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8. 되찾으러 왔단다. (3) >
투헬 감독은 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무실점은 없다!"
그는 제퍼슨을 아주 잘 알았다.
투헬 감독이 유난히 제퍼슨을 잘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웬만한 축구 감독은 제퍼슨이란 선수를 분석하는 데 사활을 건다. 설령 제퍼슨을 만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선수! 아니, 22세기, 로봇이 축구를 하지 않는 한 제퍼슨만 한 선수는 나올 수가 없다!"
이미 전문가 사이에서는 제퍼슨이 역대 최고라는 조심스러운 발언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메시와 호날두를 뛰어넘고, 매번 비교할때마다 논란이 되는 전 세대의 스타들.
마라도나, 펠레, 베켄바워 등.
과거의 전설들보다 단연 압도적이라는 거다.
사실 이건 어떻게 평가할 수 없다. 과거의 선수를 평가할 땐, 개인의 사감이 많이 들어가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지금 제퍼슨이 최고. 그리고 역대 최고라는 건, 쉬쉬하지만 당연한 사실이었다.
제퍼슨은 그런 존재다.
경기 상대로 만나지 않는다해도,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건 축구계 종사자들이라면 해야만 하는 일이다.
마치 일종의 '교과서'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외치곤 했다.
"축구의 메커니즘을 바꾸고 있다!"
제퍼슨 리는 현대축구에서 메커니즘 자체를 바꿨다.
현재 스트라이커란 포지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플레이를 완벽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게 바로 제퍼슨이었다.
현대 축구는 제로톱이 유행하고, 정통 포워드가 사라지는 추세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톱으로 뛰고, 톱이 미드필더나 윙어처럼 뛰는 전술은 이제 더는 파격이 아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있어 제퍼슨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결국, 현대 축구의 스트라이커는 제퍼슨 리라는 선수가 펼치는 플레이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던 것이다.
제퍼슨의 등장은 비단 공격적인 전술과 스트라이커 활용에만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비전술 측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퍼슨을 막는 수비 전술? 그게 만들어진다면, 현대 축구에서 가장 완벽한 수비 전술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수비 전술 전문가들이 이렇게 탄식하곤 했다.
우스갯소리처럼 흘러나오는 얘기.
일반 축구팬들은 단순한 농담처럼 넘기는 얘기였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그러지 못했다.
투헬 감독도 그중 하나였다.
축구에 있어 수비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지는 상황. 투헬 사단 중에는 수비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비코치 몇이 있었다.
하나 그들도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저희보고 득점을 더 터뜨릴 공격전술을 연구하라고 하십쇼!"
"제퍼슨을 막는 비책? 옛날이라면 그래도 데이터가 쌓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르디올라하고 만났어요! 그 괴물이 천재 감독한테 배우고 익히고 있단 말입니다!"
챔스 결승을 앞둔 회의에선 나온 결론은 결국 일종의 항복선언이었다.
"무실점으로 제퍼슨의 팀을 이긴다는 건 절대 불가능이야."
"선제 실점을 내주지 않는 게 최우선이지. 하지만 내준다고 해도 흔들려선 안 돼."
"1점, 2점, 3점? 다 받아들여야 해. 하지만 우리의 핵심은, 그런 상황에서도 역전할 수 있다는 힘. 그걸 보여 주고, 만들어야 한다."
PSG 코치진의 시나리오엔 선제 실점을 내주는 경우는 당연히 있었다.
가장 높은 확률의 시나리오였으니까.
시나리오가 있다면, 당연히 대응하는 방법 역시 준비된다.
[네이마르의 화려한 드리블이 로드리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네요!]
화려한 라 크로케타가 마법처럼 발끝에서 펼쳐지고.
브라질 선수 특유의 개인기와 탈압박 능력.
그를 둘러싼 압박을 순식간에 벗어나는 네이마르.
네이마르는 거친 수비에 능한 오타멘디와 굳이 정면 승부를 겨루진 않았다.
그는 상대 선수를 어떻게 농락하는지 아주 잘 아는 선수였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더니, 발바닥으로 공을 드래그 백. 턴하면서 아주 가볍게 오타멘디를 벗겨 냈다.
"---!"
활짝 열리는 슈팅 각도.
센터백 에릭 가르시아가 재빨리 몸을 던졌지만, 네이마르의 선택은 슈팅이 아니었다.
투웅!
노룩 패스.
보지도 않은 채 우측 측면으로 향한 패스.
[맙소사! 엄청난 패스입니다! 선수 사이를 꿰뚫어 버리고! 에릭 가르시아의 태클을 쓰레기통에 갖다 처박아 버리는군요! 흘러나오는 공! 킬리안 음-바페! 으으으으음바페! 골입니다!]
