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2. 잔인한 시즌 (1) >
날이 갈수록 첼시에 대한 팬심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여론은 런던에서뿐만 아니라 대서양 너머 북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북미는 오히려 더했다.
런던에서의 분노가 제퍼슨을 팽한 구단주. 바뀌어 버린 구단의 모습에 대한 실망이었다면.
북미에서는 간단했다.
"우리 영웅 제프를 괴롭혔다고?"
"어떤 개자식이야! 누가 우리 제프에게 샷건을 쐈어!"
"제프가 가장 힘들 때 내쳤다고?"
단지 제퍼슨이라는 이유뿐이었다.
미국에서 제퍼슨의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단순한 스포츠 스타가 아니다.
월드컵 우승이라는 기적.
매번 재치있는 인터뷰,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플레이. 축구 내적으로 이미 완벽한 스타였다.
물론 이런 스타라면, 당연히 안티가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제퍼슨은 다른 스포츠 스타보다 덜했다.
제퍼슨은 월드컵 이후로 기부를 쭉 해 오고 있었다.
미국 유소년 축구와 장애인 스포츠 선수들을 위한 기부였다.
미국에선 부자들이 기부하는 건 거의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로 받아들여 진다. 제퍼슨도 벌어들이는 수입이 천문학적으로 많아지자 이 같은 선택을 했다.
어찌 됐든 이런 이유로 제퍼슨의 이미지는 미국에선 시대의 영웅처럼 '고결한 존재'로 만들어졌다.
생각해 보라.
"아시아계 캡틴 아메리카!"
캡틴 아메리카.
단순한 히어로 캐릭터가 아니다. 코스튬이나, 방패 등 미국을 상징하는 모든 요소가 가미된 캐릭터다.
오죽하면 캡틴 아메리카하면, 제퍼슨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아질 정도니까.
성조기라는 상징을 아시아계 스포츠 선수에게 새겨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제퍼슨이 어떤 존재인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제퍼슨을 내친 구단. 첼시를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만들어준 제퍼슨을 배신한 '배신자'.
첼시 구단주의 만행이 밝혀지면서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뭐? 우리가 그 작자하고 사업하고 있다고?"
"그 이번 들어오는 철강이 그 인도인 구단주 사업체 중 하나랍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고 주주들이 뭐라는 거야?"
"여기저기서 파헤치고 있답니다."
"허!"
"어떡할까요?"
"음. 꼭 거기하고만 거래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그건, 아닙니다. 가격이 좀 더 싸서 이쪽으로 입찰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 다음 계약은 다른데 알아봐."
"그래도······ 될까요?"
"뭐가 문제야? 이것도 다 경쟁인데."
이렇게 인도인 구단주의 사업체와 연결된 미국 기업들이 조용히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구단주에게 치명적이었다.
"도대체 고작 축구 따위에 사업을 망쳐? 개같은 양키 새끼들!"
첼시가 망하는 것?
그게 무슨 상관이랴!
구단주는 상황이 나빠지면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구단을 떠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사업체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그 사업이 실패했으면 포기하는 게 맞지 않는가.
한데 이젠 첼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문제였다.
비단 첼시뿐 아니라 수많은 사업체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후우!"
상황이 여기까지 치닫자 구단주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제퍼슨 리에게 내가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전해 주게."
***
"모르는 전화번호는 안 받는 주의여서요."
"······가끔 제프는 저보다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데.
일을 이렇게까지 한 건 본인이면서.
사실 이젠 제크 팀장도, 나도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은, 솔직히 나와 제크 팀장이 예상한 것보다 더 과격했으니까.
그것 때문에 구단주가 백기를 들었겠지.
그렇다고 해도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재계약 협상 땐 얼굴 한 번, 전화 한 번 못 해 본 사이인데, 뭐가 좋다고 지금 전화를 받겠나.
또 사과를 받아 준다고 해도, 이젠 내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내가 사과받고, 이제 그만하십쇼! 하고 말해 봤자 후원사들이 '아 그런가요? 죄송했습니다!'하고 물러서겠는가.
한창 화가 난 미국의 마초들이 순순히 말 듣겠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까 이젠 첼시와 구단주에 대한 생각은 할 필요 없다. 난 부상에서 복귀했고, 지금은 시즌 중이다. 축구선수가 뭘 더 생각해야하나.
"훈련만 해야죠."
맨시티의 목표는 챔스와 리그 우승이다.
이중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챔피언스리그는 결승전에서 PSG와 만나고, 리그는 이제 마지막 라운드만 남았다.
첼시가 88점으로 1위.
맨시티가 85점으로 2위다.
승점 3점 차이.
마지막 라운드에 따라 우승팀이 바뀔 수도 있다.
물론 첼시는 무승부로 승점 1점만 따내도 우승하는 유리한 위치다.
그에 반해 맨시티는 무조건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우리에게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첼시는 토트넘을 만나고, 우리는 맨체스터 더비다!"
