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3. 잔인한 시즌 (2) >
뉴 베럴라의 말이 끝나고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보기 급급했다.
모두 뉴 베럴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망과 분석력을 지녔다는 분석팀에선 어때서 한 마디도 없지?"
베럴라 감독은 분명 훌륭한 감독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바로 남미 출신 감독이라는 점.
그게 왜 약점이 되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영국, 아니 유럽에선 약점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제퍼슨 무서운지 모르지.'
'브라질 리그의 무리뉴? 개소리야. 제퍼슨 없는 브라질 리그가 무슨 소용인데?'
바로 제퍼슨을 모른다는 점이다.
아니, 알긴 안다.
발롱도르 3년 연속, FIFA 올해의 선수 3년 연속 수상자를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체감하는 정도가 달랐다.
뉴 베럴라는 브라질 리그의 황태자였다.
'실리 축구'로 남미를 정복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 그랜드 감독의 후임으로 맨유에 왔다.
즉.
'제퍼슨을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제퍼슨의 막을 방법?
'그게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못 막았겠어?'
회의장엔 다 그런 생각이 흘렀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이 자리는 다음 경기를 위해 준비한 자리.
무조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전력 분석 팀장이 침중한 얼굴로 나섰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제퍼슨을 막을 비책을 구하라고 한다면,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를 막을 비책은 적어도 현재 축구계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뉴 베럴라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대놓고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력 분석관은 감독의 반응에도 멈추지 않고, 눈을 꾹 감고 말했다.
"수년간 논의된 게 바로 타도 제퍼슨입니다. 맨유뿐만 아니라, 당시 맨시티티, 토트넘, 아스날 모든 클럽이 그를 막으려고 했죠. 아니,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PSG 등 유럽의 빅클럽이 오랫동안 논의했습니다. 정답은, 전혀 없습니다!"
뉴 베럴라는 회의장에 모인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이내 황당한 헛웃음이 입가로 흘러나왔다.
모두가 저 황당한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게 우리 코칭스태프의 의견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실망인데!"
"감독님! 유럽의 내로라하는 코치진을 모아서 물어봐도 답변은 똑같을 겁니다! 제퍼슨을 막을 방법을 가지고 오라고하면, 못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챔피언스리그를 포기하자는 건가?"
당연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명가의 몰락.
현재 맨유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명가 재건을 위해선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필수였다.
이번 시즌을 또 놓친다면, 언제 기약할지 모른다.
축구란 그런 것이니까.
전력 분석관은 조용히 말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챔피언스리그에 가는 방법을 구해 오겠습니다!"
확실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
한데 뉴 베럴라는 말에 담긴 묘한 속뜻을 눈치챘다.
"제퍼슨을 막을 비책이 아니라 챔스에 가는 방법이라······."
결국, 끝까지 제퍼슨을 막을 수 있다고는 않는 것이다.
하나 뉴 베럴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긴, 자기 같아도 메시와 호날두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를 막으라고 한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리라.
물론 현재 코치진의 반응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 대단한 메시도 무득점 경기가 수없이 많았지. 최악의 평점을 기록한 경기도 있었어. 이번 마지막 라운드가, 그런 경기가 될 수도 있잖아?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지!'
물론, 뉴 베럴라는 아직 제퍼슨을 몰랐다.
***
맨시티의 최근 행보는 물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았다.
"이벤트에 당첨된 미국인들에게 리그 티켓과 숙박, 항공권을 지원해 줍니다!"
맨시티는 안 그래도 미국이란 거대한 시장을 탐내고 있었다.
자매 그룹인 뉴욕 시티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팬층을 넓히고 마케팅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거의 국민 구단에 가까운 첼시가 있었으니까.
비단 나뿐만 아니라 산티아고, 풀리시치, 웨스턴 맥케니까지.
미국 국대 4명이 뛰는 팀은,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인기를 구사했다.
미국이란 대형 시장을 첼시 혼자 독점한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맨시티로 왔다.
"지금이 기회다!"
"당장 미국 마케팅 진행해!"
"무조건 퍼 줘! 티켓이든, 항공료든, 숙박비든 무조건!"
"그러면 돈이 많이 듭니다!"
"돈? 돈? 돈? 돈? 우리 구단 앞에서 돈 얘기는 꺼내지도 마!"
마케팅팀의 엄청난 노력으로, 맨시티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큰 화제가 됐다.
덕택에 맨체스터로 오는 미국인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장 역시 공략했다.
당장 맨체스터 거리에 나가면 한국인과 미국인이 가장 많고, 일본인과 중국인도 심심찮게 보였다.
