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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227화 (227/258)

< 227. Who is the BEST? (1) >

미국의 월드컵 결승 진출을 보고, 누군가는 기적이라 말한다.

북미에선 축제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성적.

대부분의 미국 시민이 결승전에 오르는 모습을 상상했을까.

아니다.

아마도 8강 정도가 현실적인 기대감이었을 거다. 8강까지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감각으로 느껴진다면.

4강부터는 차원이 다르다.

그 자리부턴 무조건 월드컵 우승이 목표일 수밖에 없으니까.

미국의 결승전 진출.

이 성과는 감히 그 누구도 폄하하지 못했다.

특별히 오심으로 논란이 될 만한 경기도 없었다.

하물며 결승까지 온 매치업도 대단했다.

크로아티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이탈리아, 잉글랜드.

[유럽을 정복하는 북미에서 온 나폴레옹, 제퍼슨 리.]

[우승후보를 연이어 격침하는 미국, 북미의 구대륙 정벌.]

[유럽 없는 월드컵 결승전, 아르헨티나 VS 미국]

[남미와 북미 최강자의 맞대결! 리오넬 메시와 제퍼슨 리의 정면승부! 과연 결과는?]

[루사일 아이코닉 스타디움. 축구를 위한 신도시에서 벌어지는 역사적인 경기.]

결승전에는 아르헨티나가 올라왔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기세는 어마어마하다.

월드컵 전 경기 전승을 기록하며 결승에 안착했다.

조별리그에선 잉글랜드와 이란, 페루와 한조로 편성되어 3승을 기록.

16강에선 터키를 메시가 더블 해트트릭(3득점, 3어시스트)으로 무너뜨렸다.

8강에서는 브라질과의 운명의 단두대 매치.

메시의 2어시스트로 브라질을 2대 0으로 격파.

4강에서는 18년 월드컵에서처럼 크로아티아와 운명적으로 만났고,

리오넬 메시가 저번 대회의 분노를 토해 내듯이, 크로아티아를 찢어 버렸다.

결승전에서 비유럽권의 두 국가가 맞붙는다.

이례적인건가. 최초인건가.

뭐 하여튼 간에.

결승전을 앞둔 훈련장의 분위기는······ 비장했다.

너무 긴장을 풀어서도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해선 잘될 경기도 되지 않는다.

이러다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우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 적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적당한 긴장감.

그걸 유지하는 건 웬만한 프로페셔널도 힘들다.

하물며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선 말이지.

"왼쪽으로! 방향 끝까지 읽어!"

로드릭을 상대로 있는 힘껏 발을 놀려본다.

아르헨티나의 막강한 공격진을 어찌 막아야 할지,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보여 줬다.

"움직여! 계속해서 움직여야 해!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안 돼. 라우타로 마르티네스는 물이 올랐지. 6골이나 넣은 친구야. 무게 중심이 낮고 밸런스가 좋아. 힘도 좋지. 너랑 부딪치면 그냥 비집고 들어갈 거야."

174cm의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 마르티네스는 작은 신장에 비교해 체격이 엄청나게 좋았다.

떡 벌어진 어깨, 단단한 상체, 굳건한 하체.

혼자서 빅 앤 스몰을 겸비하는 특이한 성향의 스트라이커.

노쇠화된 아구에로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꾸는 친구였다.

"제기랄. 그러니까 키 작은 버전의 너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

"음. 약간 다운 그레이드라고 생각해 봐."

"그럼 자신 생기는데?"

가벼운 농담과 적당한 긴장감.

로드릭은 그래도 제법 괜찮은 분위기였다.

하나 모든 선수가 그런 건 아니다.

원체 소심했던 맥케니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공을 돌리고 있었고, 바카는 로드릭과 달리 계속해서 내 드리블에 실수를 쏟아 내고 있었다.

흐음.

이거야 원.

이러다간 나가리 되는데.

하지만 이런 걱정을 했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확인했던 심리상담사들은 이 내용을 곧장 코치진에게 전달했고, 무언가 방법을 찾았다.

"다들 모여 보라고!"

***

회의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됐다.

스태프들이 준비한 건, 선수 가족들의 영상편지였다.

"어우!"

"누구야?"