"Fucking Goaaal!"
잔디를 뜯는 에데르손 골키퍼.
곧바로 동점골을 만들어 낸 음바페는 제퍼슨의 곁을 보란 듯이 지나가면서 소 포효했다.
[파리 생제르맹! 우승을 향한 염원은 그들도 뒤지지 않습니다! 1대 1! 웸블리 스타디움! 유럽 챔피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
결승전이란 단어가 주는 감상은 여러 개다.
최고의 두 팀이 맞붙는 마지막 경기.
사람들은 뛰어난 경기력과 만화나 영화에서 볼법한 스토리가 있으리라 믿는다. 또 스포츠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깨끗하고 정당한 승부가 나올 거란 기대감이 생긴다.
하나 현실은 꼭 그렇진 않다.
결승전에 걸린 게 많은 만큼.
지금껏 우승을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던 두 팀이 맞붙는 경기는 결코 깨끗하고, 아름답거나, 정당하진 않았다.
"죽여 버려!"
"난쟁이 자식!"
"정강이를 까 버려!"
"오늘 경기력 엉망이군! 우리 증조할머니가 보행기 타고 해도 너보단 잘 찰 거다!"
"머저리 새끼!"
동점이 되면서부터 경기는 이미 거칠어질 걸 예고했다.
치열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지배했다.
프로라고해서 모두 깨끗이 플레이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은 교묘한 반칙과 태클에 능하다.
"Fuck you!"
필드 위의 신사는 없다.
온갖 욕설이 뒤섞인다. 유럽의 모든 언어로 된 욕이 오갔다. 고성과 함께 듣기 더러운 트래쉬토크가 난잡한다.
밖에서 보면 그저 치열한 경기.
그러나 안에서는 누구보다 더러운 경기다.
뭐.
이게 축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이 늘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플레이는, 우리가 아니라 PSG가 유리했다.
"크읍!"
"레프리! 반칙! 반칙 안 불고 뭐 해!"
펩 감독이 대기심에게 소리 지르는 게 보였다.
맨시티의 기본 방식은 짧은 패스로 이뤄진 전개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이렉트한 플레이, 사이드를 이용한 크로스 플레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탕이 된 건 분명 짧은 패스의 유기적인 플레이다.
이런 유기적인 플레이를 깨부수는 대표적인 방법은, 더 대단한 조직력으로 맞불을 놓거나, 아니면 거칠게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오늘 PSG의 방식은 후자였다.
"끕!"
삐빅! 삑!
계속되는 파울 선언.
PSG는 공이 빠졌는데도 발을 집어넣고, 어깨를 밀었다.
'게임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리는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진흙탕.
나에게도 많은 태클이 쏟아졌다.
어쩌면, 이들은 단순한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상 복귀한 선수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나처럼 크게 다쳤다면 더 그렇다.
조금만 더 거칠게, 격렬하게 밀어붙이면 몸이 굳어 버린다. 대다수 선수가 그렇다.
하지만 잘못 알았다.
나는 트라우마 따위는 이제 없다.
스스로가 완벽한 몸 상태라고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들어오는 반칙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삐비비빅!
후안 베르나트의 태클에 내가 넘어지자 야유가 쏟아졌다.
"뭐야?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웃음 참고 있잖아?"
베르타트가 황당하다는 듯이 날 봤다.
흠.
눈치 빠른 녀석이네.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에게 경고가 주어지는 걸 확인하고, 프리킥 선언이 될 때야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케빈?"
"내가?"
"직접 노리긴 각도가 좀 애매해."
"그럼 내가 올려 주라는 거야?"
"응. 내가 원하는 그림은 이거야."
직접 노릴 수 있는 찬스라면 내가 직접 프리킥을 찼을 거다.
하나 방향이나 거리, 각도 모두 애매했다.
PSG가 프리킥 선언에도 크게 반응 안 한 이유였다. 집중만 잘해서 자리만 지키면 막아 낼 법한 프리킥 위치.
머리를 좀 써야 한다.
프리키커에는 케빈 데 브라이너.
그리고 박스에는 신장 좋은 선수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았다.
케빈과 눈을 마주쳤다.
세트피스는 본래 훈련의 산물이다.
지독한 훈련 끝에 성공하는 게 바로 세트피스 득점이다.
한데 가끔은, 정말 가끔은 훈련 없이 '감각'으로만 될 때가 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선수끼리 호흡이 거짓말처럼 맞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뻐엉!
케빈의 길게 휘어지는 간접 프리킥.
그 순간 나는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나가면서 뛰었다.
공의 궤적은 완벽하다. 야구의 변화구처럼 휘어지는 공. 케빈은 최선을 다했다. 이제 이걸 해결하는 건 내 몫이다.
