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41화 (241/258)

< 외전 10. 제프를 건드려? (2) >

런던만큼 스포츠 기자가 상주하는 도시는 없다.

런던이 연고지인 빅클럽은 한둘이 아니다.

중소클럽도 상당히 많다. 범위를 하위리그까지 확장하면, 런던은 '축구의 도시'라는 말이 어울린다. 오죽하면 세계 축구의 수도라고 불리겠는가.

"난리도 아니군."

"유럽 연합 탈퇴한다고 할 때보다 시위대가 더 많은 건 같은 건 착각인가?"

"무시무시한데."

"허 참."

기자들은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하나같이 파란 첼시 유니폼을 입은 어마어마한 인파.

그들은 피켓을 들고 과격하게 소리쳤다.

"제퍼슨을 다시 데리고 오라고!"

"빌어먹을 새끼! 제퍼슨에게 사과해!"

"진실을 밝혀라!"

살벌했다. 더 무서운 점은 훌리건의 시위가 아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족으로 이뤄진 무리들도 가득했다. 첼시 팬들이 다 뛰쳐나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퍼슨은 제퍼슨이군."

"생각해 봐. 제퍼슨을 안 팔았으면, 이번 4강전에 복귀해서 맨시티를 박살 냈을 거라고."

"크으. 참. 진짜 일 한번 곤란하게 됐네."

"어찌 될 것 같냐?"

"글쎄. 제퍼슨 쪽 반응 좀 봐야지. 첼시가 그래도 아직 1위고. 우승 차지하면 이 분위기도 좀 식을 테고."

"제퍼슨이 가만히 있으려나."

"잠깐!"

그때였다.

기자 중 한 명이 휴대폰에 온 메시지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퍼슨 리! 에이전트와 같이 선수 노조 협회 방문!"

"뭐?"

"선수 노조 협회?"

"선수가 노조 협회를 찾아간다면······."

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허공에서 기자들의 시선이 빠르게 얽혔다. 잠깐의 정적, 누가 먼저라도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미친! 기소다!"

"기소다!"

"당장 뛰어가!"

"특종이다!"

물론, 제퍼슨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

"확실히 전달했죠?"

"네. 기소 대상은 첼시 구단이 아니라, 구단주로 정확히 명시해 달라고 기자들에게 연락했습니다."

난 제크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내 차례다.

사실 그간 당하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다만 재활에 집중하기 위해 성급하게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3개월.

맨시티로 이적한 이후 제크 팀장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지금 순간을 준비해 왔다.

"지금이 적기죠.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 주면서 모든 의심을 불식시킨 지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폭로해야죠."

"네. 하지만 다시 말하다시피, 구단이 아니라 구단주가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거다.

첼시는 내가 좋아하는 팀이다.

내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첼시와 척을 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척지고 싶은 건 첼시가 아니라 구단주다. 구단이 욕을 먹겠지만, 웬만해선 피해가 안 가는 게 내 바람이다.

뭐, 제크 팀장이 잘 알아서 할 거다.

"협상장에서 그렇게 치욕을 느낀 적은 몇 번 없었죠. 저도 단단히 화가 난 상황이라서요."

이 양반도 화가 많이 났거든.

협상장에서 일방적으로 냉대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으리라.

하여간. 뭐.

이제 시작이다.

"이로써, 선수 노조 협회를 통해 구단주에 대한 기소가 접수됐습니다. 시작입니다. 제프!"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십쇼! 아주 잘근잘근 밟아서 인도로 도망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허참.

이 양반, 약간 광기가 좀 어린 것 같은데.

***

[제퍼슨 리, 첼시 구단주 기소]

[선수 노조 협회, 제퍼슨 리에게 부당 계약을 강요한 첼시 구단주를 성토하다.]

[재계약을 하려면 주급을 낮추라는 일방적인 의견만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제퍼슨 리의 에이전트, "제퍼슨은 구단주의 얼굴도 못 봤다. 구단주와 단장은 에이전시를 통해 일방적으로 주급 삭감을 요구했다."]

[익명의 첼시 관계자, "제퍼슨이 주급 상향을 요구한 적이 없다."]

[기존 구단의 발표와 다른 제퍼슨 리의 주장. 첼시 서포터즈, 구단주 사무실을 향해 돌을 던져.]

반응을 확인하던 제크 팀장이 소리쳤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

그간 유럽 지부는 몸집을 크게 불렸다.

제퍼슨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수가 고객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제퍼슨만을 담당하는 에이전시 직원들이 가장 많았다. 한데 이번에는 제퍼슨 담당만 바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유럽 지부 전체가 분주했다.

그들에게 제크 팀장의 일갈이 쏟아졌다.

