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 덜 푸른 심장 (1) >
유진은 아빠가 매일같이 닦고 청소하는 진열대를 바라봤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진열장.
반짝이고 화려한 트로피들이 가득했다.
유진은 까치발을 해서 가장 밑에 있는 트로피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리······ 그······ 선수상?"
아직 알파벳을 제대로 못 읽는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자를 읽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유진은 반짝이는 트로피와 금메달들을 볼 때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헤."
반짝이고 크고 멋진 트로피.
형은 집에 올 때마다 트로피와 메달들을 잔뜩 가지고 왔다.
마치 산타클로스 같았다.
형이 1년에 한두 번, 집에 돌아오는 날엔 집안의 분위기가 밝아졌고 반짝이는 트로피들을 우르르 쏟아낼 땐 유진도 기분이 좋았다.
그냥 좋았다.
솔직히 말해 아빠보다, 늘 맛있는 걸 해주는 엄마보다도, 그리고 귀여운 동생보다도.
슈퍼맨처럼 느껴지는 큰형이 가장 좋았다.
"히잇!"
어딜 가나 유진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 어딜 가든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캡틴 아메리카의 동생이란 걸 알면, 온갖 맛있는 음식들과 좋은 선물을 해 주려고 난리였다.
그래서 유진은 형이 좋았다.
1년 중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형이 오는 날이면 즐거웠다.
지금도 그랬다.
"아이고, 귀여워라."
제퍼슨이 손에 박스를 들고 미국 본가로 오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완전 순하네. 아기라서 그런가?"
제퍼슨의 아버지 이성학도 박스 안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단 둘째 유진의 말에 고개를 젓던 그였지만, 막상 제퍼슨이 데리고 온 강아지를 보자 미소가 피어올랐다.
"원래 리트리버가 그렇죠. 뭐."
제퍼슨은 씩 웃었다.
둘째와 셋째의 조금 늦은 생일 선물.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고 노래를 하도 불러 대서, 이번에 제퍼슨이 강아지를 분양받아 왔다.
미국에선 애와 함께 강아지를 기르는 건 흔한 일이다.
"형아! 나도, 나도!"
유진이 제퍼슨의 바지를 당기며 재촉하자 엄마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유진아! 안 돼! 형 다리 아프잖아!"
"아, 맞따! 미안해, 형아."
"아냐, 괜찮아. 괜찮아. 왼발은 괜찮아."
제퍼슨은 웃으면서 박스를 내려 주며 박스 안의 강아지를 보게 해 줬다.
"우와아! 이쁘다아!"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처음 보는 유진은 감탄을 터뜨렸다.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그렇게 성화를 부리더니, 막상 강아지를 보여주니 무서워서 그런지 만지지도 못했다.
"조심히 만져 봐, 유진아."
일곱 살쯤은 되어 보이는 덩치였지만, 유진은 이제 겨우 세 살이 되는 아기였다.
제퍼슨의 응원에 유진은 흘깃 눈치를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마치 거품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헤에."
복슬복슬한 털이 기분이 좋은지 유진은 해맑게 웃었다.
제퍼슨은 동생의 귀여운 모습에 웃다가, 이내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어머니 품안에 꼼지락거리는 작은 아이에게 말이다.
막내, 클라라가 강아지를 쓰다듬는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과 클라라는 쌍둥이지만, 클라라가 3분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막내가 되었다.
클라라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강아지에게 향해 있었다.
"우리 버니(Bunny)! 강아지 만져 보고 싶지?"
클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퍼슨은 어머니로부터 클라라를 조심히 안겨 받아 강아지를 향해 허리를 숙여 줬다.
클라라는 강아지의 뒷덜미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컹컹!"
그러자 강아지가 클라라의 조그마한 손을 핥았다.
클라라는 화들짝 놀라 빨리 손을 뗐지만, 강아지가 애교를 부리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 막내도 강아지가 좋은가 보구나?"
"······응."
"좋아. 아니지. 이제 클라라가 막내가 아니구나. 새로 온 강아지가 막내니까. 유진아. 네가 둘째 형이고, 클라라가 셋째 누나야. 알겠지?"