"맙소사. 팀 클라인 딸이라고?"

회의실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가족들의 영상편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아빠! 우승하고 오면 엄마가 동생 만들어 준대요!

"오, 이런!"

"클라인 표정 좀 보라고! 저 터프가이가 저런 표정을 다 짓는군!"

"으하하하!"

가벼운 농담과 유쾌한 이야기.

선수들은 서로의 가족 영상들을 보며 웃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풀리고 있었다. 비장미가 잔뜩 떠올랐던 선수들의 얼굴엔 생기가 감돌았다.

영상이 계속 나올수록 선수들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감돌았다. 그러면서도 멀리서 지켜보는 가족들을 위해 이겨야 한다는 적당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특히.

-잉글랜드전, 잘 봤다!

사실 스페인어로 나왔기에,

산티의 할머님이 산티에게 무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산티의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떠오른 걸 보니.

다행이었다. 영상 속 할머니는 다행히도 피로해 보이긴 하셔도, 나름 건강해 보이셨으니까.

온갖 복잡한 감정에 잉글랜드전이 끝나고도 기뻐하지 못했던 산티의 얼굴에 그제야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내 가족 영상이 나왔다.

-아들, 네 엄마가 둘째를 낳아서 NBA스타로 만들자고 하더라.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결승전이라면 뭐, 이 애비도 여러 번 느껴봤지만, 별거 없더라. 그냥 다 똑같은 경기인데 끝나면 상금을 많이 주는 거?

가볍게 긴장이 풀리기도 했으며.

-다만.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때론 이기적으로 뛰어도 돼.

마지막 한국어로 속삭이는 말에는,

꽤 많은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월드컵에 나갔던 건, 딱 이맘때쯤이긴 했다.

물론 한국대표로 말이다.

그때 당시 나는 한국 대표팀의 막내 축이었지만, 사실상 팀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한껏 거만했었다.

하지만 16강을 결정짓는 주요한 경기에서 발목이 부러졌다.

그전에도 자잘한 부상을 안고 살았지만, 그것이 당시 내 유리 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때부터 민감해졌다.

온갖 기대감을 안고 시작했던 유럽 생활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특히 율리아겐이 내가 뛰던 팀에서 떠나 바이에른 뮌헨으로 갔을 때.

내 악몽은 시작됐다.

부상에 대해 예민해졌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모든 기대를 받던 스타에서, 하위권 팀에서 시즌의 절반을 날리는 유리 몸으로 변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 날카로워졌고, 팀 동료와 수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경기 중에 나에게 거친 반칙을 쓰던 놈에게 침을 뱉은 적도 있다.

'아시아에서 온 선수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멘탈리티.'

'재능은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재능을 갉아먹고 있다.'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기대했던 한국팬들은 서서히 나에게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실패하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

나에게 쏟아지던 건 싸늘한 시선이었다.

K리그에선 감당하기 힘든 연봉.

그러나 시즌의 4분의 3을 병실에서 지내는 처참한 유리 몸.

때문에, 팬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날 좋아하던 소수는 분명 있었다.

데뷔 시절부터, 내가 은퇴하던 시점까지.

끝까지 응원해 주던 소수의 팬.

아주 적지만 분명 존재했다.

다행히 나도 나이를 거꾸로 먹진 않았다.

서른 줄이 넘고, 베테랑이 되어 가면서.

내 수준을 명백히 인식하고 달라지긴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안 그래도 처참했던 피지컬은 노쇠화되어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만 머리로만 먹고 살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은퇴했다.

그렇게 담담하게 내 과거를 떠올리니.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풀렸다.

마치 신부님에게 허심탄회하게 고해성사를 하고, 마음이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선수 가족들의 모든 영상이 끝났을 때.

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뭐 해? 다들 훈련장으로 안 튀어나가고! 팀 클라인의 둘째를 만들기 위해 가자고!"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어안이 벙벙하던 선수들이 이내 유쾌하게 웃으며 떠들어댔다.

"가자! 클라인의 둘째를 봐야지!"

"제수씨 외모 보니까. 다행히 둘째 얼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가자고!"

"제기랄. 둘째에게 빌어먹을 삼촌들이 많이 생겼군."

