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5. 잔인한 시즌 (4) >
[현재 시각 순위표 매 상단은 첼시입니다! 2위 맨시티! 3위 아스날! 4위 토트넘! 5위 맨유!]
[정말 흥미진진한 상황입니다! 첼시가 토트넘에게 1대 0으로 패배하고 있는 상황, 맨시티가 두 골만 더 넣으면 골득실차로 1위에 올라섭니다!]
[반면 맨유는 패배하더라도, 만일 첼시가 토트넘을 잡게 된다면 리그 4위로 챔피언스 진출권을 획득합니다!]
[충돌하는 네 개의 팀이 모두 간절한 이유가 있네요!]
[기존 5위, 6위에서 6위 7위로 떨어진 레스터와 울브스도 승리를 거두고, 토트넘이 패배한다면 맨유를 제치고 4위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스날만 웃고 있다는 게, 정말 재밌는 사실이네요!]
제퍼슨의 해트트릭이 터지고 맨시티 팬들은 흥분했다.
이젠 정말 눈앞에 아른거렸다. 딱 두 골이다. 혹시나 했지만,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고개를 내젓던 기적이 코앞에 나타났다.
"제-퍼-슨!"
특히 필드에서 보여 준 '히어로 랜딩'에 팬들은 열광했다.
맨시티 팬들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는 반면에, 맨유 관중은 말을 잃고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저 멍하니 경기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흡사 게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두 골만 더! 두 골만 더!"
시간은 이제 많지 않다.
정규시간 20분. 인저리 타임을 포함한다 해도 25분이 최대다.
그 안에 두 골을 만들어야만 한다.
맨시티 팬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소리쳤다.
"제퍼슨! 제발 우리에게 우승컵을 안겨 줘!"
그리고 제퍼슨은,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는 존재였다.
***
맨유의 전술은 간단했다.
강력한 전방 압박과 거친 플레이, 그리고 두 줄 수비.
흡사 무리뉴 감독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우 닮은 전술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핏기가 가신 뉴 베럴라 감독이 보였다.
그는 현재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이해 못 한 눈치였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빌어먹을! 꼭 골을 그런 식으로 넣어야 해?"
로드릭이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히어로 랜딩! 그 짓거리를 왜 하필 내 앞에서 하냐고!"
내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진 플레이.
상대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넘어가는 플레이는 히어로 영화에서 히어로가 착지할 때의 모습과 닮았다고 그렇게 불린다.
당연히 쉬운 기술은 아니다. 타이밍과 신체 상태, 뛰어오를 수 있는 충분한 거리. 주위의 모든 환경이 맞춰져야 한다.
조금 전 히어로 랜딩으로 확신했다.
내 몸은······.
'완벽하다.'
부상 트라우마?
오로지 정신적인 문제일 뿐이다.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내 곁엔 율리아겐을 필두로 한 세계적인 트레이닝 팀이 있다.
그 뒤에는 압도적인 자금력을 소유한 후원사들도 있다.
부상 복귀 후.
다이내믹한 플레이를 못 보여 줬던 건, 단지 내가 머뭇거렸던 것뿐이다.
이젠 문제없다.
"달려!"
분위기를 완전히 잡았을 때 경기를 끝내야 한다.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20분, 18분, 15분, 12분······.
시간이 흘러가면서 급해진 건 오히려 우리였다.
맨유는 로드릭이 이를 악물고 몸을 던져가며 막았다.
온몸이 잔디와 흙으로 엉망이 되는 지독함에 나조차 놀랄 정도다.
지독한 열정이다.
흡사 시셀도를 보는 듯한 고통스러운 수비다.
혹자는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이미 3점 차로 벌어진 스코어.
패배는 기정사실화됐다. 시간이라도 많이 남았으면 모르지.
한데도 끝까지 열심히 뛰고 있다.
맨유 팬들은 그런 로드릭에게 점점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고 있었다.
그 박수는 점점 커졌고, 끝내 맨유 선수들의 얼굴에 다시 한번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네가 말했지, 제프."
"응?"
"경기를 패배해도, 팬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난 지금 그러고 있을 뿐이야. 네가 싫어서 우승을 막는 게 아니라고."
계속해서 어깨를 부딪치던 로드릭의 말에 난 잠시 서서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주근깨 가득한 그 철없던 로드릭은 없었다.
이젠 미국 국가대표 주전이자, 맨유의 핵심 센터백, 그리고 맨유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로드릭이 있었다.
"새끼, 많이 컸네."
"제프, 가끔 네가 형처럼 구는 데, 사실 우리 동갑인 건 알지?"
