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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256화 (256/258)

< 외전 25. 노장 (4) >

[제퍼슨 리가, 제퍼슨 리가! 왕이 돌아왔습니다! 런던의 왕! 런던의 왕이 돌아와 스탬포드 브릿지에······ 오, 정말 감격적입니다!]

[제퍼슨 리의 이른 선제골이 아스날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도대체······."

릭 돌프란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제퍼슨이 있었다. 자신의 등번호를 가리키며 첼시 관중에게 포효하는 제퍼슨 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깐이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촌각.

갑자기 질주하는 제퍼슨을 잠깐 놓쳤을 뿐이다.

잠깐의 실수는 비극이 되어 돌아왔다.

박스에 바글바글 몰려든 수비수를 홀로 이겨 내면서 골을 욱여넣었다.

"저게 말이 돼?"

목소리가 떨렸다.

쉬이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과 스킬이다.

아스날의 스트라이커도 훌륭한 선수지만, 저런 견제와 집중 수비에선 서 있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차라리 넘어져서 PK라도 얻어 내려고 노력하리라. 그게 맞는 판단이다.

한데 제퍼슨은 버텼다. 버텨 내고, 이겨 냈다. 끝내는 완벽한 슈팅으로 골을 넣었다.

더 무서운 건 제퍼슨의 현재 상태다.

20대 창창한 젊은 나이도 아니다.

'38살.'

이제 은퇴할 늙은이.

그렇게만 생각했던 릭 돌프란은 점점 마음이 옥죄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랬다.

투욱!

"어엇!"

순식간에 옆을 지나치며 내달리는 제퍼슨.

아무리 전력으로 뛰어도, 그 스피드를 조금이라도 따라가지 못했다.

"끄윽!"

몸싸움을 하면, 마치 바위에 몸을 던진 것처럼 둔중한 충격이 내장까지 뒤흔든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강렬한 충격에 머리가 띵하다.

"도대체, 대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제퍼슨을 쫓아가기 위해, 뛰고 또 뛰면서, 체력은 급속도로 고갈됐다.

그렇다고 제퍼슨을 잘 막았느냐?

[제퍼슨 리! 모든 압박을 뚫어냈습니다!]

[단숨에 돌파! 태클! 접었습니다! 슈웃! 또 접고! 페이크! 다시 접고, 또 접고! 이런 수비수들이 우르르르 무너지는군요! 제퍼슨 리! 골키퍼를 제쳐 내면서 두 번째 득점을 올립니다!]

릭 돌프란은 바들바들 떨었다.

"38살이 어떻게 이럴 수가······."

그는 난생처음 공포를 느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산맥 앞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정상을 바라보며 또 다른 경외감을 품었다.

도저히 가늠이 안 된다.

저 끝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지금도 이럴진데, 정말 최전성기 땐 어땠단 말인가.

릭 돌프란은 처음으로 거만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몇몇 선배들이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는 행복한 거야. 제퍼슨이 없는 프리미어리그를 경험하고 있잖아?'

릭 돌프란은 그 말을 정말 우습게 생각했다.

그저 패배자의 넋두리. 또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꼰대의 흔한 변명이라 생각했다.

지금 릭 돌프란은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아니, 불쌍했다.

38살의 노장인데도 필드를 혼자서 지배하는 이 괴물.

이 괴물이 한창때 상대했던 선수들이 느꼈던 자괴감은 어땠을까?

공격수는 공격수대로 그와 비교됐을 것이고, 미드필더들도 스트라이커가 자신들보다 그 포지션에서 잘한다는 사실에 비관했으리라.

하물며 수비수들은 어떨까.

아무리 해도 막지 못하는 절대적인 공포 앞에서.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은 도대체 어땠을까.

과거의 선수들은 말했다.

'두려움이 극에 달할 땐, 그게 경외와 찬사로 바뀌더군.'

그렇다.

하도 두려워하다 보니, 나중에는 결국 제퍼슨을 경외하게 됐다고.

제퍼슨이 끝내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순간.

릭 돌프란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인정했다.

'세계 최고는,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12년 만에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터져 나오는 응원가.

