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9. 제퍼슨 연대기 (1) >
지독한 경기였다.
PSG에겐 그랬다.
음바페가 동점골을 신고하고, 직후 5분 동안은 PSG가 우승할 수 있단 낙관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PSG는 이어진 제퍼슨의 해트트릭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더 지독하다고 느낀 건 단순히 해트트릭이 아니다.
제퍼슨은 해트트릭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힘을 필드에 쏟아부었다.
미친 듯이 필드를 휘젓는 제퍼슨 리.
훗날 골키퍼로서 발롱도르 2위만 4번을 한 돈나룸마가 회고하길.
'인생 최악의 90분'이 바로 지금이었다.
[제퍼슨 리! 아크로바틱한 트래핑입니다! 붕 떠서 가슴으로 공을 잡고, 그대로 띄운 채 선수를 제치고 들어갑니다! 오른쪽으로 빠진 케빈 데 브라이너! 제퍼슨의 패스가 향합니다!]
[돈나룸마 골키퍼! 허망한 얼굴로 주저앉습니다! 맨시티! 4번째 득점을 터뜨립니다!]
프랑스 리그의 최강자.
31라운드에 조기 우승을 결정지을 만큼 압도적인 팀.
현재 챔피언스리그에서 전승으로 결승까지 올라왔다. 구단 역사상 최강의 라인업이라 평가받는 팀이 기둥이 무너진 집처럼 폭삭 내려앉았다.
전반전이 끝나고 PSG팬들은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라도 보여야 이겨 보자, 힘내 보자고 응원을 하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차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풀타임을 뛸 수 없는 네이마르가 후반전에 교체됐고, 대신 후보 수비수가 들어왔다. 당연히 파리 관중들은 기함했다.
"미친놈!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거야?"
"3점으로 밀리고 있는데 공격수를 빼고 수비수를 넣어?"
"투헬 OUT! 꺼져라!"
물론 투헬로서도 억울한 일이었다.
어차피 네이마르를 뺀다고 해도, 공격 자원으로 교체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경기를 뒤집어 줄 수 있는 선수가 벤치에 없다.
이미 엘링 홀란드와 음바페 모두 선발로 내보낸 상황 아닌가.
이 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둘에게 믿음을 주려면, 더는 실점을 해선 안 된다.
실점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물론 수비를 늘리는 게 꼭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래도 수비라인에서 수적인 우세를 차지하면 분명 효과가 있다.
······라고 투헬 감독은 3분 전까지 생각했었다.
[제퍼슨 리를 무려 세 명의 선수가 둘러쌉니다!]
[하지만 제퍼슨 리는 영리하고, 또 대단한 선수죠. 신들린 탈압박 능력으로 벗어나, 오히려 파리의 수비진을 농락하고 있어요.]
[제퍼슨에게 선수가 몰린 사이, 공간이 났습니다! 라힘 스털링! 제퍼슨의 패스를 이어받아 득점에 성공합니다!]
오히려 역효과였다.
투헬이 더 이상의 실점을 안 된다고 역설했던 것 때문일까.
제퍼슨을 과도하게 신경 썼고(물론 그래야만 했지만) 집중견제 하다 보니. 다른 맨시티 선수들의 공격력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결과는 끔찍했다.
제퍼슨에게 몰린 수비수.
열린 공간.
그리고 그 공간으로 가볍게 패스를 찔러 넣는 빛나는 천재성.
라힘 스털링은 가볍게 발끝으로 공을 밀어 넣어 득점에 성공했다.
이번엔 돈나룸마가 손끝을 뻗었지만, 스털링이 한 발짝 더 빨랐다.
[맨시티! 5대 1입니다! 제퍼슨 리, 3골 2어시스트로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5대 1.
남은 시간은 20분.
5분에 한 골씩 넣는다고 해도 겨우 동점이다.
이 순간에 상황을 부정하는 일부 PSG팬을 제외하곤 모두 알았다.
경기는 끝났다.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 맨시티란 건, 중계진도, 관중도, TV로 보고 있는 전 세계 축구팬들이 직감했다.
