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2. 덜 푸른 심장 (2) >
런던의 시민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첼시의 황금기!"
"60년대에는 인터밀란이었고, 80년대 후반에는 AC밀란, 2010년에는 바르셀로나. 그리고 2020년대는 첼시의 시대다!"
슈퍼클럽들이 유난히 강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리고 사키 시절의 AC밀란.
알렉스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디 스테파뇨와 푸스카스의 레알 마드리드.
인혜, 사비, 부스카츠의 미드필더와 메시로 대표되는 2009년, 10년의 티키타카, 바르셀로나.
그런 팀들의 계보를 잇는 클럽이 바로 지금 첼시였다.
"2022년 유로피언 트레블, 23년 리그, 챔피언스리그 더블, 24년 두 번째 유로피언 트레블. 챔피언스리그 3연속 우승!"
3연속 리그 챔피언.
3연속 유럽 챔피언스리그 챔피언.
클럽월드컵 우승.
FA컵 세 번 중 2회의 우승.
4년 동안 두 번의 유로피언 트레블.
첼시가 이룩해 낸 성과는 어마어마했다.
지금이 첼시의 최고 전성기, 황금기라는 사실에 이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황금기로 대표되는 상징은 딱 하나였다.
필마르크 감독도, 팀에 즐비한 수많은 스타 선수도 아니다.
22년. 23년. 24년. 25년.
4년 연속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제프가 있으니까 첼시가 지금 강력한 거지!"
"제프가 없는 첼시는 상상도 못 해!"
"생각해 봐. 이번 시즌 막판에 제프가 부상당하고, 우리 팀은 마지막 결승전에서 다 고비를 마셨잖아?"
"제기랄! 다 2등이라니!"
첼시 팬들의 생각은 이번 25-26시즌이 끝나면서 더 굳어졌다.
4월, 시즌 막바지 제퍼슨 리의 부상 이후.
거짓말처럼 팀이 모든 대회에서 2등에 그쳤다.
리그에선 5점 차로 앞서던 리버풀에게 역전 우승을 내줬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가 첼시를 꺾었다.
FA컵에선 맨체스터시티가 우승을 차지했다.
차이는 하나였다.
제퍼슨 리가 없었다는 점.
제퍼슨에 대한 팬들의 신뢰는 더 강해졌지만, 역설적으로 현재 상태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 후에 회복이 잘될까?"
"무려 1년이나 경기를 뛰지도 않아."
"경기 감각은 일시적인 거라고 해도 말이지."
"진짜 문제는, 부상 전의 폼을 회복할 수 있겠냐는 건데."
부상 이후 폼이 확 무너지는 경우는 그간 수많은 선수로 증명된 사실이다.
특히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는 끔찍한 부상이면 말이다.
첼시 보드진은 새 시즌이 시작됐음에도 분위기가 흉흉했다.
로만 구단주가 러시아의 사업 때문에 영국에서 떠났다.
새로 구단주로 부임한 인도인 구단주의 영향으로, 보드진 내부 분위기가 심각했다.
"연봉 대폭 삭감이라니요?"
"이건 제퍼슨 리에게 팀을 나가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세계 최고 선수입니다. 세계 최고라고요. 그런 선수에게 재계약을 하라고 하면서 연봉을 삭감하라?"
"단장님! 이게 말이나 됩니까!"
단장이 구단의 주급체계 개편에 관해 발표했다.
보드진 대다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임 단장은 격렬한 보드진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았다.
"세계 최고인 건 누구나 알지. 하지만 그건 부상 전 이야기잖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퍼슨 리처럼 압도적인 피지컬로 필드를 휩쓸던 선수가, 끔찍한 부상 이후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잖아?"
단장의 말에 보드진은 입을 다물었다.
"제퍼슨 리의 장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 스피드를 최고라 꼽는 사람들 많을 거야. 지금 제퍼슨이 당한 부상이 뭔데? 십자인대 파열이야! 십자인대!"
치명적인 부상이다.
제퍼슨은 보는 사람에게 저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역동적인 플레이를 펼친다.
플레이에 기본 바탕이 되는 게 바로 압도적인 스피드다.
십자인대 파열은 스피드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부상이다.
"가깝게는 가레스 베일, 히카르두 카카, 마이클 오언, 안드레이 세브첸코, 페르난도 토레스. 모두 부상으로 스피드가 죽어 버린 이후, 다른 장점들까지 상실해 버린 경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퍼슨이잖습니까?"
"그래. 인정해. 제퍼슨이 부상에서 회복하고 경악스러운 스피드를 잃었다고 한들, 신체 균형이 무너지고 몸싸움 능력이 약해진다고 한들.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지. 그의 슈팅력, 패스, 위치선정은 모두 환상적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주급이 무려 76만
유로(한화 10억 원)야! 여기에 각종 수당이 붙으면 15만 유로는 더 받지!"
