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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254화 (254/258)

< 외전 23. 노장 (2) >

[첼시에 다시 가는 거야?]

산티아고의 전화에 나는 짧게 답변했다.

"그냥 페이크 뉴스야."

좀 당황스러웠다.

전혀 알지도 못한 내용으로 미국이 난리가 났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첼시 관계자, 비밀리에 제퍼슨 리 접촉.]

자극적인 뉴스다. 어쩐지, 여기저기서 기자들에게 전화가 오더라니······.

다 헛소문이다. 나는 신혼여행에 가 있었다. 첼시 관계자와 접촉한 적은 없다.

그러면 이 루머가 왜 나왔느냐.

"유진, 저희 유스팀에서 훈련한다면, 분명 큰 선수가 될 겁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첼시 관계자의 말에 난 시선을 돌렸다.

유진이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거실을 흘끔 바라봤다. 주근깨 있는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게 퍽 귀엽다.

아직 애다.

이제 잠깐만, 열세 살인가. 생일 지났으니까 열세 살 맞다. 하여튼 어린아이다. 자길 데리고 가고 싶다고, 프로팀에서 직접 왔으니 긴장할 만도 하겠지.

"왜, 넌 가고 싶어?"

"응? 아······ 잘 모르겠어."

유진이는 살짝 내 눈치를 봤다.

하는 짓은 영락없이 13살짜리 애지만, 덩치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이미 어머니가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컸고, 3~4년 후에는 아버지도 올려다 봐야 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형한테 더 배울 게 많은 거 같아."

"그래?"

"응. 형한테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 그거 첼시가면 배울 수 있을까?"

뭐, 전술적 역량이라든지, 전략이라든지 첼시에서 배우는 게 훨씬 좋으리라.

하나 열세 살의 나이.

꼭 그럴 필요는 없다. 토톤토 유스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더구나 내가 틈틈이 녀석을 봐주고 있으니까.

흠.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좀 한 수 가르쳐 줄까.

"그러면 뭐, 어디 오랜만에 한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확인 좀 해 볼까?"

***

"죄송합니다만, 거절할게요."

앨런 여사는 단호했다.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왔던 첼시 관계자들은 서로 난처한 눈빛을 교환했다.

팀이 여러모로 망가지고 있는 상황.

미래를 위해선 유스 정책이 성공해야 한다.

이제는 큰손으로 대형 스타를 데리고 올 수 없는 팀이 된 지 오래.

유소년 선수를 키워야 만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유진은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이미 미국에서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리는 잠재력.

동 나이 대와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피지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제퍼슨 리의 동생이다!'

아직도 첼시팬들은 제퍼슨을 잊지 못했다.

제퍼슨이 첼시를 떠난 지 무려 10년 가까이 지났다.

이쯤이면 잊힐 만도 하지만, 첼시의 올드팬들은 제퍼슨을 그리워했다.

비단 올드팬뿐이겠는가?

어린 시절 제퍼슨의 경기를 보고 울고 웃던 어린 팬들이 이제는 다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아직도 제퍼슨의 응원가 'LEE Will Kill You'를 부르며 그리워한다.

제퍼슨을 데리고 오는 건 불가능이다.

하면 그런 제퍼슨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제퍼슨과 똑 닮은 선수라면?

'데리고 와야 한다!'

'반드시!'

비장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한 관계자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여사님! 아시다시피 첼시는 영국의 명문 클럽입니다. 비록 최근 성적이 좋지 않지만, 수년 동안 만들어 온 첼시의 유소년 아카데미 정책은 유럽의 모든 클럽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유진이 교육받고 훈련한다면, 더 크게 성장하리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첼시가 과거보다 몰락했다고 하더라도, 유소년 체계가 무너진 건 아니다.

오히려 대형 스타들을 못 데리고 오는 팀이 된 이상, 유소년 시스템이 더 정밀하고 훌륭하게 발전될 수밖에 없다.

관계자들은 그 점을 되짚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시다시피, 유진이 런던으로 가면, 보호자도 가야 돼요. 우리는 갈 생각이 없어요."

"그······ 그건."

"방법을 찾으면 무언가 있겠죠. 하지만, 유진이도 아직 여기서 무언가를 더 배우고 싶어 해요."

"음!"

"아직 형한테 배울 게 많다고 말하더라구요."

앨런의 말에 관계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르치는 사람이 제퍼슨이라니.

그 말에 어찌 반박하겠는가.

제퍼슨에게 배울 수 있다면 지구 끝까지 쫓아갈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토론토를 보면 안다.

미국의 유소년 괴물들이 모두 토론토로 모이고 있단다.

비단 유소년 선수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대형 스타들, 심지어 유럽의 유망주들까지 토론토에 자기를 데려가라고 어필하고 있다.

스스로 주급을 깎겠다는 선수도 있다.

왜 그런가?

다 제퍼슨 리가 있어서 그렇다.

제퍼슨에게 배울 게 있으니, 첼시에 보내지 않겠다.

부모의 입장을 확인한 첼시 관계자는 입을 잘근 씹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그냥 갈 수는 없지.'

