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똑똑. 노크 소리에 세드릭은 고개 를 들었다. 집무실 안으로 그의 보 좌관, 리키온이 고개를 내밀었다.
쥐고 있던 깃털펜을 내려놓으며 세 드릭이 리키온을 향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보고를 하라는 의미였 다.
“아가씨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코 사지도 전해 드렸고요. 그리고……/,
늘어지는 말꼬리에 세드릭이 지그 시 리키온을 바라보았다. 리키온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헤어질 작정이신 것으로 보 였습니다. 후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으시더군요.”
솔직히 후회는커녕, 아리엘 윈스턴 의 얼굴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어딜 봐도 홧김에 연인에게 이별을 말하
고 뒤늦게 가슴을 뜯으며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아주 홀가 분해 보였다.
세드릭이 턱을 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예. 아무래도 진심으로 이별을 말 씀하신 것 같습니다.”
하.
세드릭이 짧게 헛웃음을 쳤다.
그녀가 멋대로 시작한 연인 관계였 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멋대로 끝맺
을 줄은 몰랐다.
세드릭은 깊숙이 몸을 뒤로 기대며 타이를 풀어 내렸다.
오늘 마주한 아리엘 윈스턴은 내내 기묘했다. 늦었다며 토라지지도 않 았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 라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을 마주 하고, 준비해온 듯 매끄러운 이별의 말을 건넸을 뿐이다.
“혹시……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 리엘 아가씨께 실수하신 거라도 있 으십니까?”
“실수?”
세드릭이 리키온에게 시선을 던졌 다. 리키온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가씨의 태도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 두 분 사이 에,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글쎄, 십 분 정도 늦기는 했다만.”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 다. 빌어먹을 루퍼트 후작 놈이 서 명을 하지 않고 질질 끄는 바람에,
기어코 담판을 짓고 레스토랑에 도 착하니 이미 십 분이 지난 시각이었 다.
하지만 그게 이별의 이유가 될 수 는 없었다. 상대는 아리엘 윈스턴. 일 년이나 억지로 세드릭 에반스의 곁을 꿰찬 여자다. 그녀가 이별을 말한 데에는 좀 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렵네요. 하지만, 전하께는 도리 어 잘된 일 아니십니까?”
리키온이 짜낸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드릭이 턱을 괸 채 리키
온을 흘긋 쳐다보았다. 리키온이 순 간 움찔 어깨를 굳혔다.
“잘된 일이라고?”
“그, 그게…… 전하께서 마음에 둔 적 없으신 분 아니셨습니까. 아닉시 아 향도 계속해서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요.”
세드릭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건 세드릭으로서도 의외인 부분이었다. 인조 아닉시아 향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아리엘만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 걸 이용해 애정을 요구하던 그녀가, 돌연 일방적인 기부를 선언하다니.
도대체 갑자기, 왜?
세드릭이 탁, 탁 책상을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세드릭을 향해 리키온 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이, 그냥 단순하게…… 아리엘 아가씨께서 더 이상 전하를 좋아하지 않게 되신 것 아닐까요?”
책상을 두드리던 세드릭의 손가락 이 멎었다.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아리엘 윈스턴이. 세드릭 에반스
를?
“이제 주말마다 아가씨를 만나러 나가실 필요도, 무도회에서 아가씨 를 에스코트할 필요도 없게 되신 것 아닙니까. 즉, 전하께서는 이제 자유 의 몸이 되신 거죠.”
말을 하면 할수록 제 말이 그럴듯 한지 리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세드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리키온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 다. 그래. 어쩌면 아리엘 윈스턴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변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조금 도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 불쾌한 기분의 정 체는 대체 무엇일까.
세드릭은 눈을 감아 마지막으로 본 아리엘의, 흔들림 없이 곧던 청록빛 눈동자를 지워냈다.
“리키온.”
“네! 전하.”
갑작스러운 부름에 리키온이 기합
든 목소리로 답했다. 세드릭이 후, 하고 한숨을 뱉었다.
“실내 공기가 개판이군.”
“……예?”
“당장 환기하고, 고용인 시켜서 차 가운 물이나 떠 와.”
“아, 옙, 받들겠습니다!”
리키온이 얼른 경례했다.
세드릭은 타이를 완전히 목에서 끌 러내곤 그걸 소파 위로 던져 버렸 다.
브 쑤 부
나는 사흘을 내리 조향실에 틀어박 혀 아리엘의 향기 노트를 독파했다.
놀라운 노트였다. 노트에 적힌 레 시피 중에는 예전의 내가 즐겨 사용 하던 것도 있었고, 미처 생각해본 적 없는 것도 있었고, 나도 저질러 본 적 있는 실수도 있었다.
병상에서 오랜 기간 투병하는 동안 억지로 잊고, 묻었던 기억들이 자연 스럽게 되살아났다.
라벤더의 꽃잎이 얼마나 향기로운 지.
갓 짠 레몬의 냄새가 얼마나 상쾌 한지.
만개한 장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 던 감각들이 홍수가 되어 들이닥쳤 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만 간신히 채우며 조향실에 틀어박힌 지 사흘 째.
드디어 재료들이 바닥나고 말았다. 나는 사흘 만에 조향실 문을 열고 리나를 불렀다.
“리나!”
“아, 아가씨
리나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무 서워서 차마 문을 열어보진 못했지 만, 그동안 무척 걱정한 듯 리나의 얼굴이 수척했다.
“향수 재료가 필요해. 어디서 구매 할 수 있을까?”
