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8. 블루문의 러닝백 (3) >
2년 전쯤, 영국에선 꽤 재미있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듣기 싫은 노래'를 뽑았는데, 1위가 퀸의 'We will rock you'였다.
희대의 명곡이 듣기 싫은 노래로 꼽힌 게 의아한 일이지만, 적어도 영국에선 당연한 일이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세상에! 내가 죽을 날이 왔나 봐!"
"이 개같은 노래를 내 입으로 부르는 날이 오다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PTSD가 왔었는데!"
"너무 달콤한데! 첼시 개자식들! 지들만 좋은 노래 불렀다 이거지?"
"이 좋은 걸 지들만 불렀네!"
하나 이제 맨시티 팬들은 더 이상 퀸의 노래가 싫지 않았다.
흥겨운 리듬, 입에 달라붙는 가사, 둔중한 박자까지.
가장 좋은 점은 노래뿐만이 아니다. 증오하는 첼시 팬들의 착잡한 표정을 감상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단 사실이다.
[제퍼슨의 응원가가 맨시티에서 불러지고 있습니다!]
[정말 축구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광경이네요. 아아. 지금 카메라 화면에 잡힌 우는 아이의 얼굴에서 첼시팬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네요.]
[설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제퍼슨 리! 긴 부상 끝에 돌아오자마자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경기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불과 한 골이다.
충분히 역전 가능한 스코어다.
그런데도 첼시 팬들은 비수가 심장을 찌른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제프가 5분 만에 한 골을 넣었지."
"그럼 남은 85분 동안 얼마나 무서울까?"
"우리는 제프가 어떤 놈인지 잘 안다고!"
그들은 누구보다 제퍼슨이 어떤 선수인지 잘 알았다. 절대 한 골로 만족할 선수도 아니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선수도 아니다.
추가 시간밖에 남지 않아도 안심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선수가 제퍼슨이 아니던가.
하물며 이제 경기 초반이다.
"오, 제발······ 제프!"
첼시 팬들이 간절한 시선으로 제퍼슨을 바라보지만.
제퍼슨은 냉혹했다.
[제퍼슨이 부활의 신호탄을 쐈습니다! 축구팬 여러분! 정말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세계 최고 선수의 가장 환상적인 플레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
첼시는 한 골에 실망하지 않았다.
매번 실점을 내주더라도, 끝내 역전승을 만들어 냈던 팀이 바로 그간의 첼시가 아니던가.
다만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LEE Will, LEE Will Fuck you!
늘 첼시 선수의 사기를 올리던 둔중한 응원가.
역전극을 만들어 주던 응원가의 주인이,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힘이 난다니."
"가장 듣기 싫었던 노래였는데."
제퍼슨의 응원가에 영향을 받는 건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두려운 응원가가 아니다. 사기를 죽이고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노래가 아니다. 승리를 향한 당당한 개선가. 사기가 솟구친 맨시티의 공격은 폭발적이었다.
"스털링!"
데 브라이너가 중원에서 오른쪽 측면으로 내달리는 스털링에게 스루패스를 뿌려 줬다.
"Yeaaaaaaaaaaaaa!"
진동과 함성.
"전진! 전진! 지금이야!"
과르디올라가 연신 소리쳤다.
우측면을 찢어 버린 스털링의 돌파.
선수 두어 명을 질질 끌면서 느슨하게 만든 빈 공간.
"······!"
과르디올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밖에서 보는 관찰자 시점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느슨한 빈 공간.
그 공간을 향해 달려가는 제퍼슨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기서 저 공간을 본다고?'
아마 TV중계로 보는 해설자나 겨우 발견할 자그마한 빈틈.
첼시의 수비마저도 인식하지 못한 비좁은 틈을.
제퍼슨이라는 사자는 집요하게 물었다.
과르디올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왜 자신의 팀이 매번 첼시에게 패배했었는지를.
그 어떤 전술도, 수비도, 할 수 있는 걸 모두 준비해도, 끝내 무너졌는지를.
"누구보다 공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
과르디올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공간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선수라니!
과르디올라가 그동안 지휘했던 선수 중 최고는 당연히 리오넬 메시였다. 그러나 이 한 장면만으로도.
'내 생에 최고의 선수는 제퍼슨으로 끝나겠군.'
"Bluemoon!"
스털링은 엄청나게 이타적인 선수는 아니다.
본인 기술과 돌파가 좋아서 기회가 생기면 직접 해결하려는 습관을 지녔다. 그러나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른 선수는 본능에 민감하다.
'저기로 내주면 된다!'
스털링은 마른침을 삼켰다.
직관적으로 제퍼슨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패스를 뿌리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막아! 제프다!"
첼시 수비진이 괴성을 내질렀다.
투웃!
공간을 향해 내준 패스.
"LEE Will, LEE Will Kill you!"
낮고 빠른 공. 그리고 발바닥으로 가볍게 긁어내며 완벽하고 부드럽게 키핑해내는 제퍼슨 리.