다만 스코어가 어떻게 끝나냐가 문제였다.
[제퍼슨 리가 포효합니다! 세계 축구계에 다시 외치는군요! 그가 돌아왔습니다! 축구의 신이 맨시티로 강림했습니다!]
PSG팬들을 제외하곤, 아니 제퍼슨을 맨시티로 보내 줘서 울상인 첼시팬들까지도 제외하곤.
세계 축구팬들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부상 이후 사라질까 두려웠던, 현시대 최고 축구선수의 화려한 복귀.
부상 전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은 실력과 폼에 열광했다.
어쩌면 지금 시대의 축구팬들은 가장 즐거운 시기를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메시와 호날두의 시대를 이어 제퍼슨 리라는 불세출의 선수를 지켜보는 이 시대.
제퍼슨 리는 그들에게 아낌없이 보여 줬다.
[제퍼슨 리! 환상적입니다!]
드리블, 패스, 스피드, 화려한 개인기, 아크로바틱한 자세, 슈팅과 완벽한 득점까지.
후반 79분 사이드 측면으로 공을 몰고 간 제퍼슨 리는, 박스로 치고 들어오면서 각도가 없는 무각도 상황에서 힘껏 슛을 때렸다.
마치 UFO처럼 크게 휘면서 뚝 떨어지는 소름 돋는 궤적.
PSG팬들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하아!"
그저 탄식을 터뜨릴 뿐이었다.
6대 1까지 벌어진 스코어. 파리의 악몽의 끝은 제퍼슨이었다.
[제퍼슨 리가 날뜁니다!]
경기 종료 직전.
뻐어어엉!
제퍼슨은 무회전 프리킥 골에 성공하여 경기의 종지부를 찍었다.
[제퍼슨 리! 5골 2어시스트를 뽑아내며, 팀의 모든 득점에 관여합니다!]
[맨체스터 시티! 구단 역사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렇습니다! 제퍼슨 리와 자랑스러운 블루문들이 맨체스터로 우승컵을 들고 가는군요!]
[블루문 역사상 가장 행복한 한 해입니다!]
[오늘 맨체스터는 광란의 밤에 빠지겠군요.]
[하지만 오늘 세상이 끝날 것처럼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제퍼슨이 맨시티에 있는 한, 오늘 같은 날은 계속 찾아올 게 분명하거든요!]
[블루문! 제퍼슨과 함께 날아오릅니다!]
***
꽤 감회가 남달랐다.
새로운 팀에서 따내는 챔피언스 우승이라.
뭐, 그렇다고 한들 이젠 미쳐 날뛸 것처럼 기뻐하진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일이고, 내가 1년 동안 쉬면서 잊고 있던 걸 되찾은 것뿐이니까.
나는 비교적 담담했지만, 선수들은 그야말로 광분했다.
늘 냉철했던 펩 과르디올라마저 선수들과 미친 듯이 날뛰었다.
우승 셀레브레이션을 할 때까지. 펩은 내가 알던 그 펩이 아닌 것처럼 웃었다.
"사랑한다! 내 선수들!"
하긴.
바르셀로나 시절 이후 첫 챔스 트로피인가?
그러고 보니 펩도 챔스 우승을 오랫동안 못하긴 했구나.
울고, 웃고, 미친 듯이 내달리던 선수들이 다가와 말했다.
"고마워, 제프."
"정말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번 시즌에도 우승은 꿈도 못 꿨을 거야."
"아니지. 우리가 모두가 한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존 스톤스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우승을 기뻐할 자격이 충분하다.
수년간 맨시티에서 도전해 왔고, 끝내 성공했으니까.
만일 중간에 포기하고 다른 팀으로 떠났다면, 지금과 같은 영광은 누리지 못했으리라.
모두가 따낸 우승이다.
"물론 내가 한 80%는 했지."
"젠장! 20%나 우리에게 공을 돌리다니! 퍽이나 감격스럽군!"
내 농담에 선수들을 진심으로 웃었다.
한데 데 브라이너는 다소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서."
"뭐?"
"후우. 다음 시즌엔 우리가 30% 이상은 하도록 노력해 볼게, 제프."