아무튼, 맨시티는 맨유전을 대비한 철저한 훈련에 돌입했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훈련이 여유로워졌다는 걸 의미하지 않았다.
내가 맨시티로 와서 놀란 점이 하나 있다.
그건 철저하다 못해 소름 돋을 정도로 디테일한 전술 지시다.
"넌 더 전진해. 그러면 3선이 슬그머니 올라올 거야. 그 간격의 사이가 10m 안팎으로 줄어들면 스피드를 터뜨려야 해. 알겠어? 10m야. 11m다? 안 돼. 알겠어?"
"스톤스, 마샬이 슈팅을 못 하게 막아야 해. 발끝을 끝까지 봐. 데 브라이너. 패스는 가볍게. 롱패스는 최대한 자제해. 짧은 패스로 공간을 만들라고."
빽빽하다 못해 디테일한 전술.
과르디올라는 숫제 미친 것 같았다.
훈련에서 자신의 지시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아무리 좋은 플레이로 골을 넣어도, 그것이 자신의 지시를 벗어난 것이라면 벌게진 얼굴로 화를 냈다.
"너희들이 제퍼슨이 아니면 닥치고 내 말 들어!"
좀 신기했다.
필마르크 감독은 저렇게까지 디테일한 지시는 안 했으니까.
그냥 선수들 믿고, 너희들 마음껏 날뛰어봐라.
이런 느낌이었거든.
반면 과르디올라는 마치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선수들을 완전히 통제하려고 했다.
자신의 머릿속 움직임대로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그래야만 전술이 완성된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긴장했다.
워낙 내 맘대로 뛰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저렇게 꽉 쪼인 지시를 잘 따를 수 있을까.
물론,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제프!"
"네?"
"닥치고 골만 넣어! 다섯 골 이상이다!"
"······디테일한 지시는요?"
"응? 자네는 제프잖아?"
"······."
"내가 디테일하게 지시해서 오히려 선수의 플레이를 갉아먹는 경우가 몇 번 있었지. 이니에스타, 사비, 그리고 리오넬 메시."
과르디올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좀, 부담스럽게.
"하고 싶은 대로, 스스로 경기 흐름에 따라 움직일 때가 가장 위협적이지. 적어도 내가 지금껏 적으로 만난 제프는 그랬지. 안 그래?"
"음. 네. 맞아요."
"아, 하나만 지시하지."
과르디올라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맨유 놈들이 근 4년 동안 우리를 상대로 전적이 좋아. 엄청나게 으스대더라고."
"그래서요?"
"다, 죽여 버려."
필마르크가 스트라이커에 미친 감독이라면.
과르디올라는 그러니까 음······.
그냥 미친 감독이었다.
그러면 뭐, 나도 미친놈처럼 말해 봐야지.
"제가 지금까지 맨유에 넣은 골이 몇 골인 줄 아세요?"
"······글쎄?"
"저도 안 세어 봐서 모르겠는데. 한 경기에 6골을 넣은 적이 있긴 해요."
과르디올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압도적인 승리.
다득점 승리다.
그래야만 끝까지 우승을 노릴 수 있으니까.
물론 토트넘이 도와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좋아, 제프. 박살 내 보라고!"
***
맨시티와 맨유의 맨체스터 더비.
이번 시즌을 포함한 맞대결에서 상대 전적은 맨유가 우세를 지키고 있었다.
최근 4년간 8번 겨뤄서 맨유가 4승 2무 2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4승 모두 올드 트래퍼드, 홈에서 기록한 숫자다.
맨유가 아무리 성적이 좋지 않아도, 맨체스터 더비에서만큼은 저력을 발휘했다.
맨유는 승리하면 리그 4위로 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면 수년 만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다.
맨시티는 확률적으로 보면 최악이다.
무조건 5점 차 이상으로 승리해야 하고, 그것도 첼시가 토트넘에게 패배했을 때의 가정이다.
아주 중요한 경기.
이미 몇몇 팬들은 우승 가능성을 포기했지만,
10년 가까이 리그 우승을 놓친 맨시티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올드 트래퍼드로 향했다.
[시끄러운 이웃이 이제는 너희 집을 털 거다!]
[SkyBlue! Real Blue!]
[Jeffrson's BOMB! 올드 트래퍼드 상공에 투하 예정!]
맨시티 팬들은 올드 트래포드에 긴장된 얼굴로 입성했다.
비록 우승 확률은 희박하더라도,
그 희박한 확률을 터뜨려 줄 수 있는 제퍼슨이 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보여 준 화려한 모습.
