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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257화 (257/258)

< 외전 26. 시대의 이름 (完) >

사람들은 말한다.

첼시에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지금의 보안요원도 그렇고, 런던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날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다려 준 팬들.

내가 맨시티에서 첼시를 그렇게 두들겼는데도, 여전히 날 그리워하고, 돌아온 순간 모두가 반겨줬다.

나야말로 고맙다.

선수로서 이런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난 라커룸에 들어갔다.

라커룸에는 아직 선수단이 도착하지 않았고, 딱 두 명이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교체명단에 이름을 올린 동생 유진과 또 그 옆에서 잔소리를 쏟아 내는 클라라.

"야! 멍충아! 긴장해서 몸 그렇게 풀다간 근육이 오히려 너무 풀어진다니까?"

"으응, 알았어."

절로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다.

자기보다 훨씬 큰 유진이를 몰아붙이는 클라라와 쭈뼛거리며 대답하는 유진.

사이좋은 쌍둥이다.

유진은 첼시 유스팀 소속이다. 아주 어린 시절, 나를 TV로만 보던 시절엔 내가 첼시 선수였으니까. 그때부터 첼시의 팬이었고 '파란 유니폼'을 사랑했다.

아무튼, 내가 마침 첼시로 오면서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됐다.

유스팀 소속이지만 실력이 워낙 출중해 오늘 처음으로 교체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런 유진을 직접 보살펴 주겠다고, 율리아겐의 밑에서 수학한 클라라가 런던까지 따라왔다.

율리아겐에게 듣기론, 그 능력이 자신에게 버금간다고 하니.

미래에도 유진의 곁을 지켜 줄 클라라를 생각하며 절로 흐뭇해졌다.

내가 가만히 미소 짓고 있자 클라라가 나한테 다가왔다.

어릴 때 귀여운 모습이 아직도 얼굴에 남아 있지만,

막상 코앞에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올려다보는 모습이 퍽 무섭다.

"오빠! 오빠도 어서 스트레칭을 해!"

"······응."

***

첼시 선수들은 대체로 어리다.

그래서인지, 분위기에 쉽게 취한다.

지금까지는 늘 패배에 잠식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사실상 리그 결승전에 임하는 선수들은 모두 단 한 사람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했던 적도 있다.

38살의 노장.

그 나이 대에 스트라이커란 포지션이라니.

하지만 한 경기 만에 걱정은 모조리 사라졌다.

[지금 스탬포드 브릿지는 제퍼슨의 독무대입니다!]

든든했다.

넓은 등, 쩍 벌어진 어깨, 20대 선수들하고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근육질의 몸.

저게 어딜 봐서 38세의 노장이란 말인가.

하물며 보여 주는 실력은?

[제퍼슨 리! 또 한 번 돌파를 시도합니다!]

[오, 이럴 수가! 엄청난 스피드입니다! 왼쪽 측면을 찢어 버립니다! 제퍼슨이! 맨유의 수비진을 철저하게 부숴 버립니다!]

[슈웃! 골입니다! 골! 제퍼슨 리! 시작하자마자 맨유를 나락으로 보내 버립니다!]

"엄청나."

"진짜······ 대단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첼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리더의 부재였다.

제퍼슨이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지금 경기장에서 리더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특별히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거나, 악을 쓰지 않아도 그랬다.

단지 존재감.

그 무시무시한 압도적 존재감이 필드를 휘어잡았다.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공을 잡은 채 견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뛰는 것 같은데도, 어느 순간 박스에 있고.

넘어질 듯 말 듯 하면서도, 끝내 모든 선수를 튕겨 내는 전차 같은 돌파력.

골문을 향해 한 치의 오차 없이 향하는 슈팅은······.

[제퍼슨 리! 필드를 지배합니다!]

[두 번째 득점입니다! 제퍼슨 리! 맨유의 수비진 망연자실합니다!]

완벽했다.

첼시 선수들은 그저 제퍼슨을 따라 움직였다.

"뭐지? 이건?"

선수들은 귀신이라도 들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다.

패스를 보내면 제퍼슨이 있다. 몸싸움에 밀려나면, 어느 순간 제퍼슨이 와서 공을 받아 준다.

