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4. 노장 (3) >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빅클럽은 언젠가 부침을 겪기 마련이다.
여러 이유가 있다.
구단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코치진의 전술적 실수.
잘못된 이적 시장 정책과 유소년 체계의 몰락.
여러 이유로 명문팀은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
수많은 클럽이 그랬다.
지금은 부활한 맨유도 퍼거슨이 떠난 이후 부침을 겪었고, 지금 맨시티도 제퍼슨 리가 떠난 이후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가장 극과 극으로 갈린 클럽을 꼽으라면······.
"세계 최고의 팀에서 강등권으로 떨어진 슬픔을 어찌 알까."
이제 60살이 훌쩍 넘은 첼시 팬, 브라운은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집 거실에는 한때 흥했던 첼시의 역사가 걸려 있었다.
두 번의 유로피언 트레블, 3연속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리그 우승.
그때의 사진들이 액자로 걸려 있었다.
"그때만 해도 무서운 팀은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지."
브라운의 목소리가 한층 더 쓸쓸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박탈감과 고통을 느끼는 게 바로 지금이다.
"강등권이 유력하다니."
현재 리그 15라운드, 승점 19점으로 14위에서 16위를 오가는 성적.
한두 경기만 삐끗해도 17위 밑으로 강등권에 추락한다.
이 끔찍한 성적에 브라운은 몸서리쳤다.
그가 아직 한창이던 시절. 세계 최강의 첼시를 기억했던 그에게 지금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나마 최근 희망이 생겼다.
[돌아온 로만 구단주, 첼시 재인수 후 파격적 투자 약속!]
"로만이 왔다!"
호불호가 갈리는 구단주였지만, 지금 첼시팬들은 모두 열렬하게 환호하며 반겼다.
어쨌거나 첼시가 가장 찬란했던 시기 완벽하게 첼시를 이끌었던 훌륭한 구단주가 아닌가.
로만의 구단 복귀는 그때를 기억하던 올드팬들에게 그때의 향수를 느끼게 해 주고, 희망을 줬다.
무엇보다 연이은 구단의 행보는 고무적이었다.
[첼시, 팀의 레전드 감독 필마르크 선임]
[60세의 명장 필마르크, 첼시로 돌아오다.]
"필마르크 감독이 온다!"
"오! 신이시여!"
"세계 최고 명장이 온다!"
첼시의 젊은 친구들은 필마르크가 유명한 감독인 건 알지만, 올드팬들의 반응을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올드팬들은, 그러니까 2020년대 초반에 열렬한 팬이었던 이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가장 화려했던 시기를 이끌었던 감독과 구단주의 동반 컴백이라니!
브라운은 기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첼시의 다음 경기를 지켜봤다.
그러나.
[리그 16라운드, 스트라이커가 없는 첼시. 빈공으로 리즈 유나이티드와 0대 0 졸전]
"음!"
"필마르크하면 스트라이커인데."
"팀에 스트라이어카 없지."
"주전 스트라이커가 21살이라면 말 다 했지. 이번 시즌 4골 넣었나?"
"허······ 산티아고와 마크 우트, 올리비에 지루와 제퍼슨 리가 있던 첼시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감독 한 명이 바뀌었다고 한들 변화가 쉬운 게 아니다.
이미 강등권까지 추락할 위기에 빠진 팀이다.
선수진이 훌륭할 수가 없다. 그래도 유소년 아카데미 시스템은 훌륭하게 정착된 편이다.
대체로 현재 팀의 평균 연령은 20대 초중반이다.
유소년 선수들이 일찍 프로에 데뷔한 케이스다.
분명 잠재력은 충분하다. 그러니 어린 나이에 1부 리그에서 뛰는 게 아닌가.
그러나 어린 나이인 만큼, 아직은 모자란 점도 분명했다.
제아무리 필마르크라도, 기본적으로 기량이 잠재력만큼 향상하지 못한 선수론 할 수 있는 게 없다.
더구나 그의 전술 핵심인 '스트라이커'가 없다면 말이다.
[프리미어리그 겨울 이적시장 OPEN!]
[첼시, 스카우트 레이더망에 스트라이커만 5명!]
[도르트문트 포워드 레프 독, 첼시 제안 거절.]
[인터밀란 스트라이커 봉 아드롱 '첼시 빅클럽 아니야']
연이은 영입 실패.
필마르크가 원했던 스트라이커들은 모두 영입은 고사하고, 첼시는 쳐다보지도 못했다.
한때 '첼시가 부르면 와야지'라고 우스갯소리까지 했던 클럽의 명성이 추락한 증거였다.
