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
소녀의 말이 맞았다. 네 시간은 몹 시도 촉박했다.
머리를 한 을 한 올 빗질하고, 피 부에 향유를 흡수시키고, 분을 바르 고, 옷을 고르고, 장신구를 걸치고, 그밖에 온갖 치장을 마치고 나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가까스로 약속 시간이 되기 직전 나는 약속장
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할 수 있었다.
‘ 휴우.’
식탁 의자에 앉은 뒤에야 나는 한 숨을 돌렸다.
그래도 세 시간에 걸친 개고생이 영 효과가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효과를 발휘한 것 같기도 했다.
레스토랑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린 걸 느끼며 나는 헛기침을 했 다.
솔직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기는 했다. 안 그래도 예쁜 본판을 죽어라 갈고 닦 았더니 얼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 정도였다.
아리엘이 천재 조향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미인이란 묘 사는 못 봤었는데. 뺨에 간지럽게 닿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불편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왜 안 오는 거야?’
어느덧 약속 시간이 십 분 정도 지났다. 그런데도 남자주인공은 코 빼기도 비치질 않고 있었다.
‘지각할 거면 언질이라도 주든가.’
나는 입을 삐죽이며 차를 홀짝였 다. 아직 얼굴을 보지도 않은 남자 주인공에 대한 내 안의 평가가 마이 너스를 찍었다.
뭐, 평가가 좋든 안 좋든 어차피 오늘 이후론 안 만날 사람이긴 하지 만.
그 뒤, 차를 몇 모금 정도 더 홀짝 였을까.
나는 문득 레스토랑의 공기가 조금 바뀐 것을 느꼈다. 모두들 약속이라 도 한 것처럼 내게서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디 윈스턴.”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 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을 잘라 온 듯 새까만 머리 칼. 루비를 그대로 녹여 굳힌 듯한 적안.
나도 모르게 순간 헛웃음이 나왔
다. 내가 빙의한 로맨스 판타지 소 설〈그대 곁에서 안식을〉은, 남자주 인공의 미모에 대한 묘사가 참 많았 었다. 찬양이 하도 심해 읽으면서 역시 판타지는 판타지구나, 하고 생 각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외모가 실제로 존재했다니.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 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바로 세드릭 에반스였다.
표정을 갈무리한 나는 살짝 남자에 게 묵례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세드릭이 목에 매인 크라바트를 살 짝 느슨히 하며 내 맞은편에 앉았 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오늘따라 업 무가 많아서.”
늦은 것에 대한 사과였다.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식사 뒤에 갤런 화랑에 갈 예정이었던가요.”
세드릭이 건조한 얼굴로 읊었다. 오늘의 데이트 코스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저녁 식사 뒤 갤러리 관람이라, 정 석적인 데이트 코스긴 하네. 나는 속으로 픽 웃으며 말했다.
“아뇨, 공작님.”
정장 소매 단추를 느슨히 풀던 세 드릭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
는 그려낸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 다.
“오늘 데이트는 길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아, 그렇습니까?”
찰나 간 세드릭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는 무감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상 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지 금 데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업 무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
좋아, 역시 예상대로 세드릭은 이 만남을 귀찮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쉬워질 것이었 다.
나는 살짝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세드릭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 았다. 그의 눈빛에 순간 숨기지 못 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성가심’ 이라는.
내가 무슨 귀찮은 말이라도 꺼낼까
짐작하고 있는 걸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일은 없으 니까. 나는 한껏 미소를 걸치며 말 했다.
“우리, 오늘부터 그만 만나기로 해 요.”
세드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레이 디?”
“헤어지자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억지 부려서 시작된 계약 연애고, 저도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서요. 이만 끝내는 게 제게도, 공작님께도 좋을 것 같아서요.”
“……잠깐. 기다려.”
세드릭이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내 뱉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존댓말도 잊고 반 말이 튀어나온 걸까. 하지만 난 못 들은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아, 하고 잊었다는 듯 내가 덧붙였 다.
“향수는 걱정하지 마세요. 떨어지 지 않게 소포로 보내드릴 테니까요. 또 미친개 될 일 없이 넉넉히.”
“미친…… 개?”
아, 실수. 소설 보면서 남주에게 지어주었던 별명이 나도 모르게 튀 어나와 버렸네.
“말실수예요. 공작님, 깔끔한 거 좋 아하셨죠? 우리 인연도 여기서 깔끔 하게 잘라내기로 해요.”
좋아, 완벽했다.
준비해온 대사를 모두 뱉은 나는 씩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아무런 뒤탈도 없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세드릭을 내 려다보았다. 화려한 적안이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공작님께서도 당연히 동의하 시는 걸로 알고, 저는 이만 먼저 물 러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실례가 많았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묵례했다.