압박에 시달리면 제퍼슨이 다가와 압박을 풀어 준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20대의 한창인 선수들이 제퍼슨을 만나면 겁에 질린 사슴처럼 끙끙댔다.

모두 질린 얼굴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그런 상대방, 이번 시즌 가장 강력했던 맨유의 선수들이 겁에 질렸다.

첼시 선수들은 고무됐다.

'우리가 챔피언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제퍼슨의 등을 바라봤다.

가장 앞에서, 모든 선수 앞에서 박스를 향해 내달리는 캡틴.

그를 표현하는 수많은 찬사가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선수들은 그 어느 것도 감히 제퍼슨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퍼슨 리! 리그 최종전, 해트트릭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끝내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순간.

첼시는 우승을 직감했다.

***

솔직히 말해 내 전성기는 끝났다.

"개소리하지 마! 전성기 끝난 놈이 우리 맨유를 상대로 3골을 넣어?"

맨유 관중석에서 저런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사실이다.

60분쯤 돼서, 눈에 띄게 지치고 몸이 무거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율리아겐도 이제 자기만의 회사를 만들어 떠나기도 했고.

힘들다.

진짜로.

목젖이 튀어나올 것 같다.

온몸이 무겁다. 땀에 젖은 유니폼이 유난히 무겁다.

시야가 좁아진다.

판단력이 느려지고 몸이 굼뜨다.

늙긴 늙었다.

팀을 이끄는 위치. 그리고 후배들이 의지하는 게 느껴지니 중압감은 더 무겁다.

하지만.

"뛰어!"

"제-프!"

내 앞에 동료는 없다.

나는 스트라이커다.

맨 앞에서, 외로이 싸워야 하는 포지션.

홀로 더 많은 수비수 사이에서 이겨 내야 하는 위치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엔 후배들이 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내 이름을 외치며 뛰쳐나가는 선수들.

그들 사이로 공이 빠르게 오갔다. 정확하고, 센스 있고, 날카로운 패스들이.

아직 한창인 선수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정열적이며 두려울 게 없는 녀석들. 이들은 내가 위닝 멘탈리티에 불을 지르자, 그 누구보다 더 강력해졌다.

그 순간, 땀으로 젖은 내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슬쩍 벤치의 션 올리버를 바라봤다.

흐뭇한 얼굴의 올리버.

이 녀석들, 다 올리버가 유스 코치시절부터 키운 녀석들이랬지?

그럼, 후배들한테 지친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지.

"공 줘!"

별안간 외치며 달려갔다.

오른쪽 측면에서 드리블하던 어린 윙어가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반응했다.

조금 부정확한 패스.

상관없다.

"······훅!"

헛숨을 들이켜는 상대 수비를 밀쳐 내며 반박자 빠르게 공을 잡아낸다.

공이 발바닥에 붙는 순간. 필드 위의 모든 것이 느려진다.

시야가 넓어지고 한층 깊어진다. 질린 표정, 두려운 얼굴, 땀에 젖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수비수들의 얼굴이다.

그들은 거짓말처럼 나에게 몰려들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있겠지.

저 자식 지쳤어! 다리를 노려! 길을 막아! 몸으로 밀쳐 내!

뭐 이런 것들.

달려오는 선수들 너머, 관중석의 관중들을 바라봤다.

잔뜩 기대감 어린 눈빛.

흠.

그러면, 내가 아직 안 늙었다는 걸 보여 줘야겠지?

투웃!

"······!"

달려오는 세 명.

그 사이로 내달렸다.

내가 주춤하지 않고, 그저 정면으로 달려오자 이제 20대 중후반의 수비들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속도를 절대 죽이지 않았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근육이 꿈틀거리며.

'버틸 수 있겠지?'

발목과 종아리, 이젠 젊은 시절 그 단단함을 잃어버렸지만.

어쩌면 지금이라면.

지금 딱 한 번이라면.

'이겨 내라.'

과거 매 경기를 앞두고 했던 기도처럼.

내 발목이, 내 무릎이, 내 허벅지가 버티길.

이겨 내길 간절히 바라면서.

뛰었다.

어······ 그러니까 하늘 위로 뛰었다.

"------!"

"히-어-로-랜-딩!"

누군가 비명처럼 내질렀다.

맞다.

달려오는 선수 세 명의 머리 위로 덤블링 치면서 착지했을 때.

