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
스물세 살. 삶을 끝내기엔 너무 어 린 나이.
그러나 죽음의 순간, 나는 마냥 슬 프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지긋지긋 한 병상을 떠나는 데에 해방감을 느 꼈는지도 모르겠다.
오 년에 걸친 투병 생활. 전 세계 를 뒤집어도 사례가 몇 없다는 희소 병에 걸린 나는, 후각부터 시작해서 점점 모든 감각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시각까지 잃었을 때, 우습게도 내가 가장 화가 났던 건 그나마 즐겁게 읽던 로맨스 판타 지 소설의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 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죽음이 슬프고 아쉽지 않다 면 거짓말이었다. 결국 끝이 죽음이 라면 그 오랜 투병 생활은 뭘 위해 견뎠던 걸까,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죽음 뒤 나는 다시금 눈을 떴다.
시각을 잃기 직전까지 읽었던 로맨 스 판타지 소설,〈그대 곁에서 안식 을〉의 악역에 빙의해서.
쑤 쏘 쏘
나는 코를 움찔거리며 잠에서 깨어 났다.
‘좋은 냄새.’
온 방 안에서 향긋한 장미 향이 진동했다.
뭐지, 간호사 선생님이 방향제라도 피워 두고 가셨나? 어디 방향제인지 꼭 물어봐야 겠……,
‘잠깐. 냄새라고?’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냄새라니. 후각은 내가 병에 걸린 이후 가장 먼저 잃은 감각이었다. 냄새라는 걸 맡아본 지가 어언 오 년도 훌쩍 넘었는데……,
나는 얼른 코를 킁킁대 보았다. 향 기로운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왔 다.
“지, 진짜 장미 향이 나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벌 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돌처럼 굳었다.
‘여기가 어디야?’
눈이 돌아가도록 넓고 호화로운 방 이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진 몰라 도, 병실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 히 알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녀가 친절한 미소를 띠고 내 게 다가왔다.
잠깐. 저건…… 메이드복? 영화에 서나 보던 복장을 왜 현실 사람이 입고 있는 거지?
“좋은 아침이에요, 아리엘 아가씨. 오늘 아침 입욕제는 어떤 걸로 하시 겠어요?”
아리엘 아가씨? 입욕제?
모를 말만 늘어놓은 소녀가, 내 앞 에 은색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
엔 비누처럼 생긴 파스텔톤의 무언 가가 세 개 담겨 있었다.
이걸 나한테 왜 보여주는 거지? 그런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나는 멍하니 쟁반으로 손을 뻗었다.
쟁반에선 굉장히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 향 같기 도 한. 맡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 로가 풀리고, 몸이 나른해지는 향기 였다.
냄새라는 게 이렇게 황홀한 것이었 던가?
내가 멍하니 충격에 빠져있자, 소 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 도……?”
겁먹은 소녀의 얼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요.”
그러자 소녀가 눈을 찢어질 듯 커 다랗게 떴다.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아, 아가씨, 왜 존대를…… 제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정하겠습니다!”
소녀가 꾸벅 구십 도로 절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녀를 말렸다.
“무슨 소리세요? 잘못이라니!”
“화…… 화나신 게 아닌가요?”
“전혀 아니에요!”
그제야 소녀가 허리를 펴고 겁먹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사슴 같은 눈망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어라, 잠깐. 내 얼굴?
“어?”
“왜, 왜 그러세요, 아가씨?”
“내…… 내 얼굴이……/
나는 멍하니 내 뺨을 감쌌다. 소녀 의 눈동자 속에 비친 여자도 함께 제 뺨을 감쌌다. 분명 익숙한 얼굴 이어야 할 여자는, 내가 모르는 얼 굴을 하고 있었다.
“거…… 거울. 거울을 가져다 줘 요.”
“네, 아가씨!”
잠시 후 거울을 들여다본 나는, 그 대로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길게 굽이치는 벌꿀색 머리카락. 여름 하늘처럼 투명한 청록색 눈동 자.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난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친 게 아니 라면, 좋아하던 소설의 삽화 속에서.
“아까 날…… 뭐라고 불렀죠?”
“네? 그야, 아리엘 아가씨라고……,”
맙소사.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 리로 되물었다.
“(아리엘 윈스턴?”
“네, 그게 아가씨의 성함이지요……?”
하하하. 나는 허탈한 웃음을 뱉었 다.
아리엘 윈스턴.
그건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읽 었던 소설,〈그대 곁에서 안식을〉에
등장하는 조연의 이름이었다.
아리엘 윈스턴의 삶이 어땠던가.
솔직히 원작을 읽은 나로서도 아리 엘 윈스턴에 대해선 그다지 이야기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아리엘은 원작 초반부에서 퇴장 하는 조무래기 악역이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뭐라도 좀 떠올려 보자.’
좋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일단 아리엘은 설정상 천재 조향사 였다. 일개 조무래기 악역인 아리엘 에게 이런 설정이 붙은 이유는 이 소설의 남주 때문이었다.
남자주인공 세드릭 에반스는 유년 시절에 비극적인 과거를 겪은 적이 있었다.