"대형 신문! 스포츠 방송! 정규 방송! 국가별 대표 방송! 일간지! 주간지! 삼류 찌라시! 인터넷 찌라시든 기사든 뭐든! 다 이용해! 구단주가 제프에게 한 짓을 철저하게 까발리라고!"

굳이 제크 팀장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냄새를 맡은 기자들은 미친 듯이 취재에 나섰다.

제크 팀장은 한 번에 모든 정보를 풀지 않고 조금씩 풀었다.

"제퍼슨은 주급 상향을 요구한 적이 없다?"

"부상당한 직후 힘들어하는 제퍼슨에게 일방적으로 주금 삭감 요구?"

"구단주는 제퍼슨과 면담조차 한 적이 없다!"

"여론플레이를 펼쳐서 제퍼슨에게 부당한 계약에 사인하게끔 압박을 가한 것이나 다름없잖아?"

사건의 전말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시위는 갈수록 격해졌다.

여러 얘기가 나왔지만, 핵심은 이거였다.

"부당한 계약에 일방적으로 사인을 강요하다니!"

"구단주가 미쳤군! 제퍼슨에게?"

"그래 놓고 언론에서는 제퍼슨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것처럼 말한 거야? 재정 문제랑 보기 좋게 엮어서?"

안 그래도 제퍼슨이 복귀전에서 보여준 화려한 모습에 격해졌던 첼시 팬들이다.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구단주의 사무실이나 보드진의 사무실에 돌이 날아오는 건 흔한 일이고, 런던 경찰들이 출동까지 했다.

급해진 첼시 단장은 성명을 발표했다.

"제퍼슨과 재계약 도중 의견이 다르긴 했으나, 일방적인 부당한 계약을 강요는 아니었다!"

급하게 진화에 나섰지만 늦은 반응이었다.

제크 팀장은 곧바로 대형 언론을 통해 또 다른 증거를 터뜨렸다.

[에이전트와 첼시 단장 녹취록 유출]

"이 쓰레기 자식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확인한 첼시 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취록이란 단어가 내포하는 불길함.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는 급히 인터넷을 확인하곤 이내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했던 언행이 그대로 녹취된 내용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던 것.

녹취록이 어디서 나왔겠나.

"빌어먹을 에이전트 자식! 재계약 때 녹취를 했단 말이야?"

재계약 자리에서 능청했던 제크 팀장.

몰래 이런 녹취를 했단 사실에 단장은 경악하다 못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부상당한 선수가 아닙니까? 이번 시즌 복귀도 못 해요. 그런 선수에게 지금의 주급을 주는 것도 불가능입니다!"]

["솔직히 생각해 봅시다. 부상 전의 제퍼슨이야 75만 유로를 받을 만했지만, 부상 후의 제퍼슨은요? 75만 유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안 됩니다! 주급 삭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재계약은 진행할 수 없습니다!"]

유출된 녹취록은 극히 일부였다.

제크 팀장이 단장과 만나 재계약 논의를 한 기간만 따져도 한 달이 훌쩍 넘으니까.

그러나 유출된 부분만 봐도 치명적이었다.

구단에서 성명을 발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녹취록 유출.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큰지 뭔지 이 개새끼!"

단장은 방방 뛰었다.

"단장님! 어떡합니까?"

보드진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단순히 팬들의 시위라고 여기기엔 분위기는 너무 과열된 상태.

오죽하면 런던 경찰이 출동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겠나.

이런 상황에서 제퍼슨을 매도해 버린 녹취록까지 나왔다.

단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소리쳤다.

"일단 법리 해석부터 해! 녹취록이 의미가 없단 걸 증명하고 밝히라고! 일단 녹취록을 깔아뭉개!"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미 대중들에겐 공개된 녹취록으로 인해 제퍼슨은 온전한 피해자로 인식되었다.

첼시팬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전 세계에서도 엄청난 팬덤을 소유한, 제퍼슨이 피해자! 가해자는 첼시 구단주! 명백한 상황. 이제 도저히 진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단장과 구단주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또 한번 시련이 몰아닥쳤다.

***

"그쪽 반응은 어때?"

"대부분 위약금을 지불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의견입니다."

"자칫하다간 북미에서 불매 운동이 나올지도 몰라요."

"설마. 고작 축구 하나 때문에?"

그 말에 상대편에 있던 직원은 정색했다.

"제퍼슨은 고작 '축구'가 아닙니다. 2022년 월드컵 우승을 만들어 낸 이후, 제퍼슨은 영웅이 되었어요. 이 나라가 그렇게 만들었죠. 단순한 세계 제일의 축구 선수가 아니라, 미국의 영웅 중 하나입니다. 그 선수가 냉혹하게 내쳐졌습니다. 부상당한 직후에 말이죠. 지금 미국 시민들의 반응이 어떤지 아시잖습니까."