보드진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단장의 말이 구단의 최정점인 구단주 의견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이번에 온 인도인 구단주는 꽤 성공한 사업가다.
하나 그는 로만과는 다르게 축구에 대한 애정이 없다.
첼시는 그에게 있어서 단지 수많은 사업체 중 하나였다.
보드진 중 누군가 새로 온 구단주의 별명을 떠올리곤 흠칫 몸을 떨었다.
'구조조정의 신이라고 했었나?'
'몸집이 비대해진 기업을 인수하고 철두철미한 구조조정으로 완전히 갈아엎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구단주가 축구와 첼시라는 클럽에 대한 특이점을 생각지 않고, 사업체 중 하나라고만 여긴다면?
그래서 제퍼슨의 연봉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거라면?
"솔직히 말해, 당신들은 도대체 지금까지 주급 관리를 어떻게 해 온 거야? 어?"
새로운 구단주가 첼시의 재정상태를 점검하곤 제기한 문제가 바로 주급 체계였다.
"너무 방만한 거 아니냐고! 제퍼슨에 대한 주급이 높아지면서, 나머지 선수들도 다 높아지잖아!"
그건 보드진이 억울한 측면이 강했다.
매 시즌 제퍼슨은 이적 시장에서 가장 핫한 선수였다.
파리,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이 이적시장 때마다 제퍼슨과 접촉했다.
3천억 원에 이르는 몸값.
10억 원의 수당이 붙는 엄청난 주급에도 제퍼슨을 향한 구애는 끊이질 않았다.
첼시로서도 팀의 상징인 제퍼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바로 주급 인상과 더불어 각종 수당이다.
물론 이건 전 구단주, 로만이 팀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므로 가능했었다.
진짜 문제는 제퍼슨의 주급 상승으로, 선수단의 주급 체계가 전체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었단 사실.
최근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이적시장에서다.
선수 하나를 영입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선수들은 기존 구단에서 받던 주급보다 대폭 상승한 주급을 원했다.
첼시의 주급 체계라면 이 정도 해줄 수 있지 않냐는 게, 에이전트들의 의견이었다.
로만처럼 팀에 애정이 깊었다면 몰랐을까.
새로 온 구단주의 눈에 비정상적인 재정상태가 문제점으로 툭 불거졌으리라.
그쯤 생각이 미치자 보드진은 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거. 진짜 제퍼슨을 쳐 내려고?'
'복귀 후에 몸 상태를 체크하고 논의해도 될 문제야.'
'그런데 굳이 문제 삼는다는 건······.'
'부상 이후 폼이 중요한 게 아니야. 애당초 구단주는 제퍼슨을 쳐 낼 틈을 보고 있었어!'
팀의 상징이자 핵심.
제퍼슨 리는 구단주에게 있어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리라.
축구팀에 대한 비전보단, 사업체의 하나로 취급하는 구단주에게는 눈엣가시 같았을 거다.
팀의 비정상적인 주급체계를 손보고 싶어도, 제퍼슨이란 거대한 상징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 때마침 끔찍한 부상을 당했다.
단장 말대로 부상 복귀 후 몸 상태에 대한 의심은 충분한 상황이다.
당장 보드진도 복귀하고 카카나 가레스 베일처럼, 과거의 스타들처럼 될 수도 있으리란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나.
그 불안을 바탕으로 쳐 내겠다는 의도다.
연봉삭감을 받아들인다면 주급 체계를 손볼 수 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팀의 상징을 떠나보내는 아픔이 있겠지만, 비정상화된 주급 체계를 역시 손볼 수 있지 않나.
단장은 더는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이미 이적시장에서 선수 몇을 정리했지. 주급 체계는 더 손을 볼 거야. 모두 새 시즌에 집중하라고. 제퍼슨 문제는 구단주님이 알아서 하실 거니까."
***
꽈앙!
"개 같은 자식! 빌어먹을 새끼!"
신임 단장은 구단주실의 방문을 박차고 튀어나오는 필마르크 감독을 보며 멈칫했다.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감독은 단장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고 휭 지나쳤다.
"흠."
단장은 잔뜩 성이 난 필마르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구단주실로 들어갔다.
"한바탕 했나 보군요."
"음. 여긴 말이야. 감독의 권위가 너무 강력한 것 같단 말이지."
구단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한바탕 말싸움을 했는지,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요. 그가 여기서 들어 올린 트로피가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요."
"뭐,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제퍼슨 리는 어찌 되고 있나?"
"당연히 에이전트가 화를 내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긴 했습니다만. 정말로 제퍼슨 리를 쳐 낼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은 없어. 연봉삭감만 받아들인다면야. 그만한 선수를 어디서 구하나. 부상 복귀 후에 폼이 무너진다면, 오히려 주급이 좀 삭감되어야 정상화되는 거 아니겠나?"