마크맨으로 붙은 프리스넬 킴벰베.
좋은 선수지만, 적어도 피지컬에선 날 이길 수 없다. 그와 신장도 10cm, 몸무게도 20kg 가까이 차이 나는데 말이지.
설령 나랑 비슷한 신체 조건이라고 한들.
몸을 쓰는 방법을 잘 아는 건 나다.
빠악!
"꺽!"
수비수를 떨쳐 내고, 머리를 휘둘렀다.
음, 그러니까 말 그대로.
목을 길게 쭉 빼내며, 마치 방망이로 공을 후려치듯이 머리로 공을 후려쳤다.
펑!
이건 공이 터지는 소리가 아니다.
아마도, 파리 팬들의 마음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아닐까?
"제----프!"
"Bluemoon, Bluemoon!"
***
제퍼슨의 부모님은 동료들 사이에 둘러싸여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아들을 바라봤다.
"행복해 보이지?"
"그러네."
"미식축구 그만둔다고 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그때 안 말리길 잘했어."
"뭐야, 당신 말리려고 그랬어?"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아니다 싶으면 말리려고 했지. 당신이나 나나 잘 알잖아. 운동은 행복해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거라고."
앨런의 말에 이성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든 행복하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운동은 더했다. 매번 부상과 싸움의 반복이다.
근육을 찢고 회복시키고, 오로지 흘린 땀과 피로만 대결해야 하는 치열한 싸움.
그 싸움은 고통이 필수적으로 동반됐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선, 스스로가 행복해야 했다.
선수들 사이에 둘러싸여 빼꼼 고개를 내미는 아들. 자신들을 향해 브이를 날리는 모습을 보며, 이성학은 생각했다.
"행복하면 된 거지."
"아빠! 나도 오빠 볼래!"
이성학은 막내 클라라의 애교에 웃음을 터뜨리며 목마에 태워 줬다.
그때 옆에 있던 둘째 유진이 질투했다.
"나도 안 보여! 보여 줘!"
물론 그게 거짓말인 건 안다. 이미 덩치는 여덟 살, 아니 열 살처럼 보이기도 하는 녀석인데.
하지만 이성학은 한쪽 어깨엔 클라라, 반대쪽엔 유진을 태웠다. 물론 유진을 태울 때 몸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더 크면 이것도 못 해 주겠지.'
행복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
벼락같이 이어진 두 골.
경기는 분위기 싸움이다.
동점골을 만들어서 분위기를 이쪽으로 갖고 왔다고 생각했거늘.
상대는 너무 쉽게 넣어 버렸다.
두 골을 몰아치며 PSG의 마음을 터뜨려버린 제퍼슨을 바라보며 투헬 감독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신 차려! 이 정돈 예상했잖냐!"
투헬은 다급한 표정의 선수들을 보고 소리쳤다.
물론 예상했다.
그러나.
'누가 머리로 공을 후려쳐서 골을 넣는 걸 예상해?'
비교적 평범한 골을 예상했지, 별로 위험하지도 않았던 세트피스에서 이런 실점을 내줄 줄 누가 알았던가.
'단순한 근육질이 아니야. 온몸이 유연하기 짝이 없어.'
투헬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피지컬이다.
차라리 피지컬만 저러면 이해한다. 세상엔 불가사의한 괴물들이 가끔 튀어나오니까.
하지만.
[제퍼슨의 돌파! 케빈! 아웃사이드로 내준 공을 제퍼슨이 잡았습니다! 오, 이런! 수비수 둘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페이크!]
문제는 기술이었다.
단숨에 세계 정상급 수비수 둘을 멍청이로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발기술.
그리고 이어지는 호쾌한 중거리슛.
뻐어어어엉!
얼마 전 제퍼슨의 영입을 노렸던 투헬이다.
한데 맨시티에서 엄청난 연봉을 제시했단 걸 듣고 얼마나 탄식했던가.
그리고 그 정도로 사 올 바엔, 차라리 좋은 선수를 여러 명 사 오겠단 마음으로.
엘링 홀란드와 돈나룸마를 2500억씩이나 주고 데리고 오지 않았나.
한데 투헬은 지금 이 순간이 무척 희극처럼 느껴졌다.
제퍼슨의 중거리슛에 맥도 못 추고 무너지는 돈나룸마.
제퍼슨 같은 폭발적인 플레이는 아니더라도, 득점을 기대했던 엘링 홀란드가 그저 애꿎은 잔디만 발로 차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래도 이번 해트트릭은 평범한 골이군.'
비교적(?) 평범한 골에, 투헬은 해탈한 사람처럼 그저 웃었다.
< 외전 18. 되찾으러 왔단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