둘 다 만만치 않은 팀을 만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첼시가 유리하다.
첼시는 홈경기, 우리는 원정이다.
또 첼시는 최근 6년 동안 토트넘에게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에 반해 맨유와 맨시티는 리그 2위와 7위라는 차이가 있지만, 상대 전적은 비슷하다.
맨체스터 더비라는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무조건 승리해야 하고, 첼시는 무조건 져야 하는 상황.
거기에 득실차까지 따져야 한다.
득실차는 첼시가 5점 앞선다.
첼시가 최소 1대 0으로 패배하면, 우리가 맨유를 상대로 5점차 승리를 거둬야 한다.
자력우승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
우선 우리가 압도적으로 맨유 상대로 이기고, 토트넘이 이겨 주길 바라야 한다.
뭐.
별수 없지.
일단 이기고 나서 계산하는 게 속 편하다.
"아. 그리고 가족분들 호텔하고 항공권, 결승전 티켓과 리그 마지막 라운드 티켓도 다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이미 맨시티 구단에서 준비했더라고요."
"그래요? 이렇게 빨리요?"
"그래야죠. 괜히 밉보였다간 구단이 망할 수도 있는데."
"······."
싱글벙글 웃는 제크 팀장.
사실 제크 팀장은 요즘 노났다고 봐도 된다.
그간의 사건을 지켜본 선수들이 에이전시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에이전시의 모습.
가만히 있어도 제크 팀장과 계약하길 바라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당장 맨시티만 해도 데 브라이너가 최근 계약했다.
어느새 제크 팀장은 유럽계의 슈퍼 에이전트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 인물들은 이제 하나같이 거물이 되어 있네.
제크부터······.
***
디 파코는 제퍼슨이 부상 복귀를 앞둔 시점에 PSG로 돌아갔다.
"디 파코! 이 개자식아!"
휴가를 끝내고 PSG 구단에 복귀한 수석 피지컬 트레이너 디 파코는 태연했다.
단장이 달려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지만, 디 파코는 특유의 능글거림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휴가 복귀한 부하 직원한테 왜 욕입니까?"
"이 자식아! 휴가를 보내 줬지! 누가 제퍼슨 재활 도와주러 가랬어!"
"휴가 때 직원이 뭘 하는지도 보고해야 합니까?"
"아니, 이 자식아. 그게 아니잖냐!"
단장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때렸다.
"어! 임마! 네가 인마! 제퍼슨! 재활! 시켜서! 어! 잘못하면 결승전에서 만날 수도 있다고!"
"에이. 설마요. 첼시가 얼마나 강팀인데."
"설마? 설마? 제퍼슨은 설마 했던 월드컵 우승을 만들었는데? 설마? 이 호로자식이!"
"어허! 그만하십쇼! 이러면 저 사표 씁니다?"
"······!"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상사는 단장이었지만, 오히려 뻔뻔한 건 디 파코였다.
더 이상한 건 디 파코의 배짱에도 단장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아이고야! 내가 너 같은 놈을 왜 데리고 와서!"
"어허. 왜 데리고 오다뇨. 저 오고 나서 선수들 부상률 팍 줄어들었잖아요?"
"그래. 그래. 그게 문제다!"
단장은 소리를 빽 질렀다.
아무리 화를 내도 디 파코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저 웃음만 보면 화가 불쑥 올라온다.
하지만 어쩌랴. 디 파코는 PSG 선수단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거물 트레이너였다.
친화력 좋은 성격으로 선수들과 친할뿐더러, 실력이 너무 좋다. 선수들이 그에게 엄청나게 의지한다.
괜히 디 파코가 사표 쓴다고 협박하는 게 아니다.
단장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휴우. 그래, 제퍼슨은 완전히 회복했냐?"
"이제 경기엔 뛸 수 있죠."
"네가 무슨 짓을 한지 알아?"
"세계 최고 선수의 복귀에 힘쓴 것?"
"아니지! 우리를 엿 먹일지도 모르는 괴물을 회복시켜 준 거라고!"
이 시점에선 PSG는 챔피언스리그 4강을 앞뒀다.
상대는 FC 포르투.
최고의 매치업이었고, 결승 진출이 유력했다.
한데 결승전에서 제퍼슨을 만나게 된다면?
디 파코가 그런 제퍼슨을 회복시켜 준 거라면?
그게 비수가 되어 날아온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이번 시즌 제퍼슨이 챔피언스리그에 나오지 않는다면, 우승의 적기였단 말이다!"
제퍼슨을 챔스에서 만난 게 무려 세 번이다.
그리고 그 세 번 동안 파리는 유럽 챔피언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하물며 그 제퍼슨을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니, 아니지. 첼시에 제퍼슨이 없다고 해도 약팀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 첼시가 맨시티를 잡고 올라오면 되지."