"음!"

"북미 내에 있는 첼시 스토어들이 대부분 문 닫았어요! 혹여 테러라도 당할까 봐요!"

"으음! 그래도 첼시엔 미국 선수가 많잖나. 산티아고, 풀리시치, 웨스턴 맥케니!"

"회장님!"

직원은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 모두를 합쳐도, 제퍼슨은, 제퍼슨입니다."

묵직한 한마디.

회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위약금 지불하고 첼시 후원 철회해."

***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사실 지금까지 구단주는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계약은 단장의 몫.

유출된 녹취록도 단장의 목소리밖에 없지 않나.

실제로 구단주는 모든 일을 단장에게 맡겨 진행하게 했다.

즉, 그는 단장에게 모든 책임을 씌워 팽할 생각이었다.

한데 지금 터진 문제는 그럴 수 없었다.

"첼시를 후원하는 13개 북미에 있는 회사에서 위약금을 지불하고 후원 계약을 해지하겠단 일방적인 통보라니! 사업하는 사람들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야!"

후원 계약 철회.

설마 미국 후원사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잔뜩 붉어진 얼굴의 구단주와 달리 단장은 해탈한 듯한 표정이었다.

"북미 내 첼시 이미지가 최악입니다."

"최악?"

"배신자라고 낙인찍혔죠."

"······!"

"북미 최고 인기 클럽에서, 제퍼슨이 가장 힘들 때 내친 배신자 클럽. 그런 클럽에 후원을 한다? 치명적입니다."

"그놈의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이 뭔데! 고작 축구선수 하나인데! 말이 되냐고!"

단장은 입을 꾹 닫았다.

제퍼슨의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축구계에서 그가 가진 위상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거대해지면 거대해졌지, 줄어들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축구 외적으로 이럴 줄은 몰랐다.

유럽인들은 북미에서 제퍼슨이 어떤 존재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북미 내 첼시 직원이 보낸 보고서를 보고 단장은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제퍼슨이 우릴 용서하지 않는 한. 첼시는 북미에 발조차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북미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런던보다 심하면 심하지, 결코 온화한 분위기는 아니리라.

구단주는 한참 씩씩대다가 소리쳤다.

"이해할 수 없어. 우리 팀엔 미국 선수들이 더 있잖아? 미국 선수 한 명만 있어도 다른 유럽 클럽들은 빵빵한 후원을 받는다고!"

하물며 첼시의 미국 선수들은 미국 대표팀의 중추다.

풀리시치와 산티아고. 거기에 이젠 확실히 좋은 카드가 된 웨스턴 맥케니까지.

세 선수가 아직 있는데 위약금까지 지급하고 후원 계약 해지라니!

단장은 무너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세 선수. 모두 이번 시즌 끝나고 떠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재, 재계약은?"

"······세 명 다. 아니 첼시 선수 절반 이상이 계약한 에이전시가······ 제퍼슨의 그 에이전시입니다."

그 말에 구단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보여 주는 구단주의 넋 나간 표정.

단장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구단주님. 오늘부로 단장 이하 보드진은 총사퇴할 것입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단장도 잘 알았다.

'내 책임으로 돌리려는 속셈? 내가 당하기만 하겠어? 나도 구단주가 시킨 대로만 한 거야!'

빠른 사퇴와 제퍼슨에게 사과.

그나마 단장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

"다들 훈련에 집중해야지. 어디에 신경 쓰는 거야?"

훈련장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모호하다.

특히 내가 들어오자 날 바라보는 선수단, 코치진의 표정이 묘했다.

약간의 두려움이 담긴 눈빛?

흠. 하긴 요즘 뉴스가 꽤 시끄럽긴 하지.

그래도 훈련은 해야 하지 않나.

다음 챔스 4강 2차전이 남았는데.

"챔스 준비해야지! 모두 정신 차리라고! 아직 게임 안 끝났어!"

내 말에 존 스톤스가 살짝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4대 0으로 이겼는데?"

뭐, 일반적으로 보면 게임 끝난 거지만.

"고작 4점차로 만족해?"

내 말에 스톤스는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지독한 새끼."

"저 자식, 누가 마음 넓다고 했어?"

"저거 미친놈 맞아."

"내가 말이야. 필드에서 저 자식 막으려고 옆구리 좀 꼬집었다가 발목 부러질 뻔했어. 지독한 놈이야 아주."

다 들린다.

"스톤스! 빨리 와서 훈련해!"

< 외전 10. 제프를 건드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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