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4. 잔인한 시즌 (3) >
원정팬들은 제퍼슨의 세레머니를 바라보며 환호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제퍼슨이 그간의 선수와 다르다고 느꼈다.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는 선수!'
팬들에게 기대하게 해 주는 선수는 꽤 많다.
화려하고 창의적인 플레이. 예상을 벗어나는 움직임. 폭발적인 공격력.
그 모든 걸 갖춘 월드 클래스 선수는 많다.
그런 선수는 늘 팬들에게 '무언가 해 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나 실제로 그 느낌을 완벽하게 현실에서 실현해 주는 선수는 별로 없다.
때때로 기대했다가 기복이 심해 실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그게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월드 클래스라도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떻게 매번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겠는가.
한데 제퍼슨은 달랐다.
비록 챔피언스리그와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밖에 못 본 제퍼슨 리였지만.
단 세 경기만으로도 제퍼슨은 쏟아지는 모든 기대감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아니, 단순히 충족시켜 주는 게 아니라 팬들을 미치게 했다.
"Jeff! Jeff! Jeff! Jeff! Jeff!"
"킹 제프는 이제 블루문의 러닝백이다!"
"미쳤어. 어떻게 선수를 날려 버리면서 헤더를 하지?"
"우리한테도 저런 선수가 있을 줄이야."
"누가 부상으로 피지컬 약화됐다고 했어? 제임스 로드릭이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고!"
제퍼슨은 빠르게 세레머니를 끝내고 골대 안의 공을 들고 하프라인으로 뛰었다.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제퍼슨은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맹렬하게 뛰었다.
그 모습에 맨시티 팬들은 환호를,
맨유 팬들은 공포를 느꼈다.
"저 괴물 같은 놈이 시간이 부족하다며 공을 들고 뛴다고? 대체 몇 골이나 넣을 생각인 거야!"
[제퍼슨 리가 맨체스터 더비 첫 골을 기록합니다! 런던의 왕이었던 제퍼슨 리가, 맨체스터의 새로운 정복자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번 시즌 맨유는 리그 최소 실점팀입니다만, 그것 제퍼슨이 없었을 때 이야기죠! 제퍼슨 리! 그간 맨유 상대로 리그에서 통산 38골을 기록했습니다! 올드 트래포드의 정복자! 제퍼슨 리! 맨유에겐 정말로 끔찍한 스트라이커입니다! 시끄러운 이웃집에, 가장 무서워하는 괴물이 이사 왔군요!]
[북미에서 온 팬들과 한국,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팬들이 맨체스터 현지팬들과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르네요! LEE Will, LEE Will Kill you! 퀸의 콘서트가 런던이 아닌 맨체스터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콘서트의 주연은 제퍼슨 리 입니다!]
***
축구로 얘기를 나눌 때 정신력이 중요하다는 의견은 늘 존재한다.
승리에 대한 갈망과 열정.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동기 부여.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양 팀이 비슷하다.
수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노리는 맨유.
리그 챔피언을 포기하지 않은 맨시티.
양 팀의 정신력은 비슷하다.
여기서 누가 경기를 안일한 맘으로 뛰겠어?
결국, 이런 경기를 결정짓는 건 한 방이다.
상대의 콧등을 박살 내 버리는 강력한 한 방.
그 한 방이 뭐냐고?
"Fuck! 제프! 왜 맨시티로 간 거야?"
로드릭이 씩씩댔다.
이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한 손에 꼽는 센터백.
"미안해, 로드릭. 오늘 골을 좀 많이 넣어야 해서. 미리 사과할게."
"젠장. 왜 그딴 끔찍한 소리를 지껄여? 내가 이번에도 뚫릴 것 같아?"
로드릭은 좋은 수비수지만 얼굴에 심리가 드러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고등학생부터 친구로 지내왔기에, 미세한 표정 변화도 눈에 읽힌다.
그러니까, 지금 기선제압에 제대로 성공했다.
뭐 아무튼.
