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26화 (226/258)

< 226. 간절함의 크기 (3) >

제퍼슨 리가 이학현이던 시절.

대한민국의 축구 천재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했을 때였을거다.

그것도 아마 이맘쯤.

월드컵에 처음으로 나가 16강을 결정짓는 경기에 선발출전 했을 때였다.

그때 일이 터졌다.

물론, 그건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

저주받은 그의 신체가 너무나 허약했던 탓이다. 상대에게는 평범한 바디체크였지만, 이학현은 그때 발목이 부러졌다.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불리며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창, 환상적인 플레이메이커가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한국팬들은 이학현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짖었다.

"언젠간 돌아올 거야!"

"클라스는 사라지지 않아! 폼은 일시적일 뿐이야!"

"한국 대표팀엔 이학현이 필요해!"

"그는 다시 부활할 수 있어!"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시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팬들의 바람은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학현의 축구 인생은 더없는 시궁창으로 가라앉았다.

그건 흡사 늪이었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늪.

하지만 이학현은 축구에 대한 열정을 꺼뜨리지 않았다. 가슴 속엔 늘 억울함과 분노, 한을 간직한 채 뛰었다. 독기와 악으로 뛰었다.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오로지 축구만 생각했다.

그가 수십 년간 품어 온.

두 번째 삶까지 이어져 온 그 모종의 감정을 간절함이라고 표현한다면,

이학현, 아니 제퍼슨 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보다 간절한 사람은 없어."

투욱!

[맥케니의 패스가 하늘로 치솟습니다! 제퍼슨 리! 달려 나갑니다!]

센터서클 바로 밑에서 맥케니가 박스를 향해 냅다 지른 롱 패스.

깔끔하진 않았지만, 박스를 향하는 정확성은 돋보였다.

하지만 너무 높았고, 허공에 체공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미 잉글랜드의 수비진이 박스 안에 우글거리며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그 패스를 지른 순간.

맥케니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오늘, 나에겐 패스 미스는 없을지도 몰라.'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제퍼슨이 있는 팀의 미드필더는 한 번쯤 반드시 하는 생각이었다.

제퍼슨 리는 박스 안으로 길게 향하는 공의 궤적을 보며 몸을 날렸다.

당연히 센터백 존 스톤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그러나.

후웅!

제퍼슨 리의 육체는 단순히 리그 최정상급이 아니었다.

파악!

"끄으읍!"

스톤스는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튕겨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퍼슨의 압도적인 높이와 힘은 익히 알지만,

자신이 이 정도까지 밀린다는 사실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신이 바닥에 착지하고도 그림자로 얼굴을 가릴 정도로 긴 체공시간.

아주 오랫동안 허공에 떠 있는 제퍼슨 리는 공을 그대로 머리로 내리 꽂았다.

그리고.

"꺼져! 올리버!"

제퍼슨의 간절함과는 다르더라도, 그 역시 오로지 이겨야만 한다는 일념에 가득 찬 산티아고가 올리버를 거칠게 넘어뜨리고 박스 안에 침투한 순간.

제퍼슨 리가 내리꽂은 헤더가 그대로 발등에 걸렸다.

완벽한 어시스트.

뻐엉!

[산티아골골골골골골! 산티아고! 산티아고 차베즈! 역전골을 성공시킵니다! 제퍼슨 리의 고공 폭격에 이은 날카로운 비수가 잉글랜드의 심장을 꿰뚫습니다!]

그 순간, 산티아고는 웃었다.

제퍼슨과는 다른 의미의 간절함. 그러나 결코 얕볼 수 없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지.

산티아고는 카메라를 향해 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달려갔다.

지구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

[잉글랜드! 포기하지 않습니다! 후반 77분! 션 올리버! 다리를 절뚝이는데요. 하지만 교체카드는 다 사용한 상황! 뛰어야만 합니다!]

[고통을 참고 뛰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것이 월드컵이죠. 선수들 개개인에게 엄청난 의미죠. 몸이 부서지라 뛰고 또 뜁니다!]

[올리버의 날카로운 패스! 타미 에이브러햄! 환상적인 동작입니다! 그대로! 이런! 어느 순간 3선까지 내려온 제퍼슨 리! 제퍼슨 리가 공을 스틸하고, 냅다 달립니다!]

***

"오늘만큼은 널 저주할 거야! 제프!"

"제프! 런던에서 만나면 널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그게 절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마음이 영 좋지 못했다.

타미는 한 시즌 동안 정말 친했던 동료였고, 올리버도 재밌는 친구였으니까.

나한테 공을 뺏기고 격렬하게 소리치는 것엔, 단순히 장난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진심이 녹아들고 있다.

오늘 나도 꽤 놀랐다.

저들 역시 최선을 다해 뛰고 있구나.

또 절친한 동료들을 상대로 더 냉정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별수 있나.