세드릭도 그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 을 것이다. 특이 체질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정제 때문에 마음에 도 없는 여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 녀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당신도 이젠 해방이야.’
솔직히 직접 보니까 왜 그렇게까지 아리엘이 목을 맸는지 이해가 되기 는 했다. 하지만 남자 얼굴이 좀 반 반하다고 죽음까지 불사할 수는 없 잖아?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남자
주인공과 얽히지만 않으면 아리엘은 이제 엑스트라보다도 못한 존재가 될 것이었다. 소설 전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 되겠지.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었 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나는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레스토랑을 나섰 다.
뒤늦게 ‘잠깐!’ 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지만, 뭐. 잘못 들은 거겠지.
나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마 차에 올라탔다. 남자주인공과 이별 하는 건 아리엘에게 있어 가장 중요
하고 필수적인 과제였다. 그걸 깔끔 하게 클리어해냈다고 생각하니 기분 이 무척 좋았다.
내 집, 윈스턴 백작저에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홀에 발을 들이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아리엘 윈스턴.”
풍채가 건장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었다. 사용인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본 나는 단번에 깨달 았다. 저 남자가 이 저택의 주인, 윈스턴 백작이라는 사실을.
즉, 이 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 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나는 영화에서 봤던 동작을 떠올리 며 윈스턴 백작에게 인사를 했다. 백작이 찌푸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 았다.
“또 에반스 공작을 만나고 돌아오
는 길이냐?”
“예, 아버지.”
일단 사실이긴 했기에 그렇게 대답 하자, 백작이 보란듯이 얼굴을 일그 러뜨렸다.
“네 그 같잖은 연애놀음 때문에 윈 스턴 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있 다, 아리엘. 사람들이 널 손가락질하 고 비웃는다는 걸 모르는 게냐?”
난데없이 비난을 들은 나는 눈을 끔뻑였다. 백작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네가 그리 용을 쓴다고 에반스 공 작이 너를 거들떠볼 것 같으냐. 네 게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맺어졌 겠지!”
쉬지 않고 쏟아지는 노성. 나는 가 볍게 한숨 쉬며 백작의 이야기를 끊 듯이 말했다.
“공작님과는 헤어졌어요.”
“네 행실이 그래서야 어디 혼처라 도 제대로 구할 수 있겠…… 뭐?”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에반스 공작님과 헤어졌다고 말씀 드렸어요, 아버지.”
나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뒤탈 없이 깔끔한 이별이었죠. 그 러니 이제 제 걱정을 해주실 필요는 없답니다.”
“헤어졌…… 다고?”
멍하니 그 말을 더듬던 백작이 돌 연 이마를 구겼다.
“드디어 버림받은 거냐! 구차하게 매달리더니 결국!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스스로 위신을 더럽히니 이제 만족스러우냐, 아리엘!”
이 백작님, 딸의 위신을 걱정하는 건지, 가문의 위신을 걱정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걱정이 정말 많으시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 다.
“버림받긴 누가 버림받았단 말씀이 세요? 아버지. 깔끔한 합의 이별이 었답니다.”
“……뭐?”
“정 걱정되시면 제가 오늘 갔던 레 스토랑의 웨이터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공작님께 버림받아 눈물 바람 날리며 소란이라도 피웠을까 걱정이 신 모양인데,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요.”
“……창피해서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냐? 네가, 에반스 공작에게 버 림받고도 침착했다고?”
“버림받은 게 아니라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한번 똑 똑히 말해 주었다.
“먼저 이별을 제안한 건 저예요. 공작님께선…… 뭐, 무언으로 동의 하셨고요.”
사실, 정확히 말하면 세드릭이 한 대답이라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쳐다본 게 전부였지만, 날 지긋 지긋하게 여기던 세드릭이 이별을 거부할 린 없으니 동의한 거나 마찬
가지라고 봐도 되었다.
친절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믿지 못 하겠는지 백작이 더듬더듬 말했다.
“네, 네가 네 입으로…… 에반스 공작에게 이별을 고했다고?”
“바로 그거랍니다, 아버지.”
이제야 말이 통했군. 나는 가볍게 웃으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유령이라도 본 듯 낯선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번엔 무슨 꿍꿍이
냐, 아리엘? 공작의 관심을 끌어보 려는 수작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게 다!”
“아니라니까요. 전 더 이상 공작님 께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이번에야말로 못 들을 말을 들은 듯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리엘. 어디가 아픈 거냐? 리나! 아리엘의 열을 재보거라!”
리나라 불린 사용인이 종종걸음으 로 달려와 조심스레 내 이마에 손을
댔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평소 이 몸이 세드릭에게 얼마나 집착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내 말을 믿지 못 하는 걸까.
뭐, 이 정도 후폭풍은 어쩔 수 없 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열은 없지만, 조금 피곤하긴 하네 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물 러가 봐도 될까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