관계자는 한차례 호흡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제퍼슨 리는 천재죠. 하지만, 천재가 선수를 더 잘 가르치는 건 아닙니다."

"······?"

"세계적인 월드클래스 선수 출신 중에 세계적인 코치나 감독이 없는 게 그런 이유겠죠. 천재는 천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너무 쉬운 거라서 알려주는 건데, 정작 그걸 따라 하는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것이거든요."

그 말에 앨런여사는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 침묵하던 이성학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집밖 정원에서 들려오는 공 차는 소리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벌떡 일어났다.

"음, 날씨가 좋은데 잠깐 테라스에 나가 볼까요?"

"네?"

"자, 어서요."

관계자들은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테라스에 나가는 순간.

그들은 얼어붙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제프만큼 훌륭한 스승이 있을까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는 이성학의 목소리는, 관계자의 귓가에 들리지도 않았다.

관계자는 떨리는 동공으로 그저 정원을 넋 놓고 바라봤다.

휘르륵!

가볍게 공을 갖고 놀면서 고스트 스텝과 제퍼슨 턴, 그리고 백스텝까지 자유롭게 구사하는 유진.

시범을 보이면 보이는 대로 족족 따라하는 모습에 흐뭇해하는 제퍼슨.

그 모습에 관계자들은 그저 입을 떡 벌렸다.

'천재가······ 천재를 가르친다!'

***

"제퍼슨을 수비하는 건 불가능이다. 세월도 제퍼슨을 막지 못한다!"

제퍼슨이 세기의 결혼식을 치르고 난 지 3년이 지난 시점.

2038년, MLS에서 가장 유명한 격언이다.

2019년에 제퍼슨이 세상에 등장한 이후, 그를 막는 수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세월마저 그를 막을 수 없다고 한탄하는 MLS 팬들이 늘어났다.

"20대의 짱짱한 수비수들이 대체 왜 38살의 제퍼슨을 못 막는 건데!"

"아무리 MLS가 유럽리그보단 쪼금 못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38살짜리 선수가 3년째 득점왕을 차지하는 게 말이 되냐고!"

제퍼슨의 북미 복귀 때 열렬하게 환호했던 미국 축구팬들은 이내 자신들이 무언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제퍼슨의 북미 리턴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영웅이니까.

다만 토론토 FC 팬이 아닌 다른 구단의 팬들은 죽을 맛이었다.

"시원하게 욕이라도 박고 싶다고!"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에게 어떻게 욕을 해?"

"빌어먹을! MLS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모든 구단이 미친 듯이 싸우다가 결국엔 제퍼슨이 우승한 리그라더라!"

"맞는 말이긴 하네."

"지랄 맞게도 아주 정확한 말이란 말이지!"

제퍼슨을 막을 수비수도 없고, 남들에겐 야속한 세월도 제퍼슨을 감히 막지 못했다.

2038시즌 리그 38골, 컵 대회 포함 49골을 터뜨리며 제퍼슨은 북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사나이로 기록됐다.

아니, 시선을 전 세계로 돌려도 마찬가지다.

한 시즌에 50골 가까이 넣는 대형 스트라이커는 제퍼슨이 유일했다.

"도대체 스트라이커란 놈들이 말이지!"

"38살의 제퍼슨도 이기지 못하는 게 말이 돼?"

"정말 제프는 미친놈이 맞아."

아무리 MLS가 유럽리그보다 아직은 아래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유럽 유수의 코치와 감독들이 대거 수혈됐고, 전술도 발전했다.

그런데도 제퍼슨은 나이가 무색하게 리그를 말 그대로 씹어 먹고 있었다.

"이런 선수가 발롱도르를 못 타다니."

"그것도 참 웃긴 이야기지."

"유럽 리그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게 아니면 노미네이트도 안 된다는 건가?"

"아주 자기들이 세계 최고인 줄 아는군!"

한편으로는 이런 불만이 튀어나왔다.

제퍼슨은 토론토 이적 이후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유럽리그가 아니란 점 때문이리라.

당연히 미국팬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뛸 때 시즌 80골을 집어넣던 전성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지금 기량이 하락한 건 맞다.

그러나 38살에 50골씩 집어넣는 스트라이커는 전 세계에 제퍼슨이 유일하다.

한데도 발롱도르를 타지 못하다니?

"차라리 미국에서 상을 하나 만들자고!"

"프랑스에서 주는 발롱도르가 최고인 게 웃기지."

"피파 올해의 선수상! 발롱도르! 거기에 걸맞은 상을 미국에서 하나 만들자!"

"뭐가 좋을까?"

"당연히 '제퍼슨 리 상'이지!"

발롱도르 수상에 실패하자 이런 여론이 생겼다.

물론 처음에는 어느 정도 '홧김에 나온' 발언이었지만, 의외로 이 여론은 강력한 태풍처럼 미국을 휘몰아쳤다.

"그거 괜찮은데?"

"골키퍼 쪽엔 야신상도 있잖아."

