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1. 제퍼슨 연대기 (3) >
흔들리는 발롱도르 트로피.
그제야 기억이 났다.
토론토 FC에서 뛰던 시절.
그러니까 12년 전이다.
경기가 끝나고 기다리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줄 때.
유난히 인상 깊던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경기장을 찾았던 어린 꼬마.
어떻게든 사인받으려고 까치발을 들면서 공을 들어 보이던 아이가 귀여워 말을 걸었다.
아이는 당시 팀의 스타였던 내 앞에서도 당차게 포부를 밝혔다.
'리! 나는 축구 선수가 될 거예요!'
단순한 선수가 아니다. 여자 발롱도르를 타는 대단한 선수가 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가 지금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가 있다.
내가 목표를 세운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새로운 육체로 살게 되면서 아직 목표를 확실히 정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최고가 되겠단 생각, 최고의 무대, 별들의 무대에서 뛰고 싶단 생각만 했었다.
한데 로렌 모건, 그러니까 그때의 꼬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여자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겠다고.
얼마나 멋진 꿈인가.
아직 막연히 최고가 되겠다고만 생각했고, 이학현으로 살던 시절에도 꿈도 꾸지 못했던 발롱도르.
그때 이 꼬마, 로렌 모건과 남자 발롱도르, 여자 발롱도르를 타서 시상식에서 만나자고 약속할 때야.
나는 제대로 된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12년 만에 약속 지켰죠?"
로렌 모건은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생글생글 웃었다.
약간 도도해 보이던 눈매에서 과거 그 귀여운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맞다. 그때 그 아이.
나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워낙 당황스럽기도 했고, 그때 팬에게 했던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줄이야.
내가 반색하며 로렌을 쳐다보자, 풀리시치와 산티아고는 은근슬쩍 눈치를 보더니 뒤로 한 발짝 빠졌다.
"크흠흠."
"제프, 우리 먼저 갈게. 아, 파티는 취소하기로 했어."
"뭐? 무슨 소리야?"
"축하파티는 나중에 하자고."
산티 녀석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풀리시치와 함께 퇴장했다.
아이고.
이것들이 정말······.
"정말······ 축구선수가 됐군요."
"그럼요, 제프! 당신이 토론토를 떠나고 첼시로 갔을 때.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아하하······."
"아빠를 졸라서 런던으로 경기를 보러간 적도 몇 번 있어요."
"아, 그래요?"
"아쉽게 사인은 못 받았지만······. 아무튼 제프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제 목표는 이거였거든요."
내 시선이 발롱도르 트로피로 향했다.
"멋지네요. 그 목표를 이뤄 내다니."
"아, 이게 목표는 아니었어요."
"네?"
"이건 단순히 약속이었죠. 제가 이 트로피를 타 내야, 제프를 당당히 만날 수 있으니까. 팬으로서 제프를 만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건 다 이 약속을 지켜서겠죠?"
로렌 모건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사파이어를 박아 놓은 듯한 눈빛에 순간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음. 파티가 취소돼서 말이죠. 혹시 배가 고프시면······."
"시상식 도중에 이것저것 집어 먹어서요."
아하.
완곡한 거절인가.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싶기도 했고, 그간 어떻게 선수 생활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뭐, 팬과 선수의 입장이었으니까.
"배는 별로 안 고프고, 술 한잔은 괜찮을 거 같아요."
······팬과 선수의 입장은 이제 바뀔지도 모르겠다.
***
2031년.
첼시는 5년 동안 부침에 시달렸다.
모든 대회에서 단 한 번도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
제퍼슨의 이적 이후.
2029-30시즌까진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은 사수했다.
2030-31시즌에는 끝내 유로파리그 진출권만 따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2031-32시즌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첼시는 리그 12위에 머물러 있었다.
2020년 초반만 해도 도저히 막을 팀이 없을 것 같던 런던의 블루스들. 사실상 리그 2위가 우승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은 우승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팀이었다.
하나 그런 팀이 이제는 과거 리버풀과 맨유과 몰락했던 것처럼 무너졌다.
제퍼슨의 대우와 방출 실망한 선수들이 떠났고, 제퍼슨만 보고 첼시로 왔던 유망주들도 속속 이적했다.
첼시는 어느새 과거의 향수만 그리워하는 과거의 명문이 됐다.
그래도 첼시가 챔피언스리그 진출과 유로파리그 진출에 계속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인도인 구단주가 그만두고(사실상 쫓겨나고) 새로 온 구단주는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사람이었다는 점.
전임 인도인 구단주의 잘못된 행동은 팀을 망쳤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그렇게 주장했던 주급 체계 정상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
덕택에 현재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도 첼시는 그럭저럭 괜찮은 시즌을 보내왔었다.
