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2. 노장 (1) >
"딸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세계 최고 여자 축구선수' 로렌 모건의 아버지, 토마스 모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혼하려구요."
어느 날 딸에게 온 연락. 하늘이 샛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애지중지하는 딸아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잘 알았다.
별다른 말도 없었고, 딱히 티를 내지 않아서 그냥 잘 만나고 있구나라고 여겼다.
한데 뜬금없이 결혼이라니.
지금 딸, 로렌 모건은 23살이다. 한창 축구선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는 때다.
이미 스무 살 때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를 번갈아 수상할 정도다.
여자축구계에선 최고의 재능이란 찬사가 뒤따른다.
"너무 이른 나이긴 한데."
적정 결혼 연령이 늦어지는 세상이긴 하지만······
하물며 로렌 모건은 축구선수다.
23살의 창창한 선수. 남자 선수와는 달리, 여자 선수는 결혼이 꼭 선수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아니면 다행이지."
특히나 아이를 가진다면 더 그렇다.
괜히 여자축구계에서 경력단절이 많은 게 아니다.
출산 후에 복귀가 문제다. 많은 여성이 산후 우울증을 겪는다. 매경기 컨디션이 중요한 운동선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겠는가. 물론 아이를 선수 생활 마칠 때쯤에 가진다면 상관이 없지만······.
"빌어먹을! 사내새끼가 34살, 아니 이제 곧 35살이라고?"
가장 많이 화가 나는 건 바로 남편 될 사람의 나이였다.
서른다섯이라니!
만일 결혼하고, 둘이 아이를 가지기로 합의하게 된다면.
비교적 빨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자쪽 나이가 지금 35살이라면 말이다.
"이 도둑놈 새끼! 오기만 해봐라! 멱살을 쥐어뜯어 버리겠다!"
"아휴, 왜 그래요."
부인이 눈을 흘기는데도 토마스 모건은 연신 씩씩 분노를 표출했다.
"열두 살이라고! 열두 살!"
"그 정도 나이 차이는 흔하잖아요? 당장 당신하고 나도 9살 차인데?"
미국에서 두 자리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결혼은 흔했다.
유명한 셀럽 중엔 스무 살 넘게 차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주위에도 열 살 정도 차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그건 남 이야기할 때나 태평한 소리지! 어! 내 딸이라고!"
내로남불이라지만, 뭐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더구나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 토마스 입장에서 오죽하랴.
토마스의 말에 음식을 준비하던 부인도 살짝 미간을 좁혔다.
"평소엔 쌀쌀맞게 굴더니. 꼭 이럴 때만 팔불출이 되시네요."
"흠흠! 무슨 소리야. 원래 크면 다 그렇지. 어릴 땐 애 데리고 런던까지 축구 보러 갔었잖아?"
"네네. 그래서 그 험한 스포츠에 빠지게 했죠."
"끄응."
부인의 날선 말투에 토마스 모건은 침음성을 뱉었다.
자신이 축구를 좋아하다 보니, 딸아이를 자주 데리고 경기장에 갔었다.
그게 딸이 축구선수가 된 계기가 됐다. 자신이야 좋지만, 부인은 애당초 스포츠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토마스는 팔짱을 낀 채 현관문을 노려봤다.
"어디 한번 들어와 봐라."
의자에 앉은 그의 옆에는 골프채가 있었다. 부인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띵동!
"어머, 왔나 보네!"
초인종 소리에 부인이 반색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토마스도 올 게 왔다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한 손에는 골프채를 꽉 쥐고.
"어서 와요!"
"엄마!"
복도를 한 바퀴 돌고, 부인과 그 얼굴도 궁금하지 않은 사내 녀석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질 때.
잔뜩 굳은 표정이었던 토마스는, 또 다른 의미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복도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덩치.
딸아이를 빼앗아 간 그 도둑놈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 왔다. 잔뜩 성이 났던 모건의 동공이 남자를 훑는 순간.
"너무 늦게 인사드리네요. 제퍼슨 리입니다."
토마스 모건은 들고 있던 골프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양손으로 송구하다는 듯이 제퍼슨의 손을 꽉 잡았다.
"Oh, My Captain······!"
***
"잘된 거 같지?"
"합격 목걸이라도 걸어 드릴까요?"