"음. 다치자마자 연봉삭감을 요구하는 건, 선수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지금, 제퍼슨 몸값이 3천억 원이라지?"
"네?"
단장의 걱정스러운 말을 구단주가 중간에 끊었다.
"만일 부상 이후로 복귀하고, 폼이 무너진 걸 다른 클럽이 다 확인한다면. 그 몸값이 어찌 되겠어?"
"······내려가겠죠."
"그러면 그 전에 팔아치우면 되지 않겠나?"
"······!"
"다쳤으니 3천억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돈 많은 파리와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맨시티까지 모두 노리던 선수였으니까.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금액을 받아 낼 수 있지 않겠어? 그러면 주급 체계도 정리할 수 있고 말이야."
"그, 그렇게 되면 감독이 팀을 떠나게 될 겁니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군. 지금 감독은 힘이 너무 세. 난 말 잘 듣는 감독을 원하지. 우승 잘하는 감독을 원하는 게 아니야."
"필마르크 감독은 선수단에서 신뢰가 큽니다. 그가 떠나면 선수들도 떠날 겁니다."
"그것도 좋군! 고액 주급자를 싹 다 정리하고, 선수단 정리를 할 수 있잖아?"
"······."
신임 단장은 새로 온 구단주가 직접 뽑은 인물이지만,
그래도 나름 축구계에서 오래 버틴 사람이었다.
제법 큰 구단을 몇 개 맡아 훌륭하게 이끈 적도 있다.
'구단주가 원하는 건, 팀이 늘 최고가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적당히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이군.'
대다수의 축구 클럽은 만성 적자에 시달린다.
그래서 부자 구단주가 괜히 자금을 더 투자하는 게 아닌가.
로만은 클럽을 위해 수도 없이 구단에 자금을 투입했지만,
지금의 구단주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선수들이 몇 빠진다고 팀이 당장 엉망이 되지는 않을 터.
매 시즌 우승할 순 없어도, 우승을 노리는 훌륭한 팀은 되리라.
구단주가 원하는 수준은 어쩌면 딱 그 정도일지도 모른다.
"아시겠죠? 단장님?"
구단주의 의미심장한 말에 신임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구단주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일 진행하겠습니다."
***
8월부터 12월까지.
제크 팀장은 재계약을 위해 협상력을 발휘했으나.
구단의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8월에 팀의 고연봉자가 몇몇 떠나기도 했었다.
이쯤 되니 상황을 알 만했다.
"팀을 정리하려는 속셈이군요."
"맞습니다."
"감독님하고 사이도 안 좋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이적시장에서 만족스러운 행보를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재계약으로 선수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떠나보내고 있으니까요."
"하물며 팀 성적마저 만족스럽지 못하니."
"아직 절대다수는 감독을 지지하지만, 원래 팬 반응이란 게 확 뒤집히는 거 아니겠어요. 서서히 불만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음!"
나는 제크 팀장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겐과 함께 치료와 재활에 힘쓰고 있어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솔직히 말해 몇몇 팀과 접촉했지만, 거액의 이적료를 부담스러워하는 클럽이 많습니다."
"그렇겠죠. 더구나 부상당했는데, 거액을 투자하기엔 위험부담이 크겠죠."
내 말이 좀 씁쓸하다고 느꼈는지 제크 팀장은 표정을 굳혔다.
"이적료를 지급할 의사가 있는 팀도 몇 있지만, 거기서도 현 주급에 관해서는 부담을 느끼고 있어요."
그럴 수밖에.
내가 받는 주급이 어디 한두 푼인가.
부상이 아니었다면, 통 크게 주급을 지를 팀들도 많겠지만.
나도 잘 알고 있다.
부상 이후 내가 부상 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지.
솔직히 이 부분은, 나도 확답할 수 없다.
폭발적인 스피드, 다이내믹한 플레이.
내 기본 바탕이 되는 플레이를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위험부담을 각오한 클럽이 있을 리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3천억 원에 가까운 내 몸값을 낼 의사를 보이는 팀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막막한 상황이군.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들, 영국에서 손님이 오셨다."
"누군데요?"
영국에서?
먼저 들어오신 아버지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다.
늘 자신만만한 제크 팀장의 얼굴에도 약간의 놀람이 느껴졌다.
"이런, 제가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실례가 된 것 같군요."
그러나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리면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그리고 낯익은 얼굴.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민머리의 남자를, 여기 미네소타에서 볼 줄은 누가 알았던가.
그것도 지금 같은 시국에서.
"오랜만입니다, 제퍼슨 리. 아시겠지만 제 소개를 해야겠죠. 맨체스터시티의 펩 과르디올라입니다."
펩 과르디올라.
그가 왔다.
< 외전2. 덜 푸른 심장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