"포메이션 유지해!"
"포덴! 제퍼슨의 움직임에 집중해!"
"마샬이 튀어나오잖아! 무릎을 굽히면서 슈팅 각을 막으라고!"
분위기는 우리에게 넘어왔다.
맨시티는 분명 훌륭한 팀이다.
우선 중원 구성이 사기적이었다.
로드리가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지키고, 그 위에서 케빈 데 브라이너라는 천재와 포텐이 터진 필 포든이 자리한다.
둘의 패스는 무서울 정도로 짧고 정확했고 완벽했다.
과르디올라의 변태적인 반복 훈련으로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면, 중원에서 우리는 맨유를 압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축구가 언제 예상대로 흘러가나.
음투쿠지.
올드 트래포드의 괴물이라고 불리며 반 다이크와 더불어 유일하게 몸싸움으로 나에게 쉽게 밀리지 않는 선수.
엄청난 떡대가 중앙에서 날뛰며 힘으로 우리 선수들을 패대기쳤다.
마치 들소처럼 맹렬하게 우리 선수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데 브라이너는 꿋꿋이 패스를 측면으로 내보냈다.
좌우 측면의 베르나르드 실바와 스털링이 미친 듯이 뛰며 헤집는다.
맨유의 두 줄 수비가 강력하다고 한들, '크랙'이나 다름없는 두 선수가 집요하게 측면을 파헤치는데 버틸 요량이 없다.
뻐엉!
왼쪽 측면을 파고든 베르나르드 실바는 아주 부드럽게 측면 수비를 털어버렸다.
루크쇼가 급히 차단하려고 발을 들었지만, 실바는 한 번 더 페이크를 넣어 제친 뒤에 크로스를 올렸다.
훅! 높게 치솟는 크로스가 박스로 향한다.
"실-바!"
패스에 미친놈들.
그게 바로 맨시티다.
그들은 크로스마저 패스처럼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하는 걸 즐긴다.
내가 원하는 지점. 내가 가리키는 방향.
자로 잰 듯이 정확히 떨어지는 궤적.
"후웁!"
그 순간 로드릭이 먼저 자리를 선점했다.
과연 로드릭도 대단하다. 순간적으로 빈 공간을 커버한다.
그뿐인가.
뒤에선 어느새 코뿔소처럼 맹렬하게 달려온 음투쿠지가 등을 짓누른다. 압도적인 힘이다. 펄떡거리는 근육이 느껴진다.
앞에선 로드릭이 막고, 뒤에선 음투쿠지가.
"끄응!"
숨이 턱 막힌다. 쉽진 않다.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사실 회복력이 놀랍다고 해도, 부상 전의 나는 정말 '절정'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몸 상태는 아쉽다. 이제 한 80%?
그 때문에 지금 음투쿠지와 로드릭의 압박을 버티는 게 쉽지 않다.
둘은 노련했다.
오로지 힘과 압박감으로 날 짓눌렀다. 피케이를 피할 속셈. 더구나 박스 안이라 VAR이 철저하다. 내가 은근슬쩍 넘어지기에도 쉽진 않다.
그러면 뭐.
"······!"
그냥 포기하면 되지.
내가 몸에 힘을 짝 빼고 빙그르르 돌아 빠져나가자.
음투쿠지와 로드릭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공을 포기하는 것.
그러나 음투쿠지는 내 등 뒤에 있어서 공을 소유할 수 없다.
로드릭만이 급히 떨어지는 공을 헤더로 걷어 내려는 순간.
내가 빠져나가는 척하면서 그의 상체를 지그시 밀었다.
"······제프!"
이 악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로드릭이 독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 보며 휘청거렸다.
음.
친구 사이가 멀어지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밀어 중심을 잃은 탓에, 공은 로드릭의 이마에 튕겨 애매하게 걷어졌다.
어설픈 클리어링.
그리고 그 공이 떨어지는 공간엔 어느새 라힘 스털링이 튀어나왔다.
