『

나는 아리엘의 향기 노트를 들췄 다. 방금 내가 레시피를 따라 만든 향수는 ‘단번에 피로를 녹여버리는’ 효능을 갖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세계이기 때 문인지, 아리엘의 노트에는 엄청난 효능을 가진 향수 레시피가 많았다. 내상을 치유하는 향수라든지, 사람 을 홀리는 향수라든지.

마법과 정령이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일까? 아리엘의 노트는 조향사

가 아니라 마법사의 것 같았다.

아무튼. 향기는 확실히 좋은 것 같 은데…… 과연 적힌 대로 효과가 있 을까.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향료 와 재료들을 플라스크에 넣고 섞은 뒤, 향수병 안에 덜어 넣었다.

그리고 분사했다.

"트“’

“어떠세요?”

리나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나 는 코를 킁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플라시보 효과인가? 내가 고 개를 갸웃거리자, 리나가 눈을 반짝 이며 말했다.

“저도 한 번 맡아봐도 될까요, 아 가씨?”

“당연하지. 반은 리나가 만든 건 데.”

“제, 제가 한 건 꽃잎 빻은 것밖에 없는걸요.”

리나가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 근처에 칙, 하

고 향수를 허공에 분사했다. 또 한 번 향기로운 냄새가 실내에 가득 풍 겼다.

“어때?”

“음, 일단 향은 좋…… 어어?”

리나가 돌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리엘 아가씨! 저 갑자기 기운이 엄청나게 솟아요!”

“어?”

“진짜, 갑자기 주체 못 할 정도로 막 솟아나요!”

흥분한 얼굴로 리나가 외쳤다. 항 상 내 앞에서 주눅 든 채로 눈치만 보던 리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 다.

“리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보조 탁자로 달려간 리나가 맹렬히 꽃잎을 빻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 반 불신 반의 얼굴로 향수병을 내려다보았다. 리나가 날 위해 일부러 과장하는 건가? 저렇게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날 리가……?

그러나 리나는 그 뒤 정말로 수많 은 꽃잎을 빻았다.

이젠 좀 쉬라고 말려도 기운을 주 체할 수가 없다며 꽃잎을 더 달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나는 황급히 레시피에서 정력에 도 움이 된다고 적혀 있는 알라나의 비 율을 낮췄다.

“전하, 소포가 왔습니다.”

“급한 건가? 아니면 아무 데나 놔둬.”

“그게, 윈스턴 영애께서 보내신 소 포입니다.”

정신없이 휘갈기던 깃털 펜이 뚝, 멎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들어올렸 다.

‘아리엘 윈스턴.’

그는 머릿속으로 달력을 떠올렸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그래, 나홀 전이던가.

그날은 세드릭의 머릿속에 꽤 뚜렷 이 남아 있었다. 웃기는 소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생 첫 실연을 겪 은 날이었으니.

“약속은 지킨다는 건가.”

세드릭이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 렸다.

그날 아리엘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 다. 이별하더라도 향은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가지고 와.”

“예, 전하.”

잠시 후 세드릭의 앞에 소담한 상 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예쁜 리본으로 제법 정성스레 포장 된 상자였다. 리본을 끄르고 상자를 열자,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오, 이게 그 아닉시아 향인 겁니 까?”

리키온이 호기심을 보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그 의 이마를 죽 밀었다.

“저리 가. 냄새 섞여.”

“너무하십니다, 전하

세드릭은 상자 안에 담긴 향수병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무심코 빈 상자 안을 훑어보았다.

상자 속엔 향수병이 하나 들어 있 었을 뿐.

그 외에 카드 같은 것은, 달리 꽂 혀 있지 않았다.

“잠시만요, 전하.”

세드릭이 향수병을 집어 들자, 리 키온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바로 사용하시려고요? 일단은 검 사부터 해보시죠.”

“왜?”

“또 무슨 이상야릇한 향수를 보낸 거면 어떡합니까? 윈스턴 영애께서 예전에 아닉시아 향인 척 해괴한 향 을 맡게 한 적 몇 번 있지 않습니 까. 맡으면 사랑에 빠지는 향수 같 으”

“됐어. 어차피 효과 있었던 적도 없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리키온이 말꼬리를 흐리며 물러섰 지만, 향수병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 은 여전히 미심쩍었다.

세드릭은 그런 부하를 무시하고 향 수를 분사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 다.

“……하아.”

코끝부터 시작해서 혈관을 타고 돌 아, 온몸에 산들바람이 앉는 듯한 감각.

세드릭은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한 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세포

속에서 슬금슬금 떠들기 시작하던 저주받은 존재들이 일제히 조용해지 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리키온이 세드릭을 걱정스레 살피 며 물었다. 세드릭은 대답 대신 눈 을 내리깔고 향수병을 쳐다보았다.

재능 하나는 미치도록 뛰어난 여자 였다.

제도에는 많은 조향사들이 있었다. 천재라 명성이 자자한 조향사도, 귀 부인들의 살롱에서 인기가 좋은 조

향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아닉시아 향을 만들어내는 데엔 성공하지 못했다.

‘대체 어떤 레시피를 사용하는 건 지.’

심지어 이번 향은 저번보다 효과가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세드릭 은 고개를 천천히 양옆으로 꺾었다. 안개 낀 듯 뿌옇던 머릿속이 순식간 에 맑아졌다.

“어라, 전하. 이 상자, 2단이네요.”

리키온이 상자 바닥을 열었다. 향 이 혹시나 섞일까 싶어 2단으로 분 리된 상자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아래 상자에는 작은 향수병 하나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세드릭이 미간 을 굳혔다.

“이리 줘.”

리키온이 얌전히 쪽지와 향수병을 바쳤다. 세드릭은 쪽지를 잡아채 단 숨에 읽어내렸다. 오래 읽을 것도 없었다. 쪽지에 적힌 건 단 두 문장

뿐이었으니까.

[동봉한 향수엔 피로가 풀리는 효 능이 있어요. 도움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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