제퍼슨의 말에 유진이 강아지를 힘껏 들어 품에 안고는 소리쳤다.
"응! 내가 형이야!"
"좋아. 그럼 클라라하고 상의해서 동생 이름 지어 줄래?"
유진이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클라라도 수줍게 웃었다.
***
쌍둥이가 강아지에게 푹 빠진 사이.
아버지는 날 조용히 한쪽으로 부르셨다.
"다리는 괜찮니?"
"계속 치료받고 재활하고 있으니까요. 늦어도 3월 안에 복귀하는 게 목표긴 한데······."
내 다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엔 걱정이 느껴졌다.
끄응.
아버지도 쌍둥이가 생기고 나선 점점 감성적으로 변하셨다.
뭐, 하긴. 걱정할 만하시지.
난생처음 장기 부상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매일 같이 운동하고 재활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래. 그래야지. 음. 그래야지."
"막판에 우승컵을 다 놓친 것도 아쉽긴 한데. 어쩌겠어요. 지금까지 많이 해 먹었으니 양보도 하란 뜻이겠죠."
내 말에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트로피를 못 따낸 게 처음이라서 좀 어색하구나."
"하하하."
첫 무관.
사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4월까지만 해도 우리는 챔피언스리그 4강, FA컵 결승, 리그도 1, 2위를 다투고 있었건만.
막판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전방 십자인대 파열.
남은 잔여 경기를 뛸 수 없을 뿐 아니라, 다음 시즌도 다 날릴지도 모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첼시는 막판에 미끄러졌고, 한국에서는 '콩 트레블'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 개 대회 모두를 2등으로 시즌을 끝마쳤다.
끔찍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3연속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3연속 리그 우승이란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아쉬울 망정 슬프지는 않다.
문제는······.
"월드컵이 아쉽겠구나."
"뭐. 솔직히, 그렇죠."
지금은 2026년.
쌍둥이들이 23년에 태어나 이제 세 살이 된 지금.
안방에서 열리는 북중미 월드컵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괜찮아요. 산티가 잘해 주겠죠."
벌써 언론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를 운운하며 떠들어 댔다.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대대적인 지원이 쏟아지고 있긴 하지만, 내가 없으니 징크스 얘기가 더 나온다.
뭐.
산티도 있고, 로드릭도 맨유 주전이고. 잘해 주겠지. 잘해 줄 거다. 그 녀석들도 이젠 베테랑이니까.
아버지와 나.
둘이 조금은 씁쓸해하는 사이.
"오······ 빠!"
강아지랑 놀고 있던 막둥이가 어느새 기어와서 내 다리를 톡톡 친다.
"다리. 아파?"
붕대를 꽁꽁 감싸고 있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클라라.
"내가 호-해 줄게! 호-오!"
유진이하고 쌍둥이지만,
이 두 아이는 확연히 달랐다.
외견부터 다르다.
유진이는 세 살이지만 벌써 일곱 살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컸고, 건강했으며 식욕도 대단했다. 하물며 어찌나 활발한지 선수 출신인 어머니가 놀다가 지치실 정도였으니 오죽하랴.
반면 막둥이 클라라는 정말 작았다.
세 살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여렸다. 잔병치레도 잦았다.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애교가 유난히 많고 착했다. 똑똑하기도 했다. 제 오빠인 유진은 아직 글자를 못 읽는데, 녀석은 벌써 글자를 읽을 줄 안다.
어찌나 마음이 깊은지 놀아 주던 엄마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곧장 낮잠을 자 버린다.
하여튼, 클라라의 애교에 약간 씁쓸하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확 살아났다.
"아이고! 우리 막내 때문에 오빠 다 나았다!"
"지인짜?"
"그럼. 근데 어떡하지. 오빠 빨리 나으면 다시 일하러 가야 하는데."
"헤엑! 안 대! 천천히 나아야 해!"
흠.
부상당해서 시즌 시작해도 미국에 있어야 하는데.
왠지 슬프지만은 않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같이 있게 되니까.
"그래, 그래. 오빠랑 같이 놀자."