"씁쓸하구먼."
브라운은 기쁨도 잠시, 옆집에 사는 또 다른 첼시팬 구스와 늘 한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기대감이 차츰 사라지고, 다시 패배감과 쓸쓸함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아침.
브라운은 늘 그랬듯이 인터넷 기사를 열었다가, 잠시 넋을 놓았다.
"······응?"
메인에 올라와 있는 제목에 브라운은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눈을 몇 번이고 비비고, 또 비벼 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이내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악!"
60의 노구가 우습게, 터져 나오는 목청을 힘껏 내지르며 밖으로 나온 브라운은.
"우아아아악!"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뛰쳐나온 옆집의 구스와 눈을 마주쳤다.
이내 둘은 동시에 소리쳤다.
"런던의 왕이 돌아온다!"
[제퍼슨 리, 첼시 6개월 단기 임대 이적 체결!]
***
"도대체 그 늙은이가 뭐라고······."
아스날의 잉글랜드 대형 유망주 '릭 돌프란'은 맘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릭 돌프란은 22살이지만, 이미 유망주 딱지를 벗어던진 대형 선수였다.
만일 그의 클럽이 아스날이 아니었다면, 팀 우승 커리어가 한두 개 있었다면 발롱도르를 차지했으리란 평가를 받는 완성형 미드필더였다.
어린 나이. 잘생긴 외모. 잉글랜드 프리미엄으로 천문학적인 몸값. 이미 국제대회에서 인정받은 실력. 언론의 찬사까지.
그는 매 경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었다.
3선에서 2선까지 고루 오가는 그야말로 완벽한 육각형 미드필더.
바로 릭 돌프란이었다.
그런 그의 심사가 영 좋지 못한 건, 지금 경기장의 모든 관심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한 선수에게 쏠린 점 때문이다.
"제퍼슨 리······."
그도 제퍼슨을 잘 알았다.
14살에 아카데미에서 축구할 때, 이미 그는 맨시티의 영웅이었다.
엄청난 기록을 쏟아 낸, 전 세대의 최고 선수.
"그래. 전 세대지. 지금은 은퇴를 앞둔 늙은 선수지."
릭 돌프란이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단순히 늙은 선수가 아니야. 릭, 만일 그랬다면 런던이 이렇게 난리가 나지 않았겠지."
릭 돌프란은 뒤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팀의 주장 윌리엄 살리바였다.
살리바는 현재 37세다. 그도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다. 18살 때 아스날로 와 무려 20년 가까이 아스날에서 뛰어온 아스날의 붉은 심장.
그의 등장에 아무리 거만한 릭 돌프란이어도 팔짱을 풀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겨우 2군에 이름을 올릴 때, 그는 이미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있었지. 고작 한 살 차인데 말이야."
"······."
"그거 알아? 프리미어리그 팀들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이유?"
"그야 여기가 최고니까요."
"최고로 만든 선수가 있지."
"네?"
"제퍼슨 리."
"네? 제퍼슨이요?"
릭 돌프란은 '또, 또 제퍼슨이야'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윌리엄 살리바는 진지한 얼굴로 필드에서 몸을 푸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당시 모든 프리미어리그 팀은, 제퍼슨을 막기 위해 수없이 연구하고 다양한 전술과 전략을 만들어 냈어. 누군가는 말하더라고. 그때가 프리미어리그가 다른 유럽리그보다 5년은 앞서가게 됐다고."
"그게 무슨······."
"더 놀라운 건 뭔 줄 알아? 정작 그래놓고 제퍼슨을 막은 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지."
"······."
살라바가 별안간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오늘은, 정말 막아 보겠어."
그의 눈동자가 열렬하게 타올랐다.
은퇴를 앞두고 조용히 팀을 이끌던 캡틴.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릭 돌프란은 살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살리바가 최근 저렇게까지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처음 봤다.
릭 돌프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제퍼슨에게 돌렸다.
그때였다.
"감독님?"
팀의 3년 차 감독이자, 명장으로 유명한 루이스 아구엘이 성큼성큼 필드를 걸어갔다.
1년 차에는 아스날의 챔피언스리그 4강을 기록하고, 2년 차에선 리그 준우승, 그리고 올해도 리그 2위를 기록 중인 명장이다.
거만한 릭 돌프란도, 그를 진짜 스승처럼 여기고 따랐다.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었다.
릭 돌프란은 그런 아구엘 감독에게 인정받기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 훌륭한 명장이지만, 칭찬에는 비교적 인색했다. 늘 자신에게 더 정진하고 노력하라는 채찍질을 하지 않나.