팀 클라인이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남긴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때론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저번 삶 대부분은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나에게 쏟아지던 기대를 스스로 저버렸다. 그것만큼 이기적인 게 있을까.

이번만큼은.

나에게 쏠린 이 기대감에 보답해 주고 싶다.

반드시.

***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장소, 루사일 아이코닉 스타디움에서 중계방송 전해 드립니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월드컵 결승전이 잠시 후 열릴 예정입니다!]

86,250명의 관중석이 꽉 찬 경기장.

오로지 월드컵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신도시.

그리고 그 위에 만들어진 경기장이었다.

경기장은 순식간에 가득 찼다.

미국과 아르헨티나 양 국가의 팬들부터, 각국의 정상들, 또는 상징적인 인물들로 가득했다.

[축구계의 원로들이 왔습니다! 펠레, 마라도나, 베켄바우어, 알렉스 퍼거슨 경, 조세 무리뉴, 오 이런. 최근 트레블을 이룩한 필마르크 감독도 관중석에서 보이는군요.]

[한편으로는 미국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비하네요! 저기엔 슈퍼볼 우승자 닉 버크도 보이는군요.]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 수많은 관중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경기 전 제퍼슨 리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도전자가 아닙니다."

상대적인 격차가 분명한 양 팀.

아르헨티나와 미국.

하지만 제퍼슨 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결승전을 앞두고 부담감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 부담감에 눌려 숨도 못 쉬는 건 아닙니다. 오늘,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 모든 걸 쏟아부을 겁니다. 정말로, 경기가 끝나고 필드 위에서 쓰러질 각오로 뛸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잔인

해질 생각입니다."

담담하지만 표정에서 읽히는 각오.

그 각오를 들은 세계의 기자들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각오.

그걸 들은 순간, 기자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번 결승전이,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자 특유의 감각에 잡혔다.

***

꽈악!

터널 밖으로 나가기 전.

긴장감을 풀기 위해 잠깐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에스코트할 꼬맹이가 날 방해했다.

자길 봐달라는 것처럼 조막만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쥔다.

슬쩍 시선을 내려 쳐다보니, 곱슬머리의 애기가 수줍게 웃는다. 장난기가 많은 아이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쳐다봤다.

"이름이 뭐야?"

"블랑코!"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흠.

무언가 말을 더하기 시작했는데,

말이 워낙 빨랐다. 그리고 스페인어였다.

카타르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스페인어라니, 좀 웃긴 이야기이긴 했지만.

아마 카타르 쪽에 귀화한 가족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내가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신나서 말을 막 쏟아 대는 아이의 말에 답변할 정도 수준은 아니다.

그렇게 반쯤 못 알아듣고 어색하게 웃고 있을 때.

"자기는 축구보단 테니스가 좋다는군. 근데 테니스보단 네가 더 좋다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리오넬 메시였다.

메시는 아이가 귀여운지 아이에게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아빠가 테니스보단 축구를 좋아한대. 그래서 축구를 배우겠다는군."

"그렇군요."

그러다가 아이가 나와 메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음. 자기한테 축구를 가르쳐 줄 기회를 준다는데?"

"허어!"

이 맹랑한 놈 보소.

나와 리오넬 메시에게 가르칠 기회를 준다고?

솔직히 말해,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으로 아이를 쳐다보자, 아이는 허리춤에 팔을 올리곤 무언가 쪼잘댔다.

메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와 나, 누가 최고냐고 묻는군."

"그건 왜요?"

"더 잘하는 사람한테 배우겠대."

"하하하하!"

메시도 같이 웃었다.

사실 메시를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지금이 처음이지만.

이 귀여운 아이 때문에 우리는 어색하지 않게 서로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의 귀여운 농담이라고 치부하고 터널로 나갈 준비를 할 무렵.

아이는 심상치 않은 얼굴로, 다소 또박또박한 영어로 소리쳤다.

"Who is the Best?"

그 말에 난 메시와 그저 시선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선뜻 우리 둘 다 대답하지 못했다.

묘한 분위기.

나는 씩 웃으며 아이의 눈을 빛나는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경기가 끝나고 알게 될 거야"

< 227. Who is the BEST?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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