내 앞엔 오직 골대만 보였다.

뻐어어엉!

모두가 날 쳐다본다.

그들에게 시위하듯이, 나는 골대 뒤 전광판에 올라가 양팔을 벌렸다.

"제프! 제프! 제프! 제프!"

암, 아직 안 죽었다고!

***

[선수 교체가 있겠습니다. 9번 제퍼슨 리가 나오고, 22번 유진 선수가 투입됩니다.]

경기장 아나운서의 외침.

그 순간.

제퍼슨의 응원가를 부르던 관중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기립 박수를 쏟아 냈다.

비단 첼시 관중뿐만이 아니었다.

적으로 만난 맨유 관중들도 주섬주섬 일어나 박수 행렬에 참여했다.

"Waaaaaaaaaaaaaaaaa!"

미칠 듯이 쏟아지는 박수와 함성 속에.

제퍼슨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교체되는 유진을 꽉 껴안아 줬다.

"걱정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해."

"응!"

유진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면서 필드 위로 뛰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제퍼슨은 벤치에 앉았다.

물러나고 벤치에도 앉았건만, 박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경기 내용에 상관없이 경기장의 모든 함성과 박수는 제퍼슨에게 집중됐다.

"여전하네, 제프. 아직 한창인데, 아예 몇 년 첼시로 이적해 오는 게 어때? 로만 구단주가 네 동상하고 내 동상을 세워주겠다는데?"

필마르크 감독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마지막 히어로 랜딩으로 넣은 네 번째 골에 그는 퍽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저 대신, 유진이가 있잖아요."

내 말에 감독은 웃으면서 필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유진이 맨유의 수비수들을 말 그대로 날려 버리면서 데뷔골을 넣는 모습이 보였다.

"딱 널 처음 볼 때 같은데?"

필마르크는 감격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첼시 팬들은 날 잊지 못했다.

내가 이대로 떠난다면, 계속 날 그리워하리라.

하지만, 이제 유진이가 그 자리를 메꿔 줄 테니까.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지.

유진을 보자,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끝났다.'

이제 내 시대는 끝났다.

2019년에 시작해, 2039년 현재.

'제퍼슨 리'의 시대라고 불렸던 축구는 끝났다.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축구계를 지배할 때가 됐다. 저기 있는 유진이의 시대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상치 못한 데에서 새로운 선수의 시대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메시와 호날두처럼, 여러 선수가 동시에 튀어나올 수도 있겠지.

뭐 하여간······.

"내 시대는 끝났지."

조금은 씁쓸하지만, 이제는 물러날 때다.

눈앞이 조금은 붉어지긴 하는데······.

"제프!"

그때, 벤치 뒤 관중석에서 날 연호하는 부름이 들렸다.

유난히 선명했다.

늙수그레한 목소리.

아마도 올드팬이겠지.

난 고갤 돌리지 않았다. 붉은 충혈된 눈동자를 괜히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 관중은 내가 고개를 돌리든 말든 계속해서 외쳤다.

"제프! 당신이 있어 행복했소!"

누군가에게 행복을 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데 저 관중은 이렇게 말한다. 나 때문에 행복하다고.

조금은 낯부끄럽지만, 난 묵묵히 들었다.

"당신의 시대에 축구를 보기 시작했고, 당신의 시대가 끝나가는 지금도 축구를 보고 있소. 내 아들도, 내 손자도 당신을 보고 있소."

3대가 내 축구를 보고 있다라······.

"그러니 당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수다!"

끝나지 않는다.

"내 아들도, 내 손자도, 그 녀석의 자식들도, 그들의 자식들도 당신을 기억할 거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지금 시대의 이름도 제퍼슨이고, 다음 시대의 이름도 제퍼슨일거요. 영원히! 정말로······ 정말로 고맙소."

그 노인은 마지막에 울먹이느라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벤치에 앉은 선수들도, 코치 올리버도, 필마르크 감독도.

모두 침묵하며 그저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스포츠계의 아주 오래된 격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제프, 당신은······ 당신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였소!"

팀보다 위대한 선수라······.

유진이 또 한 번 득점을 넣는 모습을 감상하며.

난 벤치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행복하게 끝났군."

정말로.

-完-

< 외전 26. 시대의 이름 (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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