그런 루이스 아구엘이······ 성큼성큼 걸어간 목적지에는.
"제퍼슨 리, 당신은 제 영웅입니다."
그 누구보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청하는 아구엘 감독.
제퍼슨은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도대체······."
릭 돌프란은 복잡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
"어때?"
"뭐가?"
"우리 선수들."
"재능은 있어."
"그치? 내가 유소년 코치 시절부터 키운 애들이라니까?"
올리버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폈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6살이 많던가.
얼굴에 주름이 늘어난 게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다. 중후하게 늙은 배우 같달까? 운동도 꾸준히 하는지 몸도 탄탄하고.
신기하긴 하다. 저렇게 기쁜 얼굴로 선수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그런데 부족한 게 있어."
"부족한 거?"
"위닝 멘탈리티."
"아······."
"다들 얼굴에 패배의식이 보이더라고."
"후우. 어쩔 수 없지. 매 시즌 성적은 계속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팀을 이끌 리더도 없고."
올리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석코치로 승격한 그는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뭐, 내가 그 고민을 해결해 줘야지.
그러려고 내가 온 거 아니겠어?
"오늘부터 위닝 멘탈리티가 팀의 스피릿이 될 거야."
내 말에 올리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필마르크 감독이 날 불렀다.
"제프!"
"네, 감독님."
"오늘 전술은······ 알지?"
"네?"
"원톱에 제퍼슨 리다."
감독의 말에 난 그저 웃었다.
특별할 건 없다.
스트라이커 자리에 나.
완벽한 전술지시다.
***
필드 위에 올라온 순간.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스탬포드 브리지.
여기에 파란 유니폼을 입고 올라오는 건 대체 얼마 만인지······.
9번과 제퍼슨 리라고 적힌 유니폼을 받고 필드에 올라온 순간.
나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고, 누구는 함성을 내지르는 공간.
여기서 난 꿈을 이뤘다.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챔피언을 달성했으며 최고가 됐다.
런던의 첼시팬들은 내게 있어 최고의 팬들이었고, 그 생각은 맨시티와 지금 토론토에서 지내면서도 단 조금의 변화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때로는 포악하고,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과격하지만.
적어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비판할 수 없다.
삐이이익!
휘슬이 울리고, 시간이 흘러간다.
곁을 스쳐 가는 땀 냄새와 거친 호흡.
앳된 얼굴의 선수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삐걱거리며 뛰어간다.
그에 반해 아스날 선수들은 한결 여유롭고 자유롭다.
난 내 팔뚝에 찬 캡틴 완장을 바라봤다.
본래 팀의 주장이었던 선수는 내가 오자마자 나에게 양보했다.
"제프, 당신은 우리 모두의 영웅이었어요. 당신이 주장 완장을 차기 전, 팀은 당신을 내쳤죠. 이젠 제프, 당신이 이 완장을 차야 할 때입니다."
토론토에서도 잠깐 완장을 찬 적 있고, 미국 국가대표에서도 나는 캡틴이다.
캡틴이란 자리는 더없이 무거운 자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첼시의 이 완장은 더 무겁게 느껴질까.
어쩌면 난 첼시의 팬들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퍼슨의 저주' 같은 우스갯소리는 둘째 치고, 내가 맨시티로 떠난 이후 팬들이 느낀 고통과 박탈감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때문에, 나는 뛰어야 한다.
"제-프!"
아스라이 울리는 응원가에 몸을 던지며.
투욱, 툭!
잔디를 밟고, 내디디고, 뛰고.
터져나갈 것 같은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제-퍼-슨!"
나에게 향하는 공을 발끝으로 돌려 세우며.
쿵쿵, 짝!
경기장을 두들기는 아주 익숙한 리듬감에 몸을 맡기며.
탓!
"-----!"
"막으란 말이야! 막으라고!"
악을 내지르는 아스날 수비진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잡는다.
옷깃을 잡고, 팔꿈치로 찍고, 다리를 거는 그 모든 동작을 이겨내면서.
쿵쿵, 짝!
리듬과 박자를 온전히 느끼며.
투웃.
디딘 발을 굳세게 버티고, 강하게. 그리고 정확하고, 날카롭게!
뻐어어어엉!
굳이 골대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귓가를 찌르는 함성과 경기장을 진동시키는 압도적인 응원가.
"LEE Will, LEE Will Kill you!"
역시, 노래는 원조가 좋단 말이지.
< 외전 24. 노장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