이게 축구인데.

어쭙잖은 감상 따위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경기의 템포는 극도로 빨랐다.

잉글랜드도 월드컵 우승을 위해 투지를 불사르고 있었고, 우리 역시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그저 미친 듯이 들이박았다.

달려들어서 공을 따내면 즉시 공격이 시작된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공격이 실패하면, 잉글랜드도 곧바로 공격을 시도한다.

끊임없이 서로 움직이고 싸운다.

잉글랜드의 스트라이커인 해리 케인이 두어 번 슈팅을 시도했고,

로드릭이 이를 악물며 막아 냈다.

한 번은 허벅지로, 한 번은 온몸을 날려서 얼굴에 맞으면서까지.

"Wuuuuuuuu!"

잉글랜드 관중은 슈팅이 실패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뜯었다.

시간은 촉박해지고 우리가 1점 더 앞서 있는 상황.

우리는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가 철두철미하게 움직일수록 상대는 바빠진다.

갈 길 바쁜 상대를 괴롭혀 줘야 한다. 그래야 실수를 유도하고 터무니없는 슈팅을 유도할 수 있다.

"달려들어! 미친 듯이 달려들어!"

크리스티안 롤단을 빼고, 이탈리아전에서 터프함을 보여 줬던 조 맥이 투입되었다.

조 맥과 팀 클라인의 늑대 같은 집요함이 잉글랜드 중원을 물고 늘어졌다.

"꺼져! 이 개자식들아!"

머리에 붉게 물든 올리버가 괴성을 내지르며 두 명을 쓰러뜨렸다!

솔직히 말해, 올리버의 저 투지가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동기 부여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지. 저 바람둥이 녀석이 이러는 모습을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은 접어 둬야 한다.

"끄윽!"

올리버가 공을 몰고 패스하려는 순간.

어느새 나타난 산티아고가 뒤에서 거칠게 바디체크를 걸었다.

쓰러진 올리버가 벌떡 일어나 산티아고에게 으르렁거렸다.

흐음.

팀에서는 서로 장난도 많이 치는 사이인데.

산티아고는 오늘 굶주린 늑대처럼 뛰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늑대처럼 필드를 미친 듯이 누볐다.

그의 활동 반경은 최전방뿐만 아니라 2선, 3선까지 내려갔다.

나와 끊임없이 스위칭했고,

그의 활약은 중원에서 밀리고 있는 미국의 미드필더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Wuuuuuuuuuu!"

미국 선수가 공을 잡으면 터져 나오는 야유.

역설적으로, 적의가 가득 찬 야유가 쏟아질 때.

기분이 좋다.

사람들이 성격 이상한 거 아니냐고 물어본다. 간혹 짓궂은 오해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건 아니다. 음, 쉽게 설명하면 이런 거다.

저들은 날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 미국을 무서워하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야유를 쏟아 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몸에 도파민이 솟구친다.

온몸에 활력이 찾아온다.

투욱!

후반 83분. 잉글랜드의 라힘 스털링이 우리의 미드필더를 헤집고 측면으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Yeaaaaaaaaaaa!"

잉글랜드 관중이 울리는 환호가 일순 경기장을 뜨겁게 만든다.

빵빵한 에어컨의 찬바람이 무색하게 뜨거운 열기가 경기장에 내려앉는다.

하지만 갑자기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너무 허무하게 식어 버리기도 한다.

뻐엉!

잭 스테판의 품에 안기는 다소 힘 빠진 슈팅.

잉글랜드 관중이 허탈한 음성을 터뜨리는 순간.

"제-프!"

공이 길게 날아왔다.

***

해리 맥과이어와 존 스톤스. 풀백 아놀드는 달려오는 제퍼슨을 보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조건 막아야 해!'

무언의 시선.

그것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다.

하지만 각오와 달리, 결과는 때론 허무할 때가 있다.

"LEE Will, LEE Will Fuck you!"

그 지긋지긋한 응원가가 귓가에 파고들 때.

골키퍼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막아! 집중해! 막아!"

하지만 그 외침이 허무하게도.

아놀드는 드리블해 오던 방향을 순간적으로 틀어 버린 뒤, 빈 공간으로 뚫고 들어가는 제퍼슨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사람 근육이 저렇게 뒤틀릴 수가 있냐고!'

기겁해서 뒤를 급하게 쫓지만,

이미 가속과 가속이 중첩된 제퍼슨을 쫓지 못하고 그저 등만 바라보며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툭.

자리를 지키며 발을 살짝 내미는 맥과이어를 단 한 번 공을 접은 것만으로도 수비를 무력화 시키고.

툭툭툭툭툭!

양발 사이로 공이 빠르게 오가는 지독한 터치로 공간을 꿰뚫을 때.

"-------!"