그런 팀이 이번 시즌 갑자기 무너진 이유로 한 선수를 꼽았다.
"션 올리버가 은퇴했잖아?"
바로 첼시 캡틴, 션 올리버의 은퇴였다.
션 올리버가 첼시로 왔을 때를 생각하면, 참 웃긴 이야기다.
첼시팬들에겐 션 올리버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선수였다.
캉테가 필마르크를 따라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빈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잉글랜드 핵심 미드필더로 성장한 그는 가장 뛰어난 잉글랜드 국적의 홀딩형 미드필더였다.
다른 동료들이 다 첼시를 떠나도 그만큼은 끝까지 첼시를 지켰다.
모든 선수가 팀을 떠날 때.
유일하게 팀을 지킨 선수.
팬들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올리버하고 제퍼슨, 산티아고, 풀리시치, 하베르츠. 모두 있었을 땐 우린 누구도 두렵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올리버가 있어서 다행이야."
팬들에게 올리버는 일종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수였다.
첼시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
불과 4년 정도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그 동안 첼시는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팀이었다.
그때 영광을 함께했던 션 올리버.
보는 것만으로도 팬들은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다.
아무튼, 션 올리버는 나이로 인해 더 는 1부에서 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은퇴했다.
이로 인해 첼시가 흔들린 것이다.
다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곧 발표됐다.
[션 올리버, 지도자 수업 시작. 첼시 유소년 코치부터.]
션 올리버는 은퇴 후에도 축구 생활을 이어 가기로 했고, 첼시를 떠나지 않았다.
팬들은 그가 만들어 갈 미래의 첼시를 상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전 동료였고, 지금도 자주 연락하는 선수.
산티아고부터 말이다.
"뭐? 제프가 연애한다고?"
"아직 확정은 아닌데, 뭐 뻔하지. 파티 마다하고 같이 술을 마시러 갔다니까?"
얘기를 들은 션 올리버는 자신만의 직감이 발동하는 걸 느꼈다.
"전문가로선 말인데, 이건 확실해!"
"전문가······ 그치, 이건 네 전문분야지."
산티아고가 다소 맥 빠진 얼굴로 말했지만, 션 올리버는 개의치 않았다.
"제프에게 연락해야겠어."
"왜?"
"이 자식, 축구에서는 세계 최고지만, 연애는 영 아닐 거야. 이 분야에선 세계 최고는 나라고!"
"······굳이 왜 그런대서 자부심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맞는 말 같긴 해."
산티아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축구 인생을 바꿔 준 게 제프였지. 이제야 은혜에 보답하는군!"
"굳이?"
산티아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퍼슨이 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말라고 산티. 제프도 아닌 척하면서 좋아할 거야. 서로 장점이 있잖아? 이제 내가 그 장점을 살려 제프를 도와줄 때야!"
"음."
산티아고는 제퍼슨을 찾아간 올리버의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제퍼슨이 잔뜩 경멸하는 표정으로 '꺼져, 올리버'라고 말하리라.
제퍼슨은 똑똑한 친구다. 연애고, 뭐든 간에 자신이 알아서 깔끔하게 다 처리한다.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는 가끔 제퍼슨이 동갑내기 친구로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은 훨씬 더 산 인생 선배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인지, 매번 발롱도르를 휩쓰는 제퍼슨에게 질투심 따위는 아예 들지 않는 것이리라.
그는 흘깃 혼자 잔뜩 신나서 중얼거리는 션 올리버를 봤다.
'참. 누가 더 애 같은지 모르겠군.'
아무튼, 산티아고는 올리버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그저 올리버의 나잇값을 못 하는 오지랖으로 생각하고, 잊었다.
산티아고가 이날의 대화를 떠올린 건, 3년이 지나서 미국 리그로 복귀를 할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헤이, 산티아고. 곧 제프가 아주 행복한 소식을 전해 줄 거야.
첼시의 수석코치가 된 션 올리버로부터의 연락.
그 연락을 받은 산티아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행복한 소식?"
듣기로는 맨시티와 계약 기간이 끝나고,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곰곰이 떠올렸지만, 행복한 소식으로 짐작되는 건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퍼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산티아고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올리버 이 자식, 진짜 이쪽 분야에선 세계 최고잖아?"
그는 신기하다는 눈동자로 그에게 날아온 새하얀 편지봉투를 바라봤다.
제퍼슨의 청첩장이었다.
***
2035년. 나날이 발전하던 미국 프로축구리그가 일대 격변을 맞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맙소사, 제프. 당신을, 16년 만에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건······이건 정말 꿈만 같군요."
