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9. 제프를 건드려? (1) >
"필마르크가 관중석에 왔다고?"
경기가 끝날 무렵.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과르디올라는 반색했다.
필마르크와 과르디올라는 꽤 앙숙으로 유명했다.
과르디올라가 밤새며 준비한 전술을 무너뜨렸던 감독이 바로 필마르크였다.
물론 정확히는 제퍼슨이라고 말할 수 있긴 하지만.
아무튼 기자들은 과르디올라와 둘 사이를 기사로 이간질했다. 둘 사이 감정이 격해지며 과르디올라는 필마르크를 '제퍼슨 없었으면 삼류 감독'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런 과르디올라를 상대로 필마르크의 반응은 담백함 그 자체였다.
"꼬우면 제퍼슨을 영입하던가!"
이렇게 필드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냉랭했다.
우승컵을 다투는 감독인 만큼 그러했다.
평소 같았으면 악수도 하지 않았을 사이.
한데 과르디올라는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해트트릭을 터뜨린 제퍼슨 리.
그의 플레이에 온몸에 활력이 돋고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흠. 필마르크에게 내가 끝나고 좋은 와인 준비했으니,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게."
"네?"
코치는 과르디올라의 말에 두 눈을 끔뻑였다.
만나서 싸우지 않으면 다행인 앙숙한테 와인을 대접한다고?
하나 과르디올라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황홀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경기가 끝나고, 과르디올라는 만면에 미소를 띤 환한 얼굴로 필마르크를 만났다.
조금은 착잡한 얼굴의 필마르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승리를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는 첼시라서 그런지, 승리를 거둘 수 있었군요."
호의적인 반응에 필마르크도 전처럼 가시를 세울 수 없었다.
그도 어색하게 웃으며 겸양을 표했다.
"하하. 그럴 리가. 재밌는 경기였습니다. 압도하더군요."
"다 제퍼슨 덕분 아닙니까, 감독님. 이제 알았습니다. 제가 그간 감독님 보고 제퍼슨 없으면 삼류 감독이라고 욕했던 것에 사과드립니다."
과르디올라의 정중한 사과에 필마르크는 두 눈을 끔뻑였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의미는 명백했다.
이 양반이 왜 이래?
하나 과르디올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었다.
"제퍼슨은 정말 엄청난 선수더군요. 저도 초창기부터 제프를 봤지만, 글쎄요. 지금의 폭발적인 능력은 첼시에서부터 성장한 거겠죠. 그리고 그 잠재력을 이끌어 낸 건 감독님 아니겠어요?"
"음······."
필마르크는 어물쩍거렸다.
그저 머릿속에는 '내가 잠재력을 이끌어 냈나?'라고 잠깐 의문이 들었을 뿐.
과르디올라는 그런 필마르크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혼자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제퍼슨의 플레이에 심취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간 제퍼슨을 활용한 감독님의 방식이 옳았어요. 제퍼슨을 2선에 놓거나, 윙으로 놓거나, 스트라이커 4명을 넣은 것도······ 오! 맙소사! 제퍼슨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려는 움직임이었군요!"
"어······ 그런가요?"
"그럼요! 제퍼슨을 무궁무진하게 활용한 것은 바로 감독님이시죠!"
"음."
과르디올라는 그 후로도 한참 제퍼슨의 전술적 활용에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혼자 떠든 게 머쓱해졌는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제가 너무 신나서 얘기했군요."
"아닙니다. 흥미 있는 이야기였어요."
"어쩌다 보니 제퍼슨이 이제 제 선수가 됐습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사과드리고 싶고······ 개인적으로 제퍼슨 활용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네요."
"조언이요?"
"그럼요! 그간 제퍼슨을 활용한 감독님의 방식은 모두 획기적이었습니다!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결과를 만들어 냈죠! 제퍼슨을 활용하는 감독님만의 노하우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저에게 조금의 조언을 해 주신다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과르디올라가 긴말을 겨우 내뱉고 숨을 몰아쉬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필마르크를 바라보는 과르디올라.
그 낯 뜨거운 시선에 필마르크는 그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다소 느릿한 말투로, 두 눈동자를 느리게 끔뻑였다.
"아······ 그런 게 있었나? 난 그냥 박스에 제프를 박아 둔 건데······."
"······."
***
제퍼슨의 맨체스터 이적을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대단하고 쇼킹하다는 의견이 주류였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상당수 팬들은 이렇게 외쳤었다.