이거다!
맨시티는 언제든 우승을 할 저력을 가진 팀.
비단 내가 아니어도,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가 존재한다.
뻐어엉!
떨어지는 공을 때리는 호쾌한 발리슈팅.
하나 데헤아의 긴 팔이 쭉 뻗어져 공을 튕겨 냈다. 맨유 팬들의 환호와 맨시티팬들의 탄식이 겹쳐지는 순간.
두 팀 팬의 반응은 뒤집혔다.
튕겨 나온 공은.
"제-퍼-슨!"
내게 왔다.
어쩌면 이건 집중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음투쿠지는 갑자기 내가 몸을 빼는 바람에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로드릭은 어설픈 클리어링 이후에 날 시야에서 놓쳤으며. 데헤아도 슈퍼세이브 이후에 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나만이.
공을 향해 움직였다.
조금 늦은 반응 속도였지만, 충분하다.
디딤발을 굳게 내디디고, 반댓발로 정확하게 임팩트를 준다.
투웃!
낮고, 빠르고 정확하게.
슈팅의 3박자가 완벽하게 어울려지면.
꼭 이런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LEE Will, LEE Will Fuck you!"
2대 0.
아직 멀었다.
***
제퍼슨 리의 폭발적인 득점력에 당황한 건 맨유 벤치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런던에서 토트넘과 더비전을 펼치고 있는 첼시의 벤치도 얼굴이 거무룩해졌다.
"만일 맨시티가 두 골을 넣어 4대 0으로 이기면?"
"그래도 우리가 상대 전적 우세로 우승입니다."
"5대 0이 된다면?"
"······저희가 어떻게든 골을 넣어 토트넘과 무승부 이상을 얻어내야죠."
"어처구니가 없군."
시즌 내내 1위를 지켜왔다.
겨울 이적 시장 기간에 조금 흔들려 삐끗하긴 했지만,
첼시는 여전히 강력한 우승팀이었다.
한데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탈락한 이후.
팀이 크게 흔들렸다.
베테랑인 안첼로티 감독도 이 상황이 답답했다. 구단 내외적으로 잡음이 끊이질 않고, 팬들도 돌아서는 지금. 선수들 내부에는 알게 모르게 우승에 대한 열망이 식은 상태였다.
사실 아무리 강력한 팀이어도, 계속 우승을 하면 동기 부여가 사라진다.
지금껏 첼시가 압도적인 팀이었던 이유는 의외로 선수들을 잘 다독인 필마르크 감독과 제퍼슨 리라는 핵심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둘 다 없다.
안첼로티가 아무리 덕장이라고 해도, 선수들 간에 유대감을 쌓는 시간조차 부족한테 어찌하랴!
"맨유가 우릴 도와주질 않는군요."
코치 중 누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안첼로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승은 우리 손으로 쟁취해야 한다! 당장 토트넘 상대로 골만 넣으면 끝이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첼시의 분위기가 엉망으로 치달을 때.
펩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세 골. 세 골이라.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야."
단순히 승리만 거둬선 안 된다.
5점 차 이상 승리를 거둬야 한다. 이것마저도 토트넘이 첼시를 이기지 못하면 소용없다.
다행히도 지금 흐름은 좋다.
펩은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한 채 전술 지시를 쏟아 냈다.
"좀 더 긴밀하게 움직여! 고개를 계속 돌려서 위치를 파악하라고! 자유롭게 돌파를 하더라도, 동료들 위치는 끝까지 확인해!"
드레싱룸은 거친 숨소리만 들을 정도로 조용했다.
과르디올라는 끊임없이 지시를 쏟아 냈고, 제퍼슨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제프!"
"네."
"아직 만족할 수 없다!"
전반전 두 골이나 몰아친 선수가 듣기에는 다소 섭섭할 수도 있는 발언.
그러나 제퍼슨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제가 잘되는 팀의 원인을 분석해 본 적이 있는데 왜인지 아세요?"
"원인?"