음.
이 녀석, 생각보다 고지식한 놈이었구나.
아무튼, 셀레브레이션이 끝나고 필드로 선수들 가족이 내려왔다.
나는 유진이를 목말 태우고, 클라라를 품에 안으며 필드를 돌아다녔다.
유진이가 더 크면 이것도 못 하겠다. 덩치가 웬만히 산만 해야지, 녀석.
"형아! 형아! 여기서 형아가 최고야?"
"음? 아마도?"
"그치! 형아. 나도 형아처럼 될 거야!"
유진이는 재능이 있다.
타고난 피지컬은 둘째치고도, 매일 내 경기를 보고 공 갖고 논다더니.
나도 훈련장에서 상당히 놀랐다. 발끝에 감각이 살아 있다.
만일 이 꿈이 변하지 않는다면, 훌륭한 선수가 될 거다.
"그래. 열심히 해서 우리 유진이도 여기서 뛰자."
"웅웅!"
"우리 막둥이는 뭐 되고 싶어?"
그러자 클라라는 큰 눈을 끔뻑였다.
"율리아겐 아저씨!"
"응?"
"율리아겐 아저씨처럼 돼서! 내가 오빠 안 아프게 해 줄 거야"
"허······."
참.
부모님이 보면 질투하겠는걸?
"그럼 막둥이가 오빠 안 아프게 해 줄 때까지 계속 축구해야겠다!"
"웅웅!"
어디 보자.
은퇴하려면 그럼 몇 년 남았나.
***
"1년 동안 맨체스터에서 살 거야."
맨체스터에서 카퍼레이드를 끝낸 직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선언하셨다.
명목은 이거였다.
"1년 동안은 지켜봐 줘야지. 부상 직후 옆에서 가족이 서포트해 줘야지!"
맞는 말이다. 물론 난 괜찮지만, 부모님이 보기엔 다를 수도 있지. 불안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두 분 모두 스포츠 선수 출신이시니, 옆에서 서포트하는 것도 꽤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빠랑 살래!"
"형이랑 같이 살래!"
쌍둥이들이 드러누웠다.
평소에 말 잘 듣는 쌍둥이. 그리고 심지어 엄마 말이라면 찰떡같이 듣던 클라라도 눈물 맺힌 눈으로 매달렸다.
부모님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키운 건 우린데."
"어째 사랑은 네가 더 받는 거 같다."
그러게요.
뭐, 아무튼 해외 축구 생활 처음으로 온 가족이 다 같이 지내게 됐다.
***
그 해.
제퍼슨은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물론 발롱도르 수상에 충분한 팀 커리어이긴 하지만, 제퍼슨은 고작 다섯 경기를 뛰었을 뿐이다.
그래서 맨시티가 챔스 우승한 직후에도 음바페나 산티아고가 아무래도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않겠냐는 게 예상이었다.
그런 예상이 뒤돌아선 건 27~28시즌이 시작한 직후였다.
[맨시티 전반기 리그 18경기 16승 2무!]
[5개월 동안 시즌 총합 43골을 몰아친 제퍼슨 리. 경기당 평균 득점 2.7점!]
순식간에 득점 기록을 세우며, 리그 전반기 맨시티의 무패를 이끌었다.
그 엄청난 성적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메시와 호날두처럼 경쟁한다고?"
"지금 제퍼슨의 경쟁자가 존재할 수 있겠어?"
"음바페? 솔직히 말하지. 그 녀석이 메시와 호날두의 시대였다면, 가능했겠지. 지금은 아니야."
"지금 시대의 이름은 제퍼슨 리잖아?"
"독주 체제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겠어."
사람들의 예상은 예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
제퍼슨의 독주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27-28시즌 맨시티의 첫 유로피언 트레블을 달성했고,
28-29시즌에선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더블.
29-30시즌에선 챔피언스리그는 필마르크의 레알 마드리드에 승부차기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리그 무패우승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30-31시즌에선 다시 트레블을 이룩하며, 맨시티의 시대, 아니 제퍼슨의 시대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
1년만 맨체스터에서 같이 살 거란 말과 달리. 쌍둥이를 비롯한 제퍼슨의 가족은 2030년까지 4년 동안 맨체스터에서 살았다.