"부상당한 선수한테 3천억 원?"
"사놓고도 부상 때문에 한 시즌 동안 못 쓰는데?"
"아 뭐 제퍼슨이야 미친 선수지. 하지만 말이야. 솔직히 그게 좀 합리적인 구매인가?"
일견 합당한 듯한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맨시티 팬들은 이 의견들이 어떤 마음에서 파생됐는지 알았다.
"왜냐면 우리가 제프를 산 게 부러운 거거든!"
"어떻게든 까 내리고 싶은 거야."
"우리가 엄청난 돈을 주고 사 온 선수가 망하길 바라는 거지!"
맨시티 팬들만의 생각이었지만 진실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맨시티는 다른 팀들의 질시를 받는 팀이다.
압도적인 자금력과 세계 최고 수준의 코칭스태프.
메시와 호날두가 사라지 시대.
축구계에서 오롯이 신의 반열에 오른 선수를 맨시티가 사간다?
라이벌 팀들 입장에서는 제발 그 선택이 잘못되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근데 맞는 말이긴 해."
"조금 불안하지!"
"이번 시즌 못 쓰고. 다음 시즌 복귀해도, 1년을 쉬었고 경기감각은 엉망이야. 언제 전성기 폼을 회복해?"
"음!"
맨시티도 내심 상당히 불안했다.
역대 최고 선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와 주급.
그러나 부상 이후 폼에 대한 의문이 동반한다.
만일 제퍼슨이 실패한다면, 팀은 엄청난 출혈을 하게 된 셈이다.
그렇게까지 염려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이, 제퍼슨은 빠른 복귀에 성공했다.
[제퍼슨 리! 4월 복귀 확정!]
[제퍼슨 리, "하루 빨리 맨시티를 위해 뛰고 싶다." 복귀 의지 강해.]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이번 시즌 복귀 못할 거란 기존 예상을 깨고 4월에 복귀했다.
전문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빠른 복귀였다.
"도대체 이 회복 속도는 뭐야!"
"이건 사람이 아니야!"
제퍼슨의 재활에 합류한 저명한 재활의와 트레이너들마저 경악했다.
다음 시즌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퍼슨의 빠른 복귀.
맨시티 팬들은 반색했다.
"그래! 이게 제퍼슨이지!"
"제퍼슨은 우리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하지만 경기 감각은?"
무수히 쏟아지는 불안에 젖은 목소리. 또는 제발 망하길 바라는 타팀 팬들의 바람.
하나 제퍼슨은 자타가 공인한 세계 최고의 선수다. 또 '21세기 미스테리'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수였다.
[제퍼슨 리, 복귀전에서 3골 1어시스트 폭발!]
[스카이 블루의 캡틴 아메리카. 스탬포드 브리지를 무너뜨리다.]
[경기감각? 피지컬 약화? 모든 의문을 불식시킨 블루문의 러닝백!]
[펩 과르디올라, '필마르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꼬우면 제퍼슨을 사던가! 맞다. 이기려면 제퍼슨이 있어야 한다. 첼시는 제퍼슨이 없었고, 맨시티는 제퍼슨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이긴 이유.']
[맨시티 팬들, '런던의 주인이 런던을 짓밟은 게 무슨 문제?']
[스탬포드 브리지의 첼시 관중 3명, 경기 도중 쓰러져 긴급후송]
[블루스의 히어로가 블루문의 러닝백이 되어 돌아온 순간.]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스포츠 일간지의 1면에 제퍼슨이 실렸다.
첫 골, 두 번째 골, 해트트릭까지.
그중 가장 많은 말이 튀어나온 사진이 있었다.
좌절하는 첼시팬들의 배경 앞에, 손가락으로 구단주를 가리키는 제퍼슨의 모습.
"이거 구단주를 가리킨 거지?"
"중계로 봤을 땐 그랬어."
"바로 카메라에 인도인 구단주가 잡혔잖아!"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사실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적어도 첼시 팬들, 아니 축구팬들이라면 제퍼슨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안다.
"제퍼슨을 건든다고? 그 지독한 미친개를?"
"감당할 수 있겠어?"
건들면 반드시 되갚아주는 성격이 아니었던가.
제퍼슨은 결코 당하고만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드에서 과하거나 노골적인 반칙을 당하면 배로 갚아 주는 게 제퍼슨 리였다.