“네? 그건……,”
왜 뜬금없이 그런 걸 묻는지 의아 한 표정이었지만, 리나는 착실히 대 답해 주었다.
“아가씨께선 항상 직접 세논 지구 로 재료를 사러 가셨지요.”
“아, 그랬지. 응, 오늘도 거기로 가 야겠어.”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사흘 만에 백작저를 나섰다.
쑤 보쑤
마차에서 내린 나는 짧게 감탄했
다.
완벽히 정돈된 거리와 소담한 가로 수들. 예쁘게 늘어선 명품샵과 그 사이를 한가로이 거니는 손님들.
리나가 나를 안내한 곳은 쇼핑의 명소, 세논 지구였다. 원작에서 여주 인공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거리를 실제로 거니는 건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뒤, 우리는 꽃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거리에 들어섰다.
갖가지 꽃향기가 섞여 싱그러운 내 음을 풍겼다. 나는 한껏 상쾌해진
기분으로 가장 가까운 꽃가게로 다 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가게 주인인 듯한 청년이 얼른 뛰 어나왔다. 나는 눈앞에 놓인 보랏빛 꽃의 향기를 맡았다. 향기로운, 하지 만 톡 쏘는 듯한 냄새가 코끝을 감 돌았다.
“이 꽃은 이름이 뭔가요?”
“카멜리라고 합니다, 손님.”
카멜리. 나는 눈을 반짝였다. 이 세계에서만 자라는 꽃인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분명 아리엘의 향기 노트 안에 적혀 있는 꽃 중 하나였다.
“향기가 좋네요. 한 다발 주세요.”
달리아에 코를 파묻은 채 방긋 웃 으며 그렇게 말하자, 청년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더니 알겠다고 웅얼거렸 다. 나는 해바라기와 백장미 등, 향 기 노트에 적혀 있던 다른 꽃들도 함께 구입했다.
좋아, 이 정도면 향수 재료는 충분 히 구한 것 같다.
흐뭇한 기분으로 값을 지불하고 발 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휘황찬란한 색색의 드레스들이 내 눈길을 뺏었다. 잘 차려입고 다니는 아가씨들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지 나치려던 때였다.
“아리엘 아가씨.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개나리 빛 나들이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까 그 목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었던 모양 이다.
‘이런.’
나는 곤란함에 혀를 찼다. 여기서 아리엘을 아는 사람들을 맞닥뜨릴 줄이야. 일단 나는 웃으며 마주 인 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죠?”
최대한 무난한 인사말을 건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인사를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무척 괴상해졌다. 개나리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미묘한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쇼핑하기 참 좋은 날씨네 요. 어머, 그런데 어쩌나.”
내가 한쪽 팔에 안고 있는 꽃다발 을 흘긋 쳐다보며, 개나리색 드레스 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고작 꽃으로 되겠어요? 공작님의 시선을 돌리려면, 다이아라도 여러 줄 걸쳐야 하는 거 아닌가?”
개나리색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곤 웃었다.
“아, 하긴. 다이아야 지금도 많으시 지. 그런데도 공작님께선…… 흐음, 흠. 실례했어요.”
뭐야.
나는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나, 눈 뜨고 뺨 맞은 거 맞지? 이렇 게 대놓고? 훤한 대낮부터?
“며칠 전에 전하께서 미리 예약한 갤런 화랑에 나타나지 않으셨다죠? 갤런뿐 아니라 수도 내 화랑 어디에 도요. 이번 데이트는 바람을 맞으셨 던 모양이에요. 흐음, 뭐, 공작님께 서야 원체 바쁜 분이시니, 영애께서 도 너그럽게 이해하시겠죠?”
그렇게 말하며 개나리색이 또 호호 웃었다.
어떻게 할까. 나는 슬며시 한쪽 눈 썹을 들어올렸다.
원래 나는 이렇게 저급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에게는 반응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찮아도 정정해줘 야 하는 진실이란 게 있는 법이다.
나는 입가에 활짝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어머, 제가 혹여나 마음 상했을까 봐 걱정해주신 건가요? 감사해요.”
개나리색의 표정이 또 미묘해졌을 때였다. 나는 대답할 틈을 주지 않 고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젠 걱정해주실 필요가 없을 듯해요. 저와 공작님, 헤어졌거
든요.”
그래. 헤어졌다고, 헤어졌다고!
이 말을 읊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
나는 웃으며 개나리색과 그녀를 위 시한 드레스 군단을 둘러보았다. 제 발 내 말을 똑똑히 듣고 온 사교계 에 소문을 퍼뜨려 주길 바라며.
“헤, 헤어졌…… 다고요? 그게 무
슨……?”
개나리색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 더니 곧 알겠다는 듯 활짝 표정을 폈다.
“어머나! 드디어 일이 그렇게 되었 군요? 아, 가엾은 윈스턴 영애. 공 작님께서도 참 매정하시지.”
개나리색과 다른 드레스 군단들이 저들끼리 킥킥거리고 웃었다. 개나 리색이 저의 신남을 표현하듯 촥, 부채를 펼치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영애께선 젊고 아름다우시니 금방 또 새 연인을 찾 으실 수 있겠지요. 일 년이나 다른 남자에게 목매달다가 버림받은 여자를 누가 데려갈지는 모르겠지만……?
^=:—허
오오.
“어머. 방금 그 발언은 에반스 전 하께 조금 실례되는 발언이 아닐까 싶어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웃었 다. 개나리색이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끔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