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
나는 백작이 당황한 틈을 타 묵례 하곤 홀을 빠져나왔다. 백작이 휘청 거리기라도 했는지, 집사가 ‘백작 님!’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걸었 다. 피곤한 건 사실이었지만 내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리나?”
“예, 아가씨
리나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조향실로 안내해 줘.”
“예, 아가씨!”
평소 자주 가던 조향실로 안내해 달라는 말에 리나가 순간 의아한 표 정을 지었지만, 곧 얼른 표정을 지 우곤 앞장섰다. 빠릿빠릿하게 군기 가 든 게, 본래 몸 주인이 사용인들 을 어떻게 부렸을지 알 것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더 시키실
일은……/
“없으니 이제 들어가서 쉬어요.”
“네?”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실수. 나는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또 깜빡하고 존댓말이 나오고 말았 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를게. 오늘 은 이만 쉬어도 좋아, 리나.”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 자, 리나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리나를 돌려보낸 나는 조향실의 문 을 열었다.
‘……와.’
방 안으로 펼쳐진 풍경에 나는 순 간 말을 잃고 감탄했다.
천장까지 닿는 오르간 벽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오르간의 작업
대 위에는 작은 향수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곳이, 아리엘의 조향실……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천재 조향사라는 설정이 원작에 존 재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원작에서 묘사된 아리엘은 그저 냄 새에 조금 민감한, 남주에게 필요한 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조향 에 소질이 있는 귀족 영애일 뿐이었 다. 이렇게 전문적인 면모는 소설 어디에서도 묘사된 적이 없었다.
입을 벌린 채 감탄을 내뱉던 나는 천천히 선반을 둘러보았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향수병이 먼저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연 나는 향수병을 코에 가져다 댔다.
요으유 어、
황홀할 정도로 강렬한 장미 향.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간신히 선반을 짚고 몸을 지탱 했다. 냄새라는 게, 이렇게까지 강렬 할 수 있는 것이었나?
오 년 만에 후각을 되찾았기 때문 인지, 무척 새롭고 낯선 느낌이었다.
나는 이번엔 조심스레, 아까보다
좀 더 멀리서 장미 향을 맡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 어 졌다.
‘이런 감각을, 내가 잊고 살았었구 나.’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 병에 걸리 기 전까지는 나 역시 조향사가 꿈이 었으니까.
제법 소질도 있었는지 여러 도 대 회와 전국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 었다. 전문적인 조향사가 되기 위해 화학과를 목표로 공부도 했었다.
어느 날, 원인조차 불명인 불치병 에 걸려 하루 아침에 후각을 몽땅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괜히 옛날 생각에 잠겼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다음 도로 향수병을 닫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위치한 책상을 향해 다 가갔다.
책상 서랍을 열자, 짐작대로 거기 엔 두꺼운 가죽 노트 하나가 들어 있었다.
‘향수 조합법.’
거기엔 아리엘의 손글씨인 듯한 글 자로, 향수들의 조합법이 이것저것 적혀 있었다. 메모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비 향, 독 향?’
이게 여주를 독살하려 했던 바로 그 향인가. 굳은 눈으로 노트를 넘 기자 또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 다.
‘사랑에 빠지게 하는 향……?’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메모를 읽 었다.
메모엔 여러 조합법과 함께, 하나 하나 세드릭에게 어느 만큼의 효과 가 있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물론 어느 조합법이든 효과는 전무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메모를 더 넘겼 다.
그리고,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해 냈다.
‘여기 있다.’
인조 아닉시아 향.
마계의 꽃 아닉시아는 마계의 문이 닫힌 이후, 저 멀리 동방 대륙에서 만 희귀하게 자라고 있었다.
태생과 달리 그 치유 효과가 어마 어마해 전설적인 약초로 불렸지만, 멸종 직전이라 근 몇십 년간 아닉시 아를 발견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아무리 난다긴다하는 귀 족이나 황족이라 해도 아닉시아 꽃 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와 같 았다.
문제는 이 아닉시아 꽃의 향이 세
드릭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치 유제라는 것이었다.
‘이걸 세드릭이 한 달 이상이나 구 하지 못했을 때, 아주 대참사가 일 어났었지.’
원작을 떠올린 나는 쓴웃음을 지었 다. 당시 세드릭은 아리엘과 그녀가 제공하는 향을 끊어보기로 마음먹었 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참사. 폭주한 세 드릭은 황궁 기사단 1소대를 전멸시 키고, 제도 일부를 반파 내고 말았 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
세드릭과는 이별했지만, 그에게 약 속한 대로 아닉시아 향은 모자람 없 이 계속해서 조달해줄 예정이었다.
그렇게 조합법이 적힌 메모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똑, 똑.