트래시 토크라도 하게 되면 상대방의 혼을 빼놓다 못해 정신을 짓밟아 버리는 선수.
수틀리면 에이전시를 이용해 각종 여론전을 펼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이란 나라 전체가 제퍼슨의 후원자나 다름없었으니까.
한데도 제퍼슨은 첼시 구단의 일반적인 성명에 한마디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건 많은 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와, 그럼 이게 진짜야?"
"제퍼슨은 구단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물론 제프 상황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재정이 어려운데 주급 상향은 그렇지 않나?"
이런 반응이 첼시 서포터즈 측에서 소수지만 튀어나왔다.
'억울한 건 참지 않는 제퍼슨이 왜 침묵을 지키고 있겠냐. 제퍼슨도 뭔가 구린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구단을 믿고 기다려 보자.'
하지만 제퍼슨은 4강전에서 구단주를 가리킨 셀레브레이션을 보여 주고,
믹스트존에서 끝내 폭탄을 터뜨렸다.
"친정을 상대로 골을 넣는 건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맨시티로 오게 된 건 외부적 요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령 선수를 그저 상품성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위에 앉아 있다면 말이죠."
믹스트존에서의 발언.
기자들은 눈을 빛내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지금 그 말은 첼시 구단주 얘기입니까?"
제퍼슨은 대답하지 않고 미묘한 미소를 나기며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당연히 기자들은 난리가 났다.
"이거 뭐야?"
"당장 메인에 올려!"
"첼시 단장한테 전화 돌려!"
"단장실로 쳐들어가라고!"
이후로 반응은 점점 극적으로 변했다. 제퍼슨의 발언은 곧바로 유럽과 북미 전체로 퍼져나갔다.
"뭐야. 상품 취급했다고?"
"설마? 우리 제프를?"
"이 개자식! 쓰레기 같은 놈!"
"생각해 봐! 제퍼슨이 만일 떠나지 않았다면, 이번 4강전에서 복귀해서 맨시티를 박살 냈을 거라고!"
"애당초 그를 떠나 보낸 게 실수야!"
"구단주실로 당장 쳐들어가자고!"
"얘기를 들어봐야겠어!"
첼시 서포터즈들은 난리가 났다. 몇몇 성질 급한 이들은 구단주를 향해 면담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구단주는 나와서 진실을 밝혀라!"
"개자식아! 제프를 다시 데리고 와!"
"팀을 망치지 마!"
그렇게 한바탕 '제퍼슨 밤(Jeffrson BOMB)'을 터뜨린 제퍼슨은, 맨체스터의 저택에서 유유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멋진 복귀전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제크 팀장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거의 내 곁에 붙어 매니지처럼 움직였던 제크 팀장은 근래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일 하나를 준비 중이라 그렇겠지.
제크 팀장은 빙빙 돌려서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그가 찾아온 이유는 명백했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될까요?"
"시작이라."
"그간 자료는 충분히 모았습니다. 분위기도 올라왔고요. 적당한 시기입니다."
내가 답변하지 않고 잠깐 망설이자, 제크 팀장은 살짝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혹여 첼시에 피해가 될까 우려하시는 건가요?"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네요."
"첼시라는 클럽의 이름을 욕보이는 짓은 아닙니다. 저희의 목표는 오로지, 그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양반들이죠."
맞다.
물론 첼시도 타격이 있겠지.
그러나 지금의 구단주가 계속 구단주 자리를 지키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첼시에게 독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하면······.
"네. 시작해 주세요. 저도 당하고 사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렇죠."
"하지만,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세요. 그래도 첼시가 망하는 건 정말 싫습니다. 거기엔 제 동료도 많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음. 어느 정도로······?"
다소 조심스럽게 묻는 제크 팀장.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해 주세요. 적당히."
"적당히라······."
제크 팀장이 곰곰이 적당히란 말을 되뇌었다.
다소 난감할 거다. 적당히란 수사만큼 감 잡기 어려운 단어가 있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줘야겠다.
"미국식 적당함. 아시죠? 그 정도로요."
그제야 제크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짓궂은 미소다.
"아하. '과하게 적당한 것'말이죠."
과하게 적당한 것.
딱 좋지 않나?
"네. 이제 반격해야죠?"
이젠 내 턴(Turn)이다.
< 외전 9. 제프를 건드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