"아니, 오히려 너무 잘 풀려서 부담스러울 정도야"
내 엄살에 로렌 모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미국에 오랜만에 오시는 거죠?"
"자주 오긴 했는데······."
"시즌 휴식기 때 잠깐 와서 주위는 잘 안 돌아다녔잖아요."
로렌의 말에 난 쓰게 웃었다.
파파라치가 워낙 극성이다 보니, 휴식기에 미국에 와도 딱히 돌아다니질 않았다.
그냥 집에서 쌍둥이들이랑 놀면서 쉬었다.
"이게 지금 밖에서 보는 제퍼슨이에요."
"조금 부담스럽긴 해."
"즐겨요! 제프! 그 명성 덕택에 우리 아빠가 만나자마자 합격이라고 표정으로 보여 줬잖아요?"
로렌은 기분이 좋은지 차에 타면서도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참 신기하다.
가만히 있으면 냉한 눈매 때문인지, 뭔가 분위기가 묘해서 말 걸기도 힘든 아우라를 풍기는데,
웃고 있으면 그게 참 강아지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나도 속이 후련하다.
가장 걱정했던 산을 넘었으니까.
음, 오히려 너무 쉽게 말이지.
"솔직히 아빠한테 좀 실망했다니까요?"
"왜?"
"아니, 무슨 사인 축구공 하나 받았다고 헤벌려서, 상견례 날짜까지 잡아요?"
"하하하하."
회심의 선물을 준비하긴 했다.
로렌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젠 장인어른이 될 토마스는 축구팬이다.
굳이 로렌이 알려 주지 않아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팬이 아니었다면, 내가 토론토 시절 원정경기까지 로렌을 데리고 응원을 왔겠는가?
로렌도 말했다. 원래 자신은 축구에 관심 별로 없었다고. 아버지가 축구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점점 관심이 생겼다고.
"물론 정확히는 제프한테 관심이 생긴 거죠. 그때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지금은?"
"아휴, 정말, 영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제프도 은근 영악해요."
"영악해야 미녀를 잡지."
로렌은 닭살돋는다는 듯 눈을 흘기면서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울 아빠 축구 좋아하는 거 알고 그런 선물 준비하고 말이야."
"어떻게든 노총각 신세 벗어 보려고 머리 쥐어 짜낸 건데. 알잖아. 축구선수 제프가 뭘 도전하면 이 악물고 달려드는 거?"
로렌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말은 저렇게 해도 어찌 됐든 좋은 거다.
내가 토마스에게 전해 준 회심의 선물은 바로 사인볼이다.
이게 왜 회심의 선물이라고?
그야 당연히 평범한 사인볼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세상에! 202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 넣었던 공이라뇨! 나도 탐나는데!"
로렌이 선물을 보고 화들짝 놀라지 않았던가.
사실 나도 이걸 갖고 오기에 망설임이 컸다.
누군가의 조언이 없었으면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아버지가 꼭 그걸 가져가야겠냐면서 슬퍼하셨는데 말이지.
아무튼. 선물은 성공적이었다.
토마스 모건은 공을 보고 그 자리에서 감격에 젖어 눈물까지 흘렸다. 이후로는 뭐 만사 OK였고.
나는 슬쩍 휴대폰을 봤다.
[어때? 내가 말한 거 준비하니까 제대로지?]
하, 이 자식.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이 있단 말이야.
난 시동을 걸기 전에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올리버. 미국에 오면 밥은 내가 사지.]
[됐어. 밥은 됐고, 나중에 내 부탁이나 하나 들어줘]
부탁이라.
뭐, 3년 동안 연애 코칭 해 준 녀석이니까.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말하라고 친구.]
[그거 알아?]
[뭘?]
[네가 그렇게 살갑게 친구라고 부르는 건 처음이야. 사실 부탁하면 '꺼져 올리버'라고 할 줄 알았거든.]
음.
뭔가 문자에서 슬픔이 느껴지는데.
얘도 이제 마흔 줄 넘었나?
하긴 그쯤 되면 오히려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지.
***
제퍼슨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물론 처음부터 크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금은 평범하게, 그런 걸 원했던 제퍼슨이었지만.
"어차피 파파라치하고 기자들이 미친 듯이 몰립니다. 숨기려고 해도 못 숨겨요. 그냥 이렇게 된 거 아주 성대하게, 제대로 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퍼슨도 얼떨떨했다.