아스날의 주장, 살라바는 씁쓸하게 웃었다.

"스탬포드 브리지의 악몽이, 12년 만에 되살아나는군."

그의 떨리는 시선의 끝엔, 자신의 등번호를 가리키며 오연하게 서 있는 제퍼슨이 있었다.

***

어쩌면, 그 경기는 세상의 모든 축구팬이 주목한 경기일지도 모른다.

첼시와 아스날의 런던 더비라서?

리그 우승권팀과 강등권팀의 경기라서?

아니, 그 어떤 것도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왕의 귀환!]

런던의 왕이라고 불렀던 제퍼슨 리의 귀환.

모두가 반신반의했다.

38살의 나이.

당장 은퇴해야 하는 노장의 나이다. 하물며 프리미어리그는 유럽 제일의 리그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 둬야 아름다운 법이다. 수많은 사람이 제퍼슨이 과거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면, 오히려 커리어에 독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제퍼슨이었다.

[제퍼슨 리, 17라운드 아스날전 해트트릭 폭발!]

[첼시, 승점 23점으로 14위로 껑충]

[왕의 귀환! 제퍼슨 리,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다.]

[Still Hero, 캡틴 아메리카.]

경기장은 뜨거웠고, 믹스트존의 기자들도 상기된 얼굴로 기다렸다.

제퍼슨 리.

선배 기자들에게 들었던 그 대단한 선수의 등장.

제퍼슨이 믹스트존에 나온 순간, 놀라울 정도로 침묵했다.

그리고 침묵을 깬 건, 베테랑 기자의 질문이었다.

"제퍼슨 리, 당신의 화려한 복귀가 위기에 빠진 첼시를 구했습니다. 이대로 강등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강등권이라······."

제퍼슨은 낯선 단어에 잠깐 혀를 굴렀다.

익숙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감히 대답을 재촉하지 못했다. 제퍼슨은 그런 선수였으니까. 그저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제퍼슨은 무언가 계산을 마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우리 목표는 우승입니다."

"······네?"

젊은 기자가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누구도 그 기자를 타박하지 못했다. 믹스트존에 모인 기자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어······ 지금 첼시가 리그 15위인 건 아시죠?"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승 경쟁이요?"

"남은 잔여 경기 21경기. 모두 전승하면 승점 63점이네요. 지금 승점 23점이니까. 승점 86점이면······ 우승 경쟁, 충분히 도전할 만하지 않나요?"

"······!"

남은 경기 전승.

그 순간, 믹스트존에 있던 기자들은 모두 몸을 떨었고.

이 인터뷰를 들은 첼시의 올드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율했다.

"제퍼슨이, 제퍼슨이 진짜 돌아왔다!"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들이 보면 허황한 인터뷰였지만.

그 인터뷰어가 제퍼슨이라면.

제퍼슨이라면 다르다.

첼시의 이번 시즌 목표는, 강등권 탈출이 아니라 우승이었다.

***

누군가는 그 말을 비웃었다.

정확히는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과 팬들이다.

제퍼슨 시대를 그저 듣고, 멀리서 보기만 했던 어린 세대가 이젠 20대, 30대 주축이 됐다.

그들은 제퍼슨의 발언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외쳤다.

"강등권 탈출이 아니라 우승?"

"21경기 전승해서 우승 경쟁?"

"이게 게임인 줄 아나?"

"전성기 제퍼슨이면 모르지, 38살의 노장 제퍼슨인데?"

하나 그들은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골! 골입니다! 왕의 귀환! 제퍼슨 리! 골폭격을 이어 갑니다!]

리그 18라운드, 웨스트햄전 2골 1어시스트. 4대1 승리.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제퍼슨 리,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격언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런던의 왕이 세계의 왕이 되어 다시 런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햄! 런던의 주인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리그 22라운드, 웨스트햄전 해트트릭 폭발.

[첼시의 캡틴 제퍼슨 리, 전반 24분 만에 선제 득점을 기록합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막지 못합니다!]

리그 23라운드, QPR전 1골 2어시스트. 3대 0 승리.