***
[2026 북중미 월드컵 8강전. 미국 2 VS 3 프랑스]
[산티아고 1골 1도움으로 활약했으나 팀을 구해 내지 못해.]
[디펜딩 챔피언의 저주? 미국 8강에서 월드컵 동화 끝나다.]
[제퍼슨 리 없는 미국. 8강까지 선전했으나 끝내 벽을 넘지 못하다.]
[미국의 월드컵은 이대로 종료! 프랑스 4강 진출!]
[산티아고 차베즈 '열심히 싸웠지만 이기지 못해 죄송하다.']
[제퍼슨 리, '미국은 잘 싸웠다. 다음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것.']
***
8월.
월드컵은 프랑스가 우승을 차지했다.
덕택에 미국 시민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됐다.
우승팀에게 패배했다는 명분이 생겼으니까.
이게 조금 추해 보일지 몰라도, 스포츠 세계에서는 은근 중요하다. 특히 자존심 강한 시민들일수록.
아직도 미국 시민 중엔 축알못이 많다.
22년 카타르 겨울 월드컵으로 인해 미국이 축구까지 세계 최강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에서 강한 팀 축에는 올랐지만, 솔직히 아직 절대 강자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나.
뭐, 하여간.
월드컵이 끝나고 영국에선 26-27시즌이 개막했다.
시즌이 개막했지만 나는 아직도 미국에 남았다.
"언제쯤 목발을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67일은 필요합니다."
"······그렇게 구체적인 날짜까지 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율리아겐은 진지했다.
쩝.
이 양반은 갈수록 농담이 안 통한단 말이야.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솔직히 말해 심각한 부상입니다. 일반적인 선수였다면 앞으로 선수 생활을 걱정했겠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걱정은 안 드네요."
"희망적인 말이죠?"
"거듭 말하지만, 제퍼슨 씨의 신체는 특이한 편입니다. 괴물 같은 회복력은 믿기지 않을 정도죠. 걱정은 잠시 접어 두시고 치료와 재활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음.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게 은연중에 표출되고 있었나 보다.
율리아겐이 저리 말할 정도이니.
"걱정이야 충분히 되실 겁니다. 유례없는 장기부상이니까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급해지면 안 됩니다. 진득하니, 참고 버티셔야죠."
율리아겐의 말이 맞다.
조급할 필요 없다. 그럴수록 일은 더 골치 아파질 뿐이다.
율리아겐이 저토록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내가 이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으니까.
정확히는 제퍼슨 리로서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런 다쳤을 때 내가 어찌 대처해야 할지 그 부분에 있어 난 유경험자였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깟 부상 따위.
이학현으로 살 때 이런 부상은 늘 달고 살았다.
그때의 경험을 생각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부상을 이겨 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무리하면 2월 복귀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5월까지 시간을 두고 재활에 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첼시는 내 복귀를 목 빠지고 기다리겠지만.
율리아겐의 입장에선 클럽의 상황보다 내 상황이 더 중요하리라.
"음. 알겠습니다."
나 역시도 무리할 생각은 없다.
이 순간이 내 축구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란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좋아요. 일단 이대로 경과를 기다리죠."
"네."
율리아겐과의 치료를 병행한 상담을 마치고.
잠시 소파에 앉아 쉬는 사이.
에이전시의 제크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러고 보니, 첼시와 재계약 얘기를 시작하겠다고 했던가.
1년 6개월 남은 계약 기간.
슬슬 재계약을 할 시기이긴 했다.
근데 연락이 벌써 온다고?
"예. 제크 팀장님."
-제프. 음. 몸은 어때요?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것 참. 재계약 말이죠. 이쪽은 상황이, 심상치가 않네요.
"예?"
-구단주가 바뀌더니. 계약 진행하는 인사들도 확 바뀌었더라구요. 이게 의미하는 바는, 주급 체계에 변동이 있으리란 얘기인데······.
늘 자신만만했던 제크 팀장이 망설였다.
한참 말꼬리를 흐리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연봉의 대폭 삭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외전1. 덜 푸른 심장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