결혼 루머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결혼식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퍼슨의 결혼.
심지어 상대가 12살 연하의 또 다른 세계 최고의 선수, 로렌 모건이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에서도 난리가 났다.
역대 단 한 번도 없었던 '발롱도르 커플'의 탄생이라니.
모든 관심과 이목이 쏠렸다.
파파라치와 기자들이 토론토에 진을 치고 앉았다.
토론토뿐이면 다행이다.
제퍼슨의 가족이 있는 미네소타도 북미 전역에서 기자들이 몰려왔다.
이렇게 된 이상 조촐한 결혼식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제대로 해 보자는 게 주위 의견이었다.
제퍼슨은 마음먹고 결혼식을 준비했다.
하나 실제 결혼식도 예상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유럽에 흩어져 있던 제퍼슨의 전 동료들도 곧장 토론토로 날아왔다.
"오늘 여기 도시에 무슨 축제라도 열리냐?"
션 올리버가 결혼식장에 도착하곤 혀를 내둘렀다.
올리버뿐만 아니라, 이젠 은퇴한 카이 하베르츠, 마크 우트, 풀리시치도 약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음. 여기가 발롱도르 시상식보다 더 축구 레전드들이 많은 거 같은데?"
마크 우트가 감탄을 터뜨렸다.
축구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모두 왔다.
발롱도르 시상식 저리 가라 할 정도다.
과거 수많은 레전드 선수부터, 현재 축구계의 핵심 선수들까지.
뿐만 아니라 제퍼슨이 광고를 통해 알게 된 미국 내 스포츠 스타들도 모였다.
부모님의 인맥 때문에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다.
그뿐만 아니다.
최근 제퍼슨의 전기 영화 제작이 확정되고, 영화에 출연하게 될 배우를 포함한 할리우드의 유명한 이들이 가득했다.
"허어? 저 양반도 왔네?"
풀리시치의 말에 산티아고도 시선을 돌리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트, 하베르츠, 션 올리버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후해 보이지만, 확실히 신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얼굴이었다. 오로지 풀리시치와 산티아고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누군데?"
"다음 유력한 대통령 후보."
"응?"
"뭐라고?"
"공화당 후보야. 어? 저 사람은 민주당 후보로 유력한 양반 아닌가?"
"······."
카이 하베르츠와 션 올리버는 입을 다물었다.
같이 훈련장에서 뒹굴던 녀석이, 무언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묘한 감상을 느끼면서.
"이젠 뭐라 말도 안 나오는데. 내가 이상한 거냐?"
마크 우트의 넋두리에 하베르츠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프란 놈이 이상한 거야. 결혼식에 저런 사람들이 하객으로 오는 게······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얘기하던 하베르츠는 자신을 쳐다보는 우트의 눈빛에 당황했다.
약간 눈물이 살짝 맺혀 있는 눈동자.
마흔 줄이 넘어서 애까지 있는 놈이 그러는 게 참 부담스러웠다.
"왜 그래?"
"드디어, 15년 만에 인정했군."
"뭘?"
"내가 이상한 놈이 아니라 제프가 이상한 놈이란 걸 말이야."
"······."
하베르츠는 침묵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나올 말을 겨우 목 뒤로 밀어내면서.
'나이 처먹고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야.'
하베르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상한 놈.
그냥 또라이들이 많았던 첼시였다.
"재밌었지."
하베르츠의 중얼거림에 우트가 씩 웃었다.
"그래. 말은 않았지만, 너도 재밌어했잖아."
하베르츠는 고갤 끄덕였다.
맞다.
오로지 직업적으로만 대했던 축구.
그 축구를 재밌게 느끼게 해 줬던 시절.
하베르츠는 하객으로 참석한 전 동료들을 쭉 훑어보고, 이내 하객들과 인사하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저 녀석은 언제 은퇴하려나."
이제는 은퇴한 축구팬으로서.
필드에서 제퍼슨을 오래 보고 싶단 생각이 불쑥 든 하베르츠는, 제퍼슨의 경기를 보기 위해 잠시 토론토에서 살까 고민했다.
하나 그 고민은 이내 깔끔히 해결됐다.+
결혼식이 끝나고, 한 가지 루머가 터져 나왔으니까.
[첼시 관계자, 제퍼슨 리 비밀리에 접촉!]
< 외전 22. 노장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