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7. 되찾으러 왔단다. (2) >
매 시즌 여러 클럽이 챔피언스리그 우승 후보로 뽑힌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7~8개로 축약된 후보 중에 반드시 우승팀이 나온다.
한데 늘 우승 후보로 뽑히면서 정작 실제 우승 경험이 없는 팀이 몇 있다.
누가 봐도 막강한 선수진. 세계 최정상의 감독. 훌륭한 코치진. 마르지 않는 자금력. 최고급의 훈련시설까지.
어느 팀이냐고?
"이번만큼은 반드시!"
격정적인 목소리로 웸블리로 향하는 맨시티 팬들의 행렬.
그리고.
"지금이 우승 적기다!"
상대팀 파리 생제르망도 그랬다.
무조건 우승해야만 하는 스쿼드와 자금력이 바탕이 된 두 팀.
그러나 지독하게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났다.
공교롭게도,
최근 두 팀이 우승을 못 한 결정적 원인은 제퍼슨이었다.
"제퍼슨 리! 그놈이 중요한 순간 우리를 매번 꺾었어!"
파리의 팬들은 제퍼슨이란 이름만 봐도 경기를 일으켰다.
늘 첼시를 다른 팀이 잡아 주고, 일찍 탈락하기를 바랐던 순간이 얼마나 많던가.
그들은 이번 시즌 제퍼슨이 복귀를 못 할 거란 소식을 듣고 이렇게 외쳤다.
"지금이다! 이번 시즌이 적기야!"
"투헬 감독! 이번이 기횝니다. 이번 시즌 원하는 선수만 말하십시오. 다 해 드리겠습니다!"
구단주는 일찌감치 투헬 감독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파리는 핵심 선수를 모두 지켰다. 그리고 제퍼슨과 산티아고를 제외하면 가장 위험한 스트라이커란 평가를 받는 엘링 홀란드를 이번 시즌에 영입했다.
홀란드와 네이마르 투톱에 음바페의 파괴력까지.
PSG는 리그 31라운드에 리그 우승을 조기 확정 지을 만큼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
"리그 우승은 지겹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유럽 챔피언이다!"
"제퍼슨이 없는 첼시! 이번 시즌이 기회다!"
그런 간절한 염원이 통했을까.
PSG는 역대급 대진운을 타고났다.
16강에선 라이프치히, 8강에선 레스터 시티, 4강에선 이변을 일으킨 포르투를 만났다.
모두 상대적인 약팀이었고, 돌풍을 일으킬 만한 실력을 지녔다.
그러나 선수단 구성만 따지면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맨시티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부족한 팀이 아닌 게 바로 PSG가 아닌가?
"남은 리그 경기 따위 필요 없어!"
"챔피언스리그에 집중해!"
"선수들 부상당해선 안 돼! 경기 감각만 유지하고 2군들 내보내!"
그렇게 절치부심 준비한 파리는 의기양양했다.
이번에야말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단 낙관이 팬들에게 감돌았다.
하나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제퍼슨 맨시티 이적!"
"뭐?"
"괜찮아. 맨시티를 대진표에서 만나려면 결승전이고. 제퍼슨은 이번 시즌 아웃이잖아?"
"그래. 복귀할 리가 없잖아."
"설령 그렇다 해도 경기 감각이 최악이지. 부상 전 몸 상태란 보장도 없고!"
그들도 겉으로는 의연한 척했다. 사실은 엄청 불안했지만.
실제로 그게 논리적으로도 합당한 의견이었고.
그런 의견들이 무참히 깨지고 PSG팬들의 심장이 무너지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첼시, 제퍼슨 리가 벌인 복수극의 악역이 되다!]
[제퍼슨은 제퍼슨이다. 챔피언스리그 4강 1, 2차전 총합 4골 1어시스트 폭발!]
[맨시티, 챔피언스리그 결승 안착! PSG와 세기의 대결!]
"미친!"
"제퍼슨이다! 그 제퍼슨이 왔다!"
"제퍼슨이 결승전에 왔다!"
"신이시여!"
유럽 축구계에선 우스갯소리처럼 퍼져나가고 있던.
제퍼슨 공포증.
일명 '제퍼슨 포비아(Jefferson Phobia)'가 프랑스에 상륙했다.
***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시작됩니다!]
[맨시티의 포메이션입니다! 에데르손 골키퍼, 수비진에는 벤자민 멘디, 니콜라스 오타멘디, 에릭 가르시아, 주앙 칸셀루. 미드필더에는 로드리, 케빈 데 브라이너, 필 포덴이, 그리고 공격진에는, Oh, 이런! 제퍼슨 리가 자리 잡았습니다!]