우선 맨체스터에서 대우가 너무 좋았던 게 이유 중 하나였다.
제퍼슨의 부모님은 맨체스터에서 유명 인물로 통했다. 어딜 가나, 산책하러 가든, 집 앞에 슈퍼마켓을 가든 난리가 났다.
단지 제퍼슨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호의가 있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쌍둥이도 그랬다.
유진과 클라라는 어딜 가도 인기스타였다.
제퍼슨은 SNS를 잘 안 하는데, 유일하게 올리는 사진이 바로 쌍둥이 사진들이었다.
깜찍한 클라라와 형을 닮아 덩치 큰 유진의 모습은 단지 축구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꽤 유명했다.
그러나 유진과 클라라가 이제 학교에 들어가야 할 때가 오자, 제퍼슨의 부모님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우리 간다고 게을러지지 말고."
"아냐, 좀 게을러져서 쉬어도 돼."
"그래 여자도 좀 만나고!"
"어휴. 우리가 괜히 집에 같이 살아서······."
"쌍둥이들 듣습니다."
제퍼슨의 말에 부모님은 머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쌍둥이들은 금세 컸다.
늘 몸이 약하고 또래보단 작았던 클라라도, 8살 생일을 맞이하자 또래처럼 보일 정도로 컸다.
유진은······.
"쟤 학교 가면 왜 중학생이 입학했냐고 하지 않을까요?"
"······뭐 맞고 다니진 않겠지."
이성학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제퍼슨과 같이 살면서 좀 격렬하게 논(거의 운동에 가깝게) 유진은 쑥쑥 컸다. 안 그래도 기본 피지컬이 대단한데, 제퍼슨의 집에는 율리아겐도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율리아겐은 유진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
"오! 엘도라도가 여기 있었군!"
학구열이 대단한 그에게 제퍼슨과 유진 형제의 피지컬은 연구대상이다.
미친 유전자가 바탕이 된 기본 피지컬.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율리아겐이 옆에 붙어 은근슬쩍 코칭을 했다.
'놀이'를 가장한 운동부터, 건강식까지.
물론 부모님으로선 좋았다.
끔찍이 아끼는 자식을 건강하게 해 주는 데 무슨 문젠가? 그것도 세계적인 전문가가 말이다.
어찌 됐건, 그 덕택에 8살이 된 유진은······.
절대 8살처럼 안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오죽하면 제퍼슨이 이런 말을 했겠나.
"율리아겐, 당신은 내 동생으로 인체실험을 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앨런 여사는 맨체스터를 떠나기 전, 율리아겐에게 조용히 물었다.
"우리 제프, 건강하겠죠?"
"물론이죠, 여사님. 제퍼슨은 제가 본 선수 중에 최고입니다."
"아니······ 음. 이런 질문이 좀 민망하긴 한데. 혹시······성적으론 문제없죠?"
"네?"
"가족이 같이 살아서 그런가. 그 때문인지 여자도 안 만나는 것 같고······."
그 말에 율리아겐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이내 웃었다.
그는 슬쩍 제퍼슨을 둘러봤다.
18살 애송이의 제퍼슨은 이제 없다. 서른 살의 굳건한 얼굴의 제퍼슨은 베테랑의 모습이 묻어났다. 20대가 거친 혈기를 내뿜는 야수 같았다면, 지금은 산 정상에 앉아 초월을 내려다보는 사자 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제퍼슨이 세계 정상에 서면서,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도 많았다.
그중엔 제퍼슨이 실제로 만남을 짧게나마 가진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축구를 최우선시하고, 사생활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제퍼슨이다 보니, 겉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더구나 제퍼슨도 연애 문제에 있어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퍼슨, 아주 건강합니다."
율리아겐의 확답에도 부모님은 걱정을 다 떨쳐 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걱정을 저 멀리 날려 버리게 되는 일이 생겼다.
< 외전 19. 제퍼슨 연대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