"그러면 세계 최고 스트라이커에게 주는 상으로 제퍼슨 리 상은 어떨까?"

"오!"

이 여론이 탄력받은 건, 제퍼슨의 오랜 후원기업들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후원하는 시상식.

훗날 세계 최고 스트라이커에게만 주어지고,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더불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제퍼슨 리' 상의 출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진지한 얘기가 논의될 무렵.

그러니까 2038시즌이 끝나고, 제퍼슨이 곧 은퇴할 거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때.

또 한 번 루머가 터졌다.

[제퍼슨 리, 첼시 이적?]

정말 뜬금없는 뉴스 한 줄이었다.

"이게 뭔 개소리야?"

"내년에 은퇴하네, 마네 얘기가 돌고 있는데 갑자기 첼시로 돌아간다고?"

"그 엿 같은 배신자 클럽에 말이야?"

당연히 신빙성 있는 루머는 아니었다.

이미 축구계 관계자들은 2039년에 제퍼슨이 마지막 시즌을 치르고 은퇴할 거란 얘기가 돌고 있는 상황.

갑자기 첼시 이적이 말이나 되는가?

"다들 진정하라고. 3년 전에 제프의 동생인 유진을 데리고 가려고 왔었잖아?"

"이제 유진이 16살, 좀 있으면 생일이니까 17살이네. 하여튼 유진을 영입하려는 거겠지."

"맞아. 또 루머가 잘못된 걸 거야."

3년 전 한 번 미국 축구계를 떠들썩했던 루머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그와 같은 헤프닝이라 여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파라치의 사진 한 장이 튀어나오면서, 다시 한번 미국, 아니 전 세계가 뜨거워졌다.

[Photo] 첼시 전 구단주 로만, 전 감독 필마르크, 현 첼시 코치 션 올리버 토론토의 제퍼슨 저택 방문.

***

"제가 내년에 은퇴하는 건 아시죠?"

"아주 잘 알지."

필마르크 감독은 여전히 능글거렸다.

12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주름이 몇 개 늘어난 얼굴이지만 여전히 강인해 보였다.

하긴, 현재 세계 최고 감독 중 하나니까.

다만 건강 문제 때문에 조금 쉰 지 오래일 뿐이다.

그런 그가, 그러니까 첼시의 전 구단주 로만과 지금 코치를 하는 올리버와 함께 내 저택을 방문한 건,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로만 구단주님이 다시 첼시를 인수하고, 필마르크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는다. 이거죠?"

"응. 맞아. 나는 수석코치로 승격하고."

"안 궁금해, 올리버."

"흠."

올리버는 생글거리며 뒤로 빠졌다.

아무튼, 일은 이렇다. 로만 구단주가 다시 첼시로 복귀하고, 필마르크 감독도 지휘봉을 잡는다.

갑자기 왜냐면······.

"시즌이 절반이 지난 지금, 첼시는 리그 16위지. 강등권 바로 위야."

"······."

"나는 더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클럽이 무너지는 꼴을 볼 수가 없어. 사업에 손을 뗀지는 오래지만, 첼시는 포기할 수 없네."

로만 구단주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하지. 6개월만 임대로 첼시를 도와주게. 필마르크 감독도 자넬 원하고 있어."

"전 이제 노장입니다. 38살이죠. 거친 잉글랜드 리그에서 옛날만큼은 못합니다."

"······진짜 그리 생각해?"

필마르크 감독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음.

그래도 옛날만큼은 못할 거다. 나도 이제 체력이 슬슬 부치는 걸 체감하고 있으니까.

괜히 내년에 은퇴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다.

"제프. 한번 와서 제퍼슨의 저주 좀 풀어 주라."

"제퍼슨의 저주?"

"그래 인마. 네가 없으면 우승 못 할 거라고 농담처럼 말한 거. 그거 지금까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거 알지?"

"음!"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미안해지긴 한하는데······.

내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올리버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결연한 얼굴이었다.

"부탁할게, 제프. 기억나? 3년 전에, 너 결혼할 때. 내 부탁 하나 나중에 들어주라고."

그랬었지.

연애 코칭 해 준 거 고맙다고,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했었지.

"사실 그런 건 상관없어, 제프. 우리가 가장 찬란했던 시절. 그때를, 그때의 감정을, 팬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올리버의 목소리에는 많은 회한이 느껴졌다.

감독도, 구단주도, 나도, 그리고 동료들도 모두 떠난 첼시.

한때 가장 찬란했던 첼시가 무너져가는 걸 보면서도,

그 안에서 꿋꿋이 지켰던 선수가 바로 션 올리버였다.

그 누구보다 게으르고, 바람기 많고, 엉망이던 녀석이.

홀로 외롭게 첼시를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지금 저 녀석은 간절했다.

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렸다.

노심초사하는 필마르크 감독과 로만 구단주.

난 한숨을 토해내듯,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음. 제가 전에 살던 런던 저택은 어떻게 됐나요?"

로만 구단주는 환하게 웃었다.

"당장 청소까지 확실히 해 놓지!"

< 외전 23. 노장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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