[반면 PSG는 4-3-3의 포메이션을 들고왔습니다. 밀란에서 이적해 온 지안루이지 돈나룸마 골키퍼! 후안 베르나트, 프레스넬 킴벰베, 말랑 사르, 틸로 케러가 포백입니다. 미드필더에는 레안드로 파레데스, 파블로 사라비아, 율리안 드락슬러. 공격진에는
네이마르, 엘링 홀란드, 그리고 작년 발롱도르 수상자 킬리안 음바페가 자리합니다!]
[작년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제퍼슨의 독주를 막았던 음바페는 이번 시즌 리그와 컵 대회 포함 39골 2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세계 최고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 경기 전 인터뷰 소식이 전해져 왔네요. 잠깐 화면 보실까요?]
믹스트존에 제퍼슨이 입장하자 기자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여러 질문이 오갔지만, 그중 중계 카메라가 캐치한 질답은 딱 하나였다.
"한편에서는 작년에 음바페가 발롱도르를 수상한 걸 보고, 메시와 호날두의 경쟁이 다시 한번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음바페가 당신의 훌륭한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할 때까지만 해도 제퍼슨의 독주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제퍼슨의 부상.
그리고 프랑스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킬리안 음바페가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하여 사람들은 혹시 메시와 호날두처럼 2인 경쟁 체제가 생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품었다.
그에 대한 제퍼슨의 생각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전 그냥 제가 잠시, 아파서 맡겨 둔 것들을 오늘 받아 낼 생각입니다."
"맡겨 둔 거요?"
"가령,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이라거나. 발롱도르라거나. 반짝이는 것들 말이죠."
***
PSG는 다시 말하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다.
수비진은 현시점에서 포텐이 터진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고, 골키퍼 역대 이적료를 갈아치우고 이적한 돈나룸마도 무서운 상대다.
하물며 공격진의 세 명.
네이마르, 음바페, 엘링 홀란드는 솔직히 말해 첼시 시절의 공격진에 필적하는 유일한 스쿼드라 평가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네이마르는 명실상부 메시와 호날두의 시대에 한 발 걸쳤던 입지전적인 선수다.
킬리안 음바페는 스무 살 때 월드컵을 정복했고, 작년에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발롱도르를 쟁취한 재능이다.
엘링 홀란드는?
이 녀석도 무섭다.
도르트문트에서 수년간 골 폭격을 이어 갔던 이놈도, 나와 산티아고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스트라이커란 평가를 받는다.
한때 필마르크 감독도 첼시에서 그를 영입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던 걸 생각하면, 그의 스트라이커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저 팀에도 부족한 건 있다.
바로 중원이다.
레안드로 파레데스, 파블로 사라비아, 율리안 드락슬러.
이 셋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공격진보다 조금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우리 팀과 비교해선 우리가 더 낫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물며 우리는 과르디올라의 지독한 패스 위주의 전략이 마련된 팀이다.
적어도 중원 싸움에선 우리가 우위이리라.
그러니까 우리는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게임에 임하면 된다.
"Allez Paris Saint-Germain!(뛰어라! 시작하라! 파리 생제르맹이여!)"
"Gagner paris saint germain!(승리하라! 파리 생제르맹이여!)"
펫 숍 보이스의 '고 웨스트'를 개사한 파리의 응원가.
알레 파리 생제르맹(Allez Paris Saint-Germain)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선.
맨시티의 응원가인 블루문이 펼쳐졌다.
"Blue moon, Now I'm no longer alone Without a dream in my heart Without a love of my own"
"블루문, 난 절대 혼자가 아니야 내 가슴 속의 꿈 없이! 나에 대한 사랑 없이!"
양 팀의 치열한 응원가.
파리가 승리를 위해 격정적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맨시티는 좀 더 낭만적이었다.
지극히 차분했고, 담담했다.
그들은 선수들 한 명, 한 명에게 응원을 실어 주고 있었다.
흠. 그간 내가 첼시에 있을 땐 나한테 욕하던 팬들이라 색안경을 끼고 있었나 보다.
세상 어떤 축구팬이든,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겐 한없는 사랑을 베푼다는 게 지금 절실히 느껴졌다.
아무튼, 저 사랑에 대해 보답을 해야지.
그게 선수의 의무니까.
심판진과 악수하고 상대팀 선수들과도 악수했다.
특히 음바페, 네이마르, 엘링 홀란드 이 셋은 악수할 때 힘을 꽉 주고 날 노려봤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유치한 기 싸움 따위.
***
경기에 나선 음바페는 그 어느 때보다 승부욕에 불탔다.
'제퍼슨 리!'
음바페는 씹어 삼킬 듯한 눈빛으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사실 제퍼슨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가 유력한 선수는 음바페였다.
어린 나이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해 버리는 역대급 커리어.
매 시즌 두 자릿수 이상의 득점과 어시스트.
수많은 전문가와 팬들이 칭찬하는 폭발적인 경기력.
음바페는 자만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은 품었다.
메시와 호날두가 은퇴하면, 아마 그 자리를 차지할 최우선 순위는 다름 아닌 자신이라고.
한데 어느 순간 제퍼슨 리가 나타났다.