존 스톤스가 괴성을 내지르며 골문 앞을 막아서며 슈팅 경로를 막았다.

그러나.

"후웁!"

제퍼슨이 짧게 들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근육과 관절이 기괴하게 비틀어졌다. 터질 듯이 부풀었던 근육이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였고, 근육과 근육이 연결되어 관절을 뒤틀었으며, 끝내는 불가능한 동작으로 연결시켰다.

"······!"

왼쪽, 오른쪽 급격하게 바뀌어 버리는 방향전환.

단 한 번의 터치에 몸이 꺾이고, 두 번의 터치에 반대방향으로 꺾이며. 순식간에 박스 안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쫓아오는 아놀드와 맥과이어.

그리고 앞에서는 존 스톤스와 마지막 골대에는 조던 픽포드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순간 잉글랜드 선수들은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좆됐다!'

골문을 코앞에 두고.

투욱, 툭툭툭!

지독히도 짧은 볼터치의 연속.

접고, 또 접고.

가속 후에 다시 급정지. 그리고 급가속, 급정지.

공을 발바닥으로 긁고, 앞으로 뛰쳐나갈 듯이 상체를 뒤흔들면서.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잉글랜드의 수비수들이 마치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접고, 또 접었습니다! 제퍼슨 리! 잉글랜드 수비진을 농락합니다!]

달려드는 모든 수비수를 끝내 춤을 추는 바보처럼 만들어 버린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 제퍼슨! 제퍼스은!]

맨 먼저 아놀드가 중심이 무너져 넘어졌으며.

뒤이어 맥과이어가 터무니없이 튕겨 나가 떨어졌고.

마지막까지 집중하던 존 스톤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뻗은 손이 어깨에 막혔다.

그렇게 모든 수비를 무력화 시키고,

오른쪽 골포스트 바로 옆. 골라인까지 도달했을 때.

골키퍼 조던 픽포드만이 각도를 좁히며 끝까지 쫓아왔다.

두 눈에 두드러진 붉은 혈관이 그의 집중도가 최고조임을 보여 줬다.

'없다! 각도는 없다! 여기서 슈팅을 때릴 수 없다! 저 각도만 막으면 돼!'

하지만 한 가지에 너무 집중하면, 나머지를 간과할 때가 있다.

오른 발로 때릴 듯이 각도를 만들어내려던 제퍼슨.

순간 그의 오른발 끝에 있던 공이, 왼쪽으로 향했고.

픽포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왼발이 거칠게 휘둘러졌다.

그때서야 픽포드는 기함했다.

'이 자식은 왼발도 악마 같았지!'

그걸 순간적으로 잊고 있던 것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손을 다루듯이 우아하게.

왼발 아웃사이드로 가운데로 툭 내주는 패스.

슈팅이 아니라 패스.

모든 이가 오로지 제퍼슨의 발끝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산티아고 차베즈! 산티아고! 산티아고! 산티아고! 골문을 가릅니다!]

골키퍼가 몸을 날릴 수 없는 반대편 골포스트를 향해.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밀어 넣는 산티아고의 쐐기골.

잉글랜드 선수들은 그 순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

무지막지한 적막과.

싸늘한 침묵이 잉글랜드 관중 사이에 내려앉았을 때.

"Yeaaaaaaaaaaaaaaaaa!"

미국 관중만이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것의 의미는 명백했다.

미국,

월드컵 역사상 첫 결승 진출 확정.

***

미국이 잉글랜드를 꺾고, 결승전 진출을 확정시킨 다음 날.

미국에 축제가 열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수단은 담담하게 피지컬팀의 도움 아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제퍼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감독이 어설프게 웃으며 다가왔다.

베드에 누워 마사지를 받고 있던 제퍼슨은, 감독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크로아티아와 아르헨티나의 4강전이 있는 날이니까.

그리고 저 표정은.

"일이 공교롭게 됐다. 발롱도르 수상에 월드컵 우승이 걸렸어, 제프."

감독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에 있는 TV를 켰다.

마침. 스포츠 채널이 켜져 있었다.

[리오넬 메시! 4년 전의 복수를 성공합니다! 크로아티아를 4강전에서, 2골 2어시스트로 무너뜨리며, 끝내 아르헨티나를 결승전으로 이끕니다!]

리오넬 메시.

"드디어 정면승부네요."

참 공교롭다.

제퍼슨은 쓰게 웃었다.

운명과도 같았던 대진표였고, 거짓말처럼 이렇게 일이 흘러왔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운명이 이끌었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에게 멋진 육체를 달라고 기도했던 시절부터 구르기 시작했던 새로운 운명이.

지금의 이 순간을 위해 흘러왔던 것이 아닐까.

"자신 있냐?"

감독의 물음에, 제퍼슨은 씩 웃었다.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감독님."

상대가 누구였든지 말이다.

< 226. 간절함의 크기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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