"흐흥. 그렇죠, 뭐."
"콧노래 부르지 마! 인마! 하여간······아무튼 제퍼슨 몸 상태는 어때? 부상 전하고 비교하면?"
그 말에 디 파코는 눈동자를 굴렸다.
"한, 60점 정도요?"
"60점?"
단장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절정의 몸 상태를 자랑하는 제퍼슨은 무섭다 못해 끔찍한 상태다.
그러나 부상 복귀, 아직 몸이 덜 올라온 60점 정도라면······.
"휴우. 첼시가 이겨 주길 바라야겠군. 제퍼슨 없는 첼시가 제퍼슨 있는 맨시티보단 낫잖아?"
그렇게 자위하며 단장은 디 파코를 놓아줬다.
물론, 디 파코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디파코 이 개자식아! 뭐? 60점? 60저어어어엄?! 60점으로 3골 1어시스트를 때려 박아 버리는 선수가 어디 있냐고오!"
***
디 파코가 부자 구단 PSG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면,
율리아겐은 여전히 제퍼슨 곁에 있으면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교수님, 이런 트레이닝 방식이 효과가 있을까요?"
제퍼슨이 맨시티에 올 때.
환호를 터뜨린 사람 중에 바로 피지컬 트레이너와 팀닥터들도 존재했다.
"제퍼슨의 괴물 피지컬을 완성해 준 남자!"
"월드컵 다큐 봤냐고? 거기서 나온 트레이닝 방식 봤어?"
"난 데이터를 그렇게 분석해서 트레이닝하는 건 처음 봤다고!"
"심지어 그 재활 장비를 훈련에 쓰는 것도 처음 봤어!"
"천재야!"
"그동안 제퍼슨이 부상으로 경기를 쉰 적이 거의 없었던 걸 생각해 봐!"
"만일 호나우두에게 율리아겐이 있었다면, 축구 역사가 바뀌었을걸?"
피지컬 쪽에선 거의 마이다스의 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율리아겐.
"제퍼슨의 개인 트레이너라서 훈련장에 오면 안 된다고요?"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우리가 바짓가랑이 잡아서라도 매달려야 하는 판인데!"
"어떻게든 모셔서 조금이라도 조언을 들어야만 합니다!"
개인 트레이너가 있는 선수들은 많다.
하나 팀 훈련 때 훈련장에 트레이너를 데리고 오지는 못 한다.
팀에 이미 훌륭한 트레이너들이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막으려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팀의 트레이너들이 나서서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 결과 제퍼슨은 훈련 때마다 율리아겐을 대동했고,
좀 더 빠른 회복과 재활에 힘쓸 수 있었다.
제퍼슨의 주위 인물이 하나같이 거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정작 최고의 거물이 된 건 당연히도 제퍼슨이었다.
***
리그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회의장에 모인 맨유의 코칭스태프들은 모두 침묵했다.
"그러니까. 시끄러운 이웃을 만나는데, 그 이웃에 제퍼슨이란 무시무시한 놈이 입양되었단 이거지?"
"······."
"근데 알고 보니 입양된 자식이 이전부터 우리를 아주 잘 쥐어박던 깡패놈이라는 거고."
"음."
맨유의 새로운 감독, 뉴 베럴라 감독의 신랄한 평가에 코치진과 전력분석관들은 모두 침음만 흘렀다.
맨유는 변혁을 시작 중이다.
공격축구를 시도하던 그랜드 감독의 후임으로 온 뉴 베럴라 감독은, 지극히 실리를 추구하는 감독이다.
"공격? 재미있는 축구? 필요 없어! 명가의 몰락이야! 우리는 재미 따위 다 버리고, 오로지 결과만 잡는다!"
그렇게 나온 실리 축구.
나쁘게 표현하면 지극히 수비적인 축구.
공격 성향의 팀이 수비 축구로 바뀌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그 가운데에는 제임스 로드릭이 있었다.
"그랜드의 미친 공격 축구에서 혼자서 날고 기면서 악착같이 수비하던 제임스 로드릭이야. 그 녀석이 수비만 하는데, 수비가 뚫리겠어?"
실제로 맨유의 실점률은 리그 최소 실점에 가깝다.
물론 득점력이 빈곤해 리그 7위에 불과하지만.
현재 리그 4위, 챔피언스리그권과 불과 승점 2점 차이다.
즉 마지막 라운드에 따라 챔피언스 티켓을 쟁취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끄러운 이웃, 맨시티를 만났다.
맨시티는 분명 강팀이지만, 맨체스터 더비라는 특수성 때문에 맨유는 의외로 상대 전적에서 약간의 우세를 지녔다.
하물며 홈, 올드 트래포드에선 7대 3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제퍼슨의 맨시티라."
뉴 베럴라는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었다.
"자. 이제 한번 얘기해 보자고. 그 자식을 막을 방법을."
< 외전 12. 잔인한 시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