그건 정말 극적이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제퍼슨이 등장하는 시점만 해도 미국은 축구계의 변방이었다.
'거기서 갑자기 제퍼슨이 나타났지. 갑자기.'
그건 정말 어떤 전조현상도 없이 엄청난 재해가 발생한 것과 같았다.
유럽에 등장하자마자 프리미어리그를 씹어 먹고, 곧 유럽 전체를 제패했으며 월드컵까지 제패했다.
사람들은 곧바로 제퍼슨을 찬양했다.
음바페도 그 나이에 월드컵을 들어 올렸지만,
프랑스라는 팀과 미국이란 팀을 이끌고 우승을 차지한 것.
무엇이 더 값진가?
하물며 프랑스 리그가 비교적 약한 리그라는 점.
그 때문에 음바페는 엄청난 스탯을 쌓아도 매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물론 제퍼슨은 그보다 더한 스탯을 쌓긴 했지만.
어쨌건, 음바페는 제퍼슨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넘어야 할 산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잠시 맡겨 둔 거라고?"
감독은 제퍼슨의 믹스트존 인터뷰를 곧장 전해 줬다.
보통 이런 인터뷰를 경기 전에 알려 주면, 선수의 마음을 흔들어 악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투헬 감독은 음바페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음바페는 엄청나게 의욕을 불태웠다.
제퍼슨이 얄밉거나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잠시 맡겨 둔 게 아니라, 메시와 호날두처럼. 은퇴할 때까지 경쟁 상대로 인정하게 해 주겠다!"
그것이 음바페의 목표였다.
그리고 다짐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깨닫게 된 건, 경기 시작 후 5분쯤이 지났을 때였다.
[파레데스의 패스가 율리안 드락슬러에게 향합니다!]
[오, 이런! 로드리가 공을 차단합니다!]
[로드리의 짧은 패스, 케빈 데 브라이너! 길게 찹니다! 맙소사! 됐습니다!]
기가 막힌 패스.
선수 세 명을 가로지르는 롱패스에 관중들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중계하는 해설자마저 흥분해 소리쳤다.
더 놀란 건, 그 환상적인 패스를 우아하게 받아 내는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의 돌파! 레안드로 파레데스를 뚫어냅니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고스트 스텝!]
맨 처음 막아선 레안드로 파레데스를 특유의 고스트 스텝으로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계속되는 드리블! 드리블! 프레스넬 킴벰베! 가랑이 사이로 빠집니다!]
[What the······! 방금 뭐였죠? 도대체 뭐였죠? 현란한 속임수입니다! 프랑스 리그 최강자 킴벰베를 멍청이로 만들어 버리는 화려한 움직임입니다!]
연이어 두 명의 선수를 제치고,
[후안 베르나트! 뚫어냅니다!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 혼자서 무자비하게 파리의 수비진을 찢어 버립니다!]
관중들은 입을 쩍 벌렸다.
파리, 맨시티 팬할 것 없이. 그들은 떨리는 눈동자로 필드를 바라봤다.
"아니······."
"저렇게 뚫는다고?"
"도대체 뭐야?"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너무 압도적이면, 오히려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케빈 데 브라이너의 패스를 우아하게, 발끝으로 돌려세운 뒤.
점차 속도를 끌어올렸다.
고스트 스텝으로 파레데스를 제치고, 거기서 가속도를 더 터뜨려 킴벰베의 가랑이로 넛메그를 시도한 뒤. 후안 베르나트의 태클을 제퍼슨 턴으로 간단하게 흘려보낸 제퍼슨은······.
"빌어먹을! 저 자식을 또 만났다니!"
밀란 시절.
제퍼슨에게 된통 당했던 돈나룸마가 비명을 내질렀다.
완벽하게 무력화된 수비수.
돈나룸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튀어나가? 자리 지켜? 몸 날려? 무게 중심 낮춰? 아니면 끝까지 봐?'
선택지가 너무 많다.
제퍼슨은 예측할 수 없는 선수다. 섣불리 예측했다간 공은 골라인을 넘는다. 신중해야 한다. 끝까지 공을 보고 가장 마지막에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제퍼슨이 성큼 다가와 발을 내딛는 순간.
'사라졌다?'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의 시야에 확대된 공이 훅 하고 나타났다.
'무슨 슈팅이 이렇게······.'
밀란 시절 막아 본 슈팅과는 차원이 다른 빠르기.
강력함.
그 사실에 돈나룸마는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더 성장했어?'
이미 괴물 같던 선수가?
뻐어어엉!
돈나룸마는 그저 멍하니, 공이 골라인을 넘는 걸 봐야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강력한 슈팅.
그 슈팅을 보고 놀란 건 비단 돈나룸마뿐만이 아니었다.
제퍼슨이 인정하는 라이벌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음바페도,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이었다.
"······너무 큰 목표였나?"
< 외전 17. 되찾으러 왔단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