그 순간에, 첼시 선수들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표현하기 어려운 공포감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박스 안 제프다! 정신 차려!"
시셀도가 비명처럼 내질렀다.
"Wuuuuuuuuuuuuuu!"
그건 제퍼슨으로서도 꽤 낯선 경험이었다.
팀이 실점 위기에 빠지자 당연히 터져 나오는 홈팬들의 야유.
그것의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이야.
심장에서부터 피가 들끓었다.
야유가 커질수록, 그리고 저 위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첼시 구단주의 시선이 떠오를수록, 몸에 새겨진 본능이 타올랐다.
[첼시 선수들이 제퍼슨을 둘러쌉니다!]
포지션의 파괴.
첼시 선수들에게 하나의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훈련에서 제퍼슨을 막으려면, 포지션을 파괴하라.
비단 수비뿐만 아니라, 제퍼슨은 막으려면 모든 선수가 수비를 위해 달려들어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 명제였다.
뤼디거, 시셀도, 리스 제임스가 박스 안에서 막았고, 뒤에서는 스털링을 내버려 두고 벤 칠웰이 달려들었다.
수비진 네 명.
그리고 미드필더 올리버와 캉테까지 급하게 박스로 복귀.
단 한명을 막기 위해 그 많은 선수들이 제퍼슨을 향해 달렸다.
첼시 팬들이 쏟아내는 야유의 주인공이 된 제퍼슨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타오르는 본능에 몸을 실었다.
"Yeaaaaaaaaaaaaaa!"
야유를 덮어 버리는 함성.
제퍼슨은 그대로 정면 돌파했다. 수비진과 제퍼슨이 모두 엉켜들었다. 전후좌우에서 발들이 쑥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네다섯개의 발끝이 공의 경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What the······!"
"저건 대체!"
막혔으리라 짐작했던 과르디올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툭툭툭툭.
지독히도 짧은 볼터치가 발끝을 모두 피해 냈다. 왼쪽, 오른쪽, 팔을 잡아끌고 옷깃을 잡아끌고, 첼시 선수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비가 동원됐지만.
[제퍼슨! 이게 제퍼슨입니다! 이게 제퍼슨입니다! 신화속의 타이탄이 저러했을까요! 절대로, 그는 무너지지 않는 선수입니다!]
어떤 선수가 와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
제퍼슨은 쏟아지는 압박과 억누르는 힘을 우악스럽게 떨쳐 냈다.
몸을 던져 부딪쳐 싸우는 것이 그의 특기가 아닌가.
야유를 쏟아내며 막아내길 기도하던 첼시 팬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제퍼슨이 뚫어냅니다!]
뚫었다.
제퍼슨에게 달려들던 뤼디거와 벤 칠웰이 박스에 쓰러졌다.
"안 돼!"
"빌어먹을! 제프!"
첼시 팬들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제퍼슨에게 느꼈던 든든함이 이제는 공포가 됐단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뻐엉!
[제퍼슨 리가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킵니다!]
[도대체 제퍼슨을 누가 의심했나요? 제퍼슨! 자신에 대한 의심에 대한 대답을 보여 줍니다! 오, 이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데요?]
세레머니는 아니다.
다만 오연하게 서서 높은 곳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제퍼슨.
카메라는 곧 제퍼슨이 가리키는 방향을 찾아냈다.
다소 찡그려진 표정의 첼시 구단주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무섭군요! 제퍼슨, 구단주와 갈등이 있단 루머가 있었는데······ 마치 지켜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제퍼슨 리, 두 골로 만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첼시! 이제는 팀을 구해 내던 수호신이 적이 되어 만나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
"제퍼슨! 제발 적당히 해!"
"옛 동료들의 마음을 짓밟으려는 거야?"
"꺼져! 올리버!"
올리버의 절절한 반응을 냉정하게 쳐낸 제퍼슨은 여전히 무자비했다.
애당초 맨시티는 강력한 선수진을 구축했다.
거기에 제퍼슨의 골을 시작으로 분위기를 탄 맨시티는 매서웠다.
제퍼슨은 계속해서 유효슈팅을 만들었고, 기회를 만들었다.
수비진 사이를 갈라 버리는 정확한 슈팅.
가라앉은 수비의 심장을 철렁이게 만드는 중거리 슛.
때때로 데 브라이너의 곁에 서서 제로톱 플레이까지.
그가 뿌려 주는 패스는 양쪽 날개로 흘러갔고, 첼시의 측면을 무자비하게 파괴시켰다.
[제퍼슨 리는 어쩌면 냉정하기 짝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스트라이커의 본능이 저리 움직이게 만드는 것일까요? 펩과 만난 제퍼슨은 더 무서워졌습니다!]
[첼시에서처럼 다이내믹한 플레이보단 좀 더 기술적으로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펩의 영향일까요? 조금은 달라진 제퍼슨입니다만, 그 파괴력은 커지면 커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역설적이게도, 제퍼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감독을 꼽으라면 필마르크보단 펩 과르디올라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제퍼슨을 막기 위해 수년간 연구했던 펩.