"저…… 아리엘 아가씨?”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
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는데요……/
이 시간에?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시계를 쳐다 보았다. 어느덧 오후 열 시가 다 되 어 가는 시간이었다.
“에반스 공작가에서 오신 손님이에 요.”
에반스 공작가? …남자주인공네 가 문에서 여기는 왜?
뜻밖의 단어에 나는 눈을 크게 떴 다.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 았다. 정말로 저 멀리, 에반스 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가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일 층의 접객실로 내려오자, 집사 가 손님의 코트를 받아들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지? 이 시간에 세드릭 본인이 오지는 않았을 테고. 공작가 에서 나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 있 나?
접객실에 발을 들이자, 손님이 내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젊 은 남자였다. 세드릭보다 약간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 레이디 윈스턴.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남자가 나를 잘 아는 듯한 표정으 로 말했다.
나는 남자의 복장을 훑어보았다. 에반스 공작가 문양이 새겨진 견장. 낮은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 듯 고급스러운 의복. 하지만 내겐 존댓말을 할 정도의 신분.
공작가의 가신인 모양이구나. 굳이 꼽자면 보좌관쯤 될까. 빠르게 결론 내린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용건이 있으셨겠지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아, 다름이 아니고.”
남자가 품속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그걸 받아든 나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작은 보랏빛 코 사지가 들어 있었다.
이건, 분명 오늘 달고 나갔던 코사 지인데. 내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 자, 남자가 말했다.
“레스토랑에서 떨어뜨리고 가셨다 고 합니다. 공작님께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세드릭이?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솔 직히 의외였다. 내가 아는 세드릭은
이런 자그마한 코사지 따위, 흘리고 가든 말든 상관할 사람이 아닌데.
뭐, 일단 물건을 되찾아준 건 사실 이니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감사해요. 잃어버린 줄도 몰랐는 데. 사려 깊으시군요.”
그렇게 말하며 살풋 웃자, 남자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외의 답변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곧 표정을 다시 관리한 남자가 넌 지시 물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 는걸요. 그나저나 소식은 들으셨나 요, 아가씨? 다음 주 주말에 마첼란 지구에서 거리 축제가 열린다고 하 더군요.”
마첼란 지구라면, 오늘 내가 세드 릭과 만나 이별을 고했던 레스토랑 이 위치한 곳이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뇨, 처음 듣는데요.”
“축제로 이번 주 주말은 인파가 매 우 혼잡할 듯하다고 하더군요. 마차
를 보내 레이디를 에스코트해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가에서 저를 왜 에스코트하나 요?”
“예? 그야, 주말이면 항상 저희 전 하와……/
“아. 소식 못 들으셨나 보군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가 모
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사
실 생각해 보면 상사의 연애 사정을 부하가 일일이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과 저, 오늘 헤어졌답니다. 그러니 주말에 공작님을 만나 뵈어 야 할 이유도 없지요.”
도대체 오늘만 이 말을 몇 번째 하는 건지.
하지만 예상외로 남자는 백작처럼 충격적인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이 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고 있었으면 왜 굳이 에스코트하 겠다는 이야기를 한 거지?
내가 의아해하는 새, 남자가 어색 한 미소를 지었다.
“헤어지셨…… 다고요.”
“네. 오늘 저녁 있었던 일이니 모 르실 법도 하네요.”
“번복하실 의사도…… 없으신 건가 요?”
“전혀요. 공작님께도, 제게도 이편 이 훨씬 나은 길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도 아니었잖아 요?”
노골적인 말투에 남자가 당황한 듯 입술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해둘 게 있었 지. 나는 남자가 대답하기 전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아닉시아 향은 공작저로 보내 드리면 되는 거겠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혹시…… 향수는 레이디 윈스턴께서
직접 전해주러 오시는 건가요?”
“ 아뇨?”
나는 재밌는 소릴 들었다는 듯 웃 으며 대답했다.
“배달부도 있고, 하다못해 제 하인 들도 있는데 구태여 제가 갈 필요는 없겠지요.”
당연한 이야기에 남자가 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용건이 더 있으신가요?”
웃으며 묻자 남자가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걸 전해드리러 온 것 뿐입니다. 늦은 시간 결례가 많았습 니다, 아가씨.”
“뭘요. 저야말로 번거롭게 해드려 서 죄송하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 요.”
남자를 싣고 떠나는 에반스 가의
마차를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코사 지를 내려다보았다. 생화로 만들어 진 코사지는 벌써 조금 시들어 있었 다. 생화로 만든 장신구가 그렇듯 이 코사지 역시 일회용이었다.
굳이 왜 이걸 돌려주러 여기까지 온 거지? 어깨를 으쓱이며 나는 코 사지를 하인에게 건넸다. 버려 달라 는 부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