"축구는 내가 더 오래 했어."
"······무슨 소리야? 너 미식축구 했잖아?"
"아무튼, 내가 더 했어."
사람은 성장한다.
내가 성장한 것처럼, 로드릭도 성장했다.
승부의 승패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팬들을 잃게 되면 승패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
지금 첼시가 리그 1위를 달린다고 해서, 첼시 팬들이 박수를 보내 주고 있는가?
아니다.
팬들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프로스포츠의 존재 이유다.
로드릭은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어린 맨시티 팬이 보였다.
저 어린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상상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막아!"
"크읍!"
치열하다.
로드릭은 이를 악물고 나를 따라다녔다. 음투쿠지 역시 뒤에서 날 압박했다. 내가 이 둘의 처절한 수비에 막히는 사이 시간은 갈수록 부족해졌다.
"추가시간 4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관중석 분위기를 살폈다.
맨시티 팬들은 초조하다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맨유팬들은 일찌감치 패배를 인정한 분위기였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분위기만 살피면 꼭 우리가 지는 것 같다.
하기야.
팬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게 패배와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슬슬 경기의 끝이 보이자, 로드릭이 다소 내 눈치를 보며 툭 쳤다.
"제프, 오늘 우승 놓쳐도 우린 친구지?"
"그건 생각 좀 해 볼게."
그때였다.
관중석 일부가 어수선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맨시티 원정석이 시끄러워졌다.
"······?"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핸드폰을 보더니, 이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슬쩍 벤치 쪽을 바라봤다.
코치 한 명이 양손을 마구 흔들며 흔들었다.
그 순간.
필드 위에 있던 맨시티 선수들의 얼굴이 일제히 흥분으로 빨개졌다.
'토트넘이 한 골 더 넣었다!'
됐다.
이제 필요한 건 한 골이다.
무조건 한 골만 더 넣으면 된다.
남은 시간 4분, 아니 3분!
"패스해!"
케빈 데 브라이너가 소리치며 오른쪽으로 질주했다.
맨유 선수들이 데 브라이너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필 포덴이 공을 소유했다. 왼쪽 터치라인을 질주하는 베르나르도 실바. 중앙으로 스위칭하는 스털링.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데 브라이너.
이럴 수가 있을까.
세 명의 선수들이 마치 한 몸처럼, 짠 것처럼 움직였다.
"제프!"
포덴이 날 바라봤다. 나 역시 앞으로 전진했다. 데 브라이너와 스털링의 스위칭으로 만들어진 공간.
포덴의 패스가 그 공간으로 찔러졌다.
툿! 투욱!
성큼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이 터져나갈 듯 부풀어졌다.
온몸에 활력이 돋는다. 뇌에서 퐁퐁퐁 도파민이 쏟아진다. 마치 마약에 빠진 것처럼 몸이 둥실 떠오른다. 가볍다. 한없이 가볍다.
맨유 선수들이, 특히 로드릭과 음투쿠지가 날 바라봤다. 아직 페널티 박스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거리.
그러나 문제없다.
이미 속도가 붙기 시작한 이상. 나에게 물리적인 거리는 무의미하다.
물리적인 제약.
내 별명이 뭐였나?
"물리학의 반역자!"
주위의 공간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접힌다.
순식간에 맥토미니를 스피드로 떨쳐 낸다. 로드릭과 맥과이어가 몸으로 부딪쳐 왔다. 나는 잔발을 놀려 그사이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양쪽 발에서 공이 오가며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우웁!"
완벽한 돌파.
로드릭의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공을 살짝 건들 듯이 툭 튀어나온다.
"제-----퍼-----슨!"
맨시티 팬들이 찢어질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데헤아가 입을 깨물고 달려든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이는 것.
그저 본능에 휩쓸려 공을 차는 것.
그런데도 공이 내 통제에 완벽하게 움직이는 것.
각도를 좁혀 오는 데헤아의 가랑이 사이를 노렸다.
있는 힘껏 때렸다. 이 자세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슈팅을.
뻐어엉!
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박스에 있던 모든 선수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관중들도.
공은 빨랐다.
어찌나 빨랐던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조차 그렇게 느꼈는데, 데헤아는 어쩌겠는가?
"LEE Will, LEE Will Fuck you!"
들어갔다.
그리고.
삐이이이이익!
27-27시즌, 프리미어리그가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우승팀은.
"We are Champion!"
맨체스터 시티다.
***
새삼 신기하다.
그러니까. 지금 반응이 말이다.
맨시티 원정석의 흥분한 팬들 일부가 경기장으로 난입했다.