그만큼 제퍼슨을 잘 알았다. 그래서일까.
제퍼슨은 첼시에서와는 보다 더 기술적이고 화려한 플레이를 펼쳤다.
[제퍼슨 리! 버텨 주고, 패스를 찔러줍니다! 오, 맙소사! 어느새 달려 들어간 베르나르도 실바에게!]
[제퍼슨의 패스에는 눈이 달리기라도 한 것일까요! 엄청난 패스입니다! 맨시티! 3대 0으로 달아납니다! 원정,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스탬포드 브리지를 무너뜨립니다!]
***
첼시가 싫어진 건 아니다.
다만 지금 내가 보고 싶은 건, 후회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첼시 구단주의 표정이었다.
때문에 나는 좀 더 뛰었을 뿐이다.
"제프!"
늘 그랬듯이, 공은 나에게 온다.
그리고 이 공을 어찌 다루는가에 따라 경기의 향방이 결정된다.
스털링의 돌파가 눈에 보인다. 하나 그에게는 두어 명의 선수가 커버에 나섰다.
툿!
왼쪽에서 움직이는 베르나르도 실바에게 가볍게 내준 뒤, 앞으로 달려갔다.
첼시는 여전히 무리하게 나서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면 수비를 탄탄하게 했다.
역설적으로, 낡은 방식이다.
이제 프리미어리그에서 나를 막기 위해 버스를 주차하는 건 고루한 방식이다.
하지만 첼시로서도 선택이 그것밖에 없다.
필드에서 언제 나를 막아 봤겠는가.
툭, 툭, 툭.
데 브라이너, 베르나르도 실바. 이 두 녀석은 확실히 안정적이다. 활발하게 움직이며 볼을 돌렸다.
베르나르도 실바는 반대편의 스털링에게 길게 방향 전환을 시도했고, 스털링은 돌파하는 척 다시 중앙의 데 브라이너에게 패스.
데 브라이너의 얼굴에 잠깐의 고민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 녀석하고 두 눈이 마주쳤다.
"잡아!"
위기를 감지한 건 첼시도 마찬가지.
늦었어.
이미 나는 뛰었다.
기다리던 찬스가 분명하게 보였다.
아주 미세한 틈.
수비진 사이로 발생한 미세한 균열.
균열 사이로 데 브라이너의 로빙 스루 패스가 향했다.
우글거리는 수비 사이로 새하얀 궤적이 뚝 떨어진다.
이 찰나의 순간.
저 공을 잡기 위해 내 몸에 새겨진 움직임이 저절로 발현됐다. 땀으로 윤활된 근육이 매끄럽게 작동했다.
발등으로 공을 가볍게 잡아내고, 왼쪽에서 들어오는 어깨 싸움을 버텨 내면서.
발등에서 공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다시 허공으로 가볍게 띄운다.
툭!
"······!"
시셀도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는 사이.
막아선 수비 어깨 사이를 그저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면서.
다시 뚝 떨어지는 공을 발등을 멈춰 세운다.
곧바로 슛하듯이 페이크를 넣자 수비가 한쪽으로 우르르 무너지고.
"Noooooooooo!"
다시 한번 접고, 패스를 뒤로 내주는 척하면서 몸을 돌리듯 하다가 다시 또 접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시셀도가 절규하며 몸을 날려도, 그저 빠르게 볼을 쳐 내면서 툭툭 피한 뒤.
"-------------!"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온 순간.
내 앞에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케파 골키퍼가 있었다.
음.
"오랜만이야, 친구! 인사는 해야겠지!"
뻐어어어엉!
흠.
인사치고는 과했나?
케파는 바닥에 철썩 쓰러진 채 골문안의 공을 바라봤다.
아아.
오랜만이야.
이 기분.
저 좌절하는 표정. 그것도 옛 동료한테 보니까 뭔가 좀······.
"웃지 마! 제프! 개자식아! 좋아하지 말라고오!"
올리버의 괴성에 애써 표정을 감추며 난 시선을 돌렸다.
"······."
저 위.
첼시 구단주가 보였다.
흠.
표정이 잘 안보이네. 아쉽군.
***
첼시 구단주는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애써 참았다.
제퍼슨이 한 골, 두 골, 그리고 세 번째 득점을 어시스트할 때까지도.
참았다.
애써 표정을 관리했고 진중한 척했다.
그러나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순간.
첼시팬들의 비명을 만들어 낸 순간.
그리고 제퍼슨이 자신을 향해 씩 웃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마지막.
먼 거리였지만, 제퍼슨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집중했기에 그는 제퍼슨의 입이 달싹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독순술을 익힌 것도 아니지만, 구단주는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선명하게.
그리고 서늘하게.
'이제······ 시작이라고?'
< 외전 8. 블루문의 러닝백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