[그 누가 제퍼슨을 막겠습니까! 그 누가! 제퍼슨이 데뷔한 이후 무려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퍼슨을 막는 방법은 없습니다!]

리그 26라운드 2대 0 승리.

[첼시! 17라운드부터 30라운드까지 14경기 연승 행진을 이어 갑니다! 제퍼슨 리! 14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며, 본인의 19경기 연속 득점 기록을 추격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4연승, 5연승 할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팬들은, 끝내 30라운드가 넘어갈 때까지 연승하는 첼시를 보며 경악했다.

16위까지 쳐졌던 첼시는 어느새 리그 5위까지 올라왔다.

어쩌면 하늘의 운이 그들에게 닿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리그의 절대강자였던 맨시티가 제퍼슨이 떠난 이후 좀처럼 힘을 못 쓰는 리그 상황.

리버풀과 맨유, 토트넘, 아스날이 서로를 물고 무는 혼전이었는데,

그 틈을 타 첼시가 상위에 안착했다.

"설마?"

"진짜 이대로 첼시가 전승하나?"

"전승해도 우승할 수 있을까?"

"지금 리그 분위기상 승점 80점이 넘으면 우승할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첼시의 미친 상승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마지막 리그 38라운드.

맨유와의 최종전이 다가왔다.

***

"오늘 중요한 경기인 거 알지? 긴장해라. 경찰들 있다고 너무 안심하지 마."

"알겠습니다."

스탬포드 브리지의 보안요원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상관의 말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터널로 나갔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LEE Will, LEE Will Fuck You!"

엄청난 응원이 쏟아지는 그라운드.

어두운 필드를 비추는 눈부신 조명.

그걸 본 보안요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이 절로 떨렸다.

경기장을 울리는 진동. 어린 시절, 아버지와 경기장을 찾을 때 저기에 몸을 맡겼었다.

'제퍼슨이 다시 첼시에 오고, 정말 우승이 코앞이라니'

보안요원은 상기된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비록 오늘 관중석에서 저 역사적인 장면에 함께하지 못하지만,

그는 구단 보안요원으로서 만약에 있을 일에 대비해야 했다.

터널 안으로 들어온 그는 선수단이 모이는 라커룸을 슬쩍 바라보곤 그 앞을 지켰다.

아직 선수들이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

"응?"

그때, 보안요원은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여자, 아니 소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어린데?'

맨 처음 들은 생각은 그것이었다.

열여섯?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그게 이상한 일이다. 일반 팬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경기장 투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는 첼시 관계자, 스태프, 경기장 관리자, 또는 리그 협회 직원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기자들도 못 들어오는 곳 아닌가?

보안요원은 여자의 목에 걸려 있는 스태프 카드를 보고 잠시 당황했다.

'스태프? 첼시에 저런 여자 스태프가 있나? 팀 닥터?'

보안요원은 잠시 당황했다가 일단 제지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관계자십니까?"

"네. 여기 스태프 카드요."

어린 소녀는 당차게 말했다. 174cm 정도 되는 키.

밝은 얼굴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 태도에 보안요원은 스태프 카드를 유심히 봤다.

'임시 팀 피지컬 트레이너, 클라라?'

이 어린아이가 피지컬 트레이너라고?

아무리 봐도 내 여동생보다 어린데?

그렇게 생각하고 머뭇거리면서 쉬이 길을 열어 주지 못할 때.

"아, 제 동생이에요."

"헉!"

보안요원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클라라의 어깨에 척 큼직한 손을 올리는 제퍼슨 리.

그의 등장에 보안요원은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유진이하고 제 상태 확인해 주는 트레이너이기도 하니까. 들어가도 괜찮겠죠?"

"아······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저씨!"

제퍼슨의 인사에 클라라도 밝게 인사했다.

보안요원은 지나쳐 가는 제퍼슨의 듬직한 등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제프!"

"네?"

"오늘······ 컨디션 어때요?"

제퍼슨은 씩 웃었다.

"약속을 완벽하게 지킬 정도로 최고의 컨디션입니다."

그 말에 보안요원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제프. 첼시에 다시 돌아와 줘서."

"······저야말로.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 외전 25. 노장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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