경호 요원들이 급히 달려들었지만, 되려 선수들이 난입한 팬들을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나 역시 난입한 팬들에게 둘러싸였다.
"사랑해, 제프!"
"제프! 네가 60살이 되고 내 딸이 스무 살이 되어도 결혼은 허락할게!"
"오, 제프. 맙소사!"
그 와중에 볼에 뽀뽀 세례를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남자도 있었고, 여자 관중도 있었다.
아무튼. 누군가는 벌게진 얼굴을 땅에 묻었다.
누구는 유니폼을 벗고 그저 미친 듯이 뛰었다.
맨유 선수들은 라이벌팀이 안방에서 우승 세레머니를 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사실 맨유 선수들이 어떤지는 우리는 상관 않았다.
그저 이 기쁨을 나눴다.
첼시에선 우승이 익숙했다.
그래서 우승이 반복될수록, 선수들의 반응도 시들해졌다. 팬들도 그랬다. 지금처럼 열광적인 반응은 점점 약해졌다.
그래서인지, 지금 맨시티가 보여 주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게 몇 년 만의 우승이냐고오!"
축제의 현장.
맨체스터가 광란의 밤에 빠졌다.
몇몇 사소한 다툼과 사건이 발생해 경찰들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래도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케빈! 왜 아깐 오른쪽으로 치고 갔지? 왼쪽으로 갔어야 스털링이 측면을 털 수 있었어!"
"스털링! 스위칭했으면 본인 위치를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과르디올라 감독은 세레머니를 하는 선수들에게 소리쳤다.
······솔직히 지독하다.
우승까지 했는데, 부족한 점을 저렇게 지적하다니.
한데도 선수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하긴. 이게 뭐 감독 스타일 차이겠지.
아무튼.
나 역시도 잔소리에서 피해갈 수 없었다.
"제프! 잘했다! 다섯 골을 약속했지만 네 골인 게 좀 아쉽지만 말이야!"
입가에 띤 미소를 보건대, 반은 농담이다.
그러나 반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몇 달 겪어 본 펩은 축구에 미친 싸이코 같은 양반이다.
"알겠습니다. 실망하게 해 죄송해요. 나머지 한 골은 다음 경기에서 마저 넣을게요."
내가 받아치자 과르디올라는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게 그도 기쁨을 억지로 참는 게 분명했다.
그는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 전 선수들을 모았다.
"자! 리그 우승을 쟁취했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하지만 아직 긴장을 풀어선 안 돼! 우리에겐 유럽 챔피언의······."
퍼엉!
그때 감독에게 잔소리를 실컷 들은 스톤스가 샴페인을 터뜨렸다.
부글부글 올라오는 거품에 푹 젖은 과르디올라가 피식 웃었다.
"좋아! 오늘은 즐기자고!"
언제나 좋다.
우승이란 건 말이다.
"행복한 시즌이었다! Bluemoon!"
***
[맨체스터 시티 7년 만의 프리미어리그 타이틀을 쟁취하다! 맨유를 4대 0으로 격파!]
[제퍼슨 리 4골 폭발! 맨체스터 시티를 정상으로 이끌다!]
[광란과 울분의 밤, 맨체스터. 맨유 리그 5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탈락]
[토트넘 2대 0으로 첼시에게 승리! 리그 4위, 챔피언스리그 진출 확정!]
[첼시 상대로 2골을 터뜨린 한국의 쏘니, '제퍼슨 리에게 좋은 선물을 해 줬다.']
[제퍼슨 리 '토트넘의 승리에 감사하다.']
[시즌 최고의 경기력. 맨체스터 시티에 제퍼슨 리가 더해진 맨체스터 더비. 맨시티, 극강의 팀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다.]
[존 스톤스, '제프가 우리에게 오는 순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이미 예상했다.']
[맨체스터에 방문한 미국 팬, '제퍼슨은 미국축구의 영웅이자 전 세계 축구팬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 맨시티가 그를 품어 줘서 감사하다.']
[펩 과르디올라, '우리의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영국의 챔피언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의 꿈은 유럽 챔피언에 있다.']
[맨체스터 시티 구단주, '우승은 기쁜 일이다. 돈을 받는 건 더 기쁜 일이고.' 구단 선수, 프론트 전 직원에게 보너스!]
[맨체스터 시티에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즌.]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모두 맨시티에게 빼앗긴. 그리고 제퍼슨 리라는 팀의 가장 화려한 스타까지 내어 준 첼시는, 구단 역사상 가장 잔인한 시즌을 보냈다.]
< 외전 15. 잔인한 시즌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