극악무도한 악역 집단에게 납치되 어 마물과 인간을 합성하는 인체실 험의 희생양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결과 세드릭은 특이한 체질을 지니게 되었다. 마계의 꽃 아닉시아 향을 주기적으로 맡지 않으면 잠을 청할 수 없을뿐더러, 그 기간이 너
무 길어지면 미쳐서 폭주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체질이 그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드릭 은 천재 조향사를 수소문하고, 내가 빙의한 ‘아리엘 윈스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리엘은 천재답게 세드릭 을 진정시킬 수 있는 향을 인위적으 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남주에게 상납 했다면 아리엘은 악역이 아니었겠 지.
세드릭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한 아 리엘은 거래를 제안한다. 주기적으 로 향을 제공하는 대신, 자신과 계
약 연애를 하자고.
약점을 잡힌 세드릭은 제안을 빙자 한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만다.
아리엘이 그 피상적인 교제에 만족 했으면 좋았으련만, 사람의 욕심엔 끝이 없다고. 그녀는 가면 갈수록 세드릭의 진짜 애정을 갈구하게 되 었다. 물론 세드릭은 그런 아리엘을 지긋지긋해하며 더욱 밀쳐낼 뿐이었 고.
갈수록 집착이 심해진 아리엘은 결 국 여주인공을 질투한 끝에 독향으 로 암살을 시도하고, 살인미수죄로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진짜 비참한 캐릭터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은 왜 하필 나를 이런 불나방 같은 악역에 빙의시킨 걸까?
마지막을 화끈하게 불태우고 가라 는 배려인가?
‘거 참, 눈물 나게 고맙네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기적처럼 얻은 두 번째 삶이었다.
이번에도 허무하게 죽어버릴 순 없 었다. 나는 원작의 운명을 거슬러, 어떻게든 살아남고 말겠다고 결심했 다.
‘그러려면 사망 플래그부터 피해야 지.’
세드릭 에반스. 아리엘에게 걸어 다니는 사형 집행인 같은 존재.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 깝게도 내가 빙의한 시점은, 이미 아리엘과 세드릭의 계약 연애가 시 작된 이후였다.
지금 도망가봤자 ‘향’이 필요한 세 드릭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나를 추격할 것이었다. 그래선 안 됐다. 나는 세드릭을 비롯한 모든 사망 플 래그에게서 깔끔하게 멀어져야 했 다.
‘그걸 위해 내가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과제는/
남자 주인공에게 이별을 선고하는 것.
최대한 깔끔하고, 뒤끝 없는 이별 이 필요했다.
‘우선은 남주인공과 이별부터 하자.’
그렇게 결심한 순간, 문이 똑똑 울 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계속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메이드복을 입은 소녀가 욕실 안으 로 빼꼼 고개를 내밀곤 말했다.
“아리엘 아가씨, 약속 시간에 늦으 실 것 같아서……『
“아, 내가 너무 오래 있었지. 미안 해.”
“네? 아뇨, 사과하실 일은 아닌데
요……
소녀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까 존댓말 한 번 했다고 내가 비꼬는 줄 안 것도 그렇고, 원래 ‘아리엘’은 그다지 좋은 주인이 아 니었던 것 같았다.
한숨을 쉰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방금, 약속 시간이라고 했 어?”
“아, 네, 아가씨. 지금부터 준비하
셔야 저녁 약속에 늦지 않으실 것 같아서 요……!”
저녁 약속이라니. 나는 이마를 짚 었다.
아직 이 새로운 세상에 제대로 적 응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나는 지금 아리엘의 인간관계도, 말투도, 성격도 취미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아리엘을 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다간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웬만하면 미루고 싶었다. 아니, 미 루자.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그 약속, 혹시 미뤄줄 수 있어?”
“네?”
소녀가 눈을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떴다.
“에, 에반스 공작님과의 저녁 약속 을요?”
……에반스 공작?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설마 오늘 저녁 약속 상대가 세드릭 에반
스…… 그러니까, 남자주인공이었단 말이야?
‘이럴 수가.’
던전에 입장해서 이제 막 지형지물 을 살피고 있는데 덜컥 최종 보스부 터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 다.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 어.’
어차피 남자주인공은 한 번은 만나 야만 했다.
아리엘이 억지를 부려 이루어진 계 약 연애를 끝내고 사망 플래그를 벗 어나려면.
이별도 얼굴은 보고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 런 일은 질질 끌 필요가 없었다.
오늘 저녁 남주인공을 만나고, 여 태까지 억지 부려서 미안했다고 뒤 탈 없게 사과한 다음.
‘깔끔히 이별하는 거야.’
결심을 굳힌 나는 소녀에게 말했 다.
“아니. 역시 약속은 취소하지 않을 래.”
내 말에 소녀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치장 일손을 불러올게 요, 아가씨. 약속 시간까지 네 시간 밖에 남지 않아서 조금 촉박하네 요.”
네 시간이나 남았는데 뭐가 촉박하 다는 거야?
의아함을 감추며 나는 욕조에서 몸 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