MLS의 BIG4로 불리는 팀 중 하나.
클럽월드컵에서 최고 성적으로 준우승을 달성한 적 있던 토론토 FC의 구단주가 직접 공항까지 나오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공항에 몰린 기자들과 인파들은 구단주의 공항 방문에 놀라지 않았다.
토론토라는 거대 구단의 구단주.
그가 직접 두 발로 마중을 나오게 만든 선수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었으니까.
"16년 만이라. 정말 오래됐네요."
주름이 가득한 구단주의 손을 꽉 쥐는 두꺼운 손.
구단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악수한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토론토로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캡틴!"
제퍼슨은 구단주의 손을 꽉 잡으며 웃었다.
"여기가 제 친정인데요."
제퍼슨 리.
맨체스터시티와 계약 종료 후, 자유계약으로 토론토 FC 이적.
***
제퍼슨 리가 34살이 될 때, 맨시티는 당연히 재계약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젠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휴식기를 가지기 위해 축구계를 잠시 떠나고, 같이했던 대다수의 월드클래스 동료들도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한 시점.
제퍼슨은 맨시티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맨시티도 그런 제퍼슨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했다.
누구 말인데 감히 토를 달겠는가.
10년 가까이 맨시티에게 매 시즌 우승컵을 안겨 준 선수.
맨시티란 팀을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보다 더 위에 올린 선수가 아닌가.
제퍼슨와의 이별은 무척이나 슬프고 아쉬우나, 이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였다.
제퍼슨이 계약 종료 후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이적 시장은 들썩였다.
대표적으로 세 개의 클럽이었다.
"이번에는 제발!"
"지구상 가장 거대한 클럽이란 명성은 우리 거였단 말이다!"
"돈? 돈이라면 다 주지!"
"FFP룰? 좆 까라고 해! 까짓것 징계받고 말아! 제퍼슨을 사 와!"
무려 16년.
제퍼슨에 대한 짝사랑을 잊지 않던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PSG가 뛰어든 것이다.
그들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지금 제퍼슨을 놓쳐서 다른 구단에게 뺏긴다면, 또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고.
그러자 일각에선 이런 반응이 튀어나왔다.
"에이, 제퍼슨도 이제 34살이잖아요? 기량이 하락했죠."
"그 괴물 같은 피지컬이 약해졌어요. 이건 기록으로도 알려주잖아요?"
"괜히 맨시티가 착해서 자유계약으로 풀어 줬겠습니까?"
"아무리 연봉이 싸졌다고 해도, 그 돈이면 월드클래스 두 명은 더 영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대체로 제퍼슨의 전성기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신세대에게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제퍼슨 포비아'를 경험했던 축구인들은 고함을 내질렀다.
"뭐라고? 넌 정말 축구 보는 눈이 없군! 우리 구단에 있을 필요가 없어!"
"한심한 자식!"
"34살이라고? 오! 이런! 적어도 6년은 더 뛸 수 있겠는걸?"
"약해진 게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고?"
"암. 약해졌지! 한 시즌 동안 평균 스무 골을 덜 넣고 있는데."
"그렇지. 시즌 평균 70골 넣다가 50골 넣고 있는 거면 기량 하락한 거지? 그치?"
"자. 지금 시즌 50골, 아니 40골, 아니 30골이라도 넣는 공격수가 세계에 몇 명이나 있지?"
그 말에 부정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34살이란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제퍼슨이다.
그렇게 제퍼슨을 향한 빅클럽들의 마지막 구애가 시작됐지만,
제퍼슨의 선택은 또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제퍼슨 리, 연봉 절반 삭감 후 친정팀, 토론토FC로 복귀 확정.]
[북미로 귀환한 캡틴 아메리카!]
[MLS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적!]
[토론토 FC '9번은 영구결번. 제퍼슨만이 가질 수 있다.']
[MLS팬 일동, 제퍼슨 리의 미국 복귀에 환호. '영웅이 조국에 온다!']
미국리그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한들.
34살의 선수에게 맨시티에서 받던 천문학적인 연봉을 지급하는 건 불가능이다.
한데 제퍼슨은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PSG의 엄청난 조건에도 불구하고 친정팀 복귀를 선택했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일각에서는 거액을 마다하고 친정팀에 복귀하는 의리에 찬양하기도 했다.
물론 친정팀에 대한 의리가 어느 정도 이유가 되긴 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결혼 하신다구요? 로런 양도 토론토 우먼스에서 뛰고 있으니. 오, 이런! 발롱도르 커플을 여기 토론토에서 보겠군요!"
제퍼슨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 외전 21. 제퍼슨 연대기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