맨시티 팬들로서는 그토록 원하던 우승에 한 발짝 다가간 느낌이었다.
수년간 돈을 쓰고도 제대로 된 우승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기간.
그간 팬들은 우승에 목말랐다.
지금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엄청난 흥분이 맨시티 팬들 사이에 흘렀다.
"리그 우승! 우승을 위해!"
"우리의 친구들 토트넘이 첼시를 잡아 줄 거야!"
"맨유를 박살 내자고 친구들!"
맨체스터 더비의 격렬함.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걸려 있는 양 팀의 간절함.
많은 이목이 쏠리는 만큼, 맨체스터의 경찰들도 출동해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평소의 영국 날씨와는 다르게, 햇빛이 짱짱한 화창한 날씨.
"LEE Will, LEE Will Kill you!"
맨시티와 맨유의 맨체스터 더비가 시작됐다.
***
경기 시작 10분쯤이 지났을 때.
벤치가 시끄러웠다. 어수선한 분위기. 벤치뿐만 아니라 맨시티 원정팬들이 모인곳도 시끄러워졌다.
코치 중 누군가 주먹을 크게 들어 올리고 빙빙 돌렸다.
우리끼리 약속한 신호다.
'토트넘이 골을 넣었다!'
그 신호가 필드에 전달되는 순간.
선수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우승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일단 성립됐다.
순간 엄청나게 의욕이 고취됐다.
10분 동안 선수들은 긴장했다. 의욕은 있었지만 잔실수가 번번이 나왔다. 맨유는 강력한 전방 압박과 두 줄 수비로 우리를 철저하게 괴롭혔다. 실수를 유발했다.
하지만 토트넘의 골 신호가 전해진 이후, 우리는 한결 편해졌다.
"Yeaaaaaaaaaaaaaaa!"
거대하고도, 시끄러운 함성.
엄청난 위압감과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필드에서 발을 무겁게 한다.
엄청난 경기. 큰 경기.
기복이 없는 선수도 큰 경기의 긴장 때문에 평소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 선수가 있다. 한때 나도 그랬지.
지금은 물론 아니다.
월드컵 결승까지 경험했는데, 이깟 압박감이 무서우랴.
선수들끼리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경기장은 먹먹했다.
말로 소통이 어려울 땐, 믿을 건 훈련에서 익혀 온 움직임이다.
과르디올라의 변태 같은 철저한 전술 지시는 여기서 빛을 발했다.
로드리는 원볼란치로 나와 철저한 차단과 짧은 패스만 했다.
무조건 데 브라이너와 필 포덴에게 공을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스털링은 집요하게 측면을 공략했다.
데브라이너는 드리블과 패스를 반복하면 공간을 창출했다.
필 포덴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선수의 포메이션을 파괴했다.
훈련장에서 새겨지고 새겨진 움직임이 기계처럼 반복되면서, 우리는 천천히 과르디올라의 설계대로 움직였다.
각자가 지시된 내용을 철저하게 수행하면서 흐름을 만들어 가는 운영.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공 줘!"
데 브라이너에게 공이 도달했다.
필 포덴이 선수 두 명의 시선을 빼앗으며 움직이는 순간. 나는 소리치면서 달렸다.
맨유 선수들의 얼굴에 서린 당혹감이 똑똑히 보였다.
순간적으로 전진하려던 맨유의 두 줄 소비가 흐트러지고, 공간으로 데 브라이너의 로빙 스루패스가 향할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
툿!
한 발짝, 두 발짝,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며.
"개 같은!"
악마처럼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는 로드릭이 보였다.
로드릭은 온갖 욕을 해 대며 뛰어올랐다.
뭐, 어찌 됐건.
로드릭이 근래 핫한 수비수로 유명하건 말건.
데 브라이너의 패스는 기계처럼 정확했고, 깔끔했다.
그 말은.
투웅!
내가 원하는 위치에 공이 왔으며,
나는 그 공을 향해 뛰어올랐고, 같이 뛰어오른 친구 로드릭을 날려 버렸다는 의미였다.
빠악!
로드릭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가 떨어는 소리를 들으며, 이마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골대 뒤.
입을 틀어막고 머리를 쥐어뜯는 맨유 팬들과.
멍하니 서서 골문 구석에 구르고 있는 골키퍼가 보였다.
너무나 쉽게 터진 골.
단 한 번의 패스에 이은 헤더 골에 맨시티 팬들도 반박자 늦게 반응했다.
"LEE Will, LEE Will Fuck you!"
자.
이제 네 골 남았나?
< 외전 13. 잔인한 시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