"감독하고 선수의 마음이 일치할 때 팀이 잘되더라고요."
제퍼슨의 말에 진지했던 과르디올라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숨 막히던 라커룸에 긴장감이 순간 확 풀렸다.
"저도 아직 만족 못 해요."
살짝 웃음기 어린 목소리.
동료 선수들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세상에. 라이벌인 맨유가 불쌍해지는 날이 오는군.'
***
필드에 다시 들어서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당당하게 다섯 골이라고 말해도,
그건 쉬운 숫자가 아니다.
하물며 더비전에서는 더 그렇다.
경기장의 분위기나 압박감, 그런 것들은 둘째치고도, 다섯 골이란 스코어는 '운'이 따라줘야 한다.
지금까지는 운이 따라줬다.
하지만 앞으로 후반전 동안 세 골을 몰아칠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면,
확신은 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부상 전 몸이었다면?
3연속 챔피언스리그와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던 절정의 상태였다면?
난 내 무릎을 내려다 봤다.
부상 복귀 후.
이전의 플레이에서 내가 하지 못한 게 있다.
미친 듯이 내달리는 질주.
대각선으로 치고 빠져나가는 고스트 스텝.
전후좌우로 꺾고 또 꺾는 아크로바틱한 무빙.
이상하게도 복귀 후에 이런 움직임을 하지 못한다.
나는 오로지 기술적이고, 감각적으로 골을 넣고 있다.
내 절대적인 장점 일부를 숨겨 둔 채.
'우습네. 아직도 트라우마라니.'
1년을 내다 버린 장기 부상.
겉으론 걱정 없는 척해도, 어쩌면 속으로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부상이 재발할까 봐.
이학현으로 살던 그 지독한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구나.
우스운 이야기다.
투욱!
공이 날아온다.
조금은 멀리. 길게.
슬쩍 고개를 돌려 데 브라이너의 표정을 바라봤다.
'달려라!'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길게 찔러지는 패스.
상대 수비수가 먼저 뛰고 있는 상황.
일반적이라면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나라면······ 잡을 수 있다.
뜨드득!
발끝에서부터 발목, 종아리, 무릎, 허벅지의 근육이 출렁인다.
성큼,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주위의 공간이 마치 접어지는 것처럼 압축된다.
"-----!"
선수들의 외침과 관중들의 함성이 아스라이 사라진다.
질주, 질주, 질주, 또 질주.
미친 듯이 내달리며 오로지 공만 노려본다.
순식간에 공의 크기가 확대되고, 앞을 막던 선수 옆을 빙 돌아 빠져나가며, 잡는다.
투웃!
그대로 공을 길게 차 내며 쭉쭉 내달린다.
"#$#$@@!#@@!!"
알 수 없는 괴성.
앞을 막아서는 수비수.
투욱.
대각선으로 치고 빠져나가면서, 곧바로 오른쪽으로 직각에 가깝게 꺾는다.
시야에 담겼던 수비수들이 일제히 사라진다. 모두 허우적거리며 넘어졌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내달리고, 꺾고, 또 꺾으며 공간을 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임스 로드릭이 날 보며 달려오는 순간.
스피드를 전혀 죽이지 않고 내달렸다.
툿!
로드릭의 발끝이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공을 툭 찍어 머리 위로 넘겼다.
동시에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우스운 일이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내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은.
몸이 하늘을 날았다.
주위에 경악한 시선들이 보인다. 상대팀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다.'
맞다.
날았다. 하늘을 날았고, 빙그르르 몸을 굽혀 돌았고, 입을 다문 관중들을 바라보며.
착지했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다시 뛰었다.
데 헤아가 멈칫거리며 튀어나오다가 급히 뒤로 물러서는 순간.
투욱!
공을 찍어 차는 로빙슛이 그의 머리를 넘겨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트라우마라.
"Waaaaaaaaaaaaaaaaaaaaaa!"
이젠 그딴 건 없다.
< 외전 14. 잔인한 시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