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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225화 (225/258)

< 225. 간절함의 크기 (2) >

50,000명을 수용하는 칼리파 국제 경기장.

이곳에선 좋은 기억이 있다.

"여기서 호날두가 아이처럼 질질 짜는 모습을 구경했지."

풀리시치가 가볍게 잔디에서 몸을 풀면서 짓궂게 웃었다.

여기가 조별리그 3차전이 벌어졌던 그 경기장이다.

내가 2골, 산티가 2골을 사이좋게 넣었던 장소.

승리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다.

"월드컵이 끝나고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해."

맥케니가 수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맥케니가 좀 특이하긴 했다.

다른 동료들은 호전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잉글랜드가 멸망하는 날이지."

"독립의 날이야."

"독립기념일이 언젠지는 알고 말하는 거지?"

"아무튼 말이지."

하필이면 상대가 축구 종가, 잉글랜드였다.

더구나 몇몇 삼류 언론들은 괜히 잉글랜드와 미국의 역사적 관계까지 끌고 와 구도를 맞추고 있었다.

사실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는 종류가 아니다.

다만 4강전이라는 부담감.

이것은 나도 솔직히 말해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도 뭐, 경기를 뛰다 보면 감당되겠지.

아무튼 우리 포메이션은 이랬다.

4-3-3의 포메이션.

골키퍼에 잭 스테판.

수비는 왼쪽부터 다니엘 로버츠, 바카, 로드릭, 레지 캐논.

미드필더에는 웨스턴 맥케니와 크리스티안 롤단. 그리고 이탈리아전에서 미국 마초의 터프함을 보여 줬던 터프가이, 팀 클라인.

공격진에는 풀리시치, 나, 산티아고였다.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산티아고와 풀리시치가 공격진에서 발을 맞춘다.

여기에 어느 정도 팀에 창의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맥케니의 투입과, 적당히 볼 전개와 운반에 재능이 있는 롤단.

그리고 거칠고 카드를 받을까 염려되지만, 수비력만큼은 확실한 팀 클라인.

생각보다 공수의 밸런스가 꽤 잘 맞았다.

양쪽 풀백은 수비력은 부족하지만, 적어도 공격력은 괜찮다.

발은 빠르니까.

거기에 툭 튀어나가 롱패스를 질러 주는 로드릭과 전체적인 지휘를 도맡는 커멘더 바카의 수비진.

월드컵 시작할 때만해도, 좀 힘든 라인업이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여기까지 승리를 해왔고, 이제는 어떤 상대가 와도 이길 수 있으리란 위닝 멘탈리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를 박살 내자고!"

"워싱턴처럼!"

"그건 도시 이름 아니야?"

"젠장! 미국 사교육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미국인 특유의 유쾌함과 낙천성이 팀 내에 감돌았다.

그건 지금까지 승리를 겪어 오며 자연스럽게 붙은 자신감에서 기인했다.

물론 우리 팀에도 약점이 하나쯤은 존재한다.

팀이 흥분하면 그걸 말려 줄 수 있는 베테랑의 존재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 이탈리아전에서 좀 이상한 모습이 나오지 않았나.

서로 잔뜩 흥분해서 미친 듯이 날뛰던 장면들 말이다.

그러나.

외려 미국에겐 차라리 그런 게 필요했다.

침착함과 차분함?

그딴 것보단, 남들보다 더 빠르고 강하고, 격렬하게.

마치 미친놈들처럼, 그냥 머리부터 갖다 박아보고 시작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굳이 베테랑의 존재가 꼭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때 풀리시치가 어깨를 툭 치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어기. 올리버가 널 보고 미간을 좁히고 있어."

올리버가 이쪽을 보며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새하얀 거즈를 이마에 붙인 올리버.

그러고 보니 올리버가 정말 열심히 뛰고 있다곤 들었는데.

뭐.

"경기장에선 친구는 없지."

전쟁에서 친구가 어딨겠나.

축구 전쟁이다.

***

사람들은 잉글랜드가 과연 우승후보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곤 했다.

하지만 이젠 4강에 올라온 팀은, 누구나 우승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브라질을 이기고 올라온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박살 내고 2년 연속 4강에 진출한 크로아티아.

축구 종가의 명성, 잉글랜드.

축구계의 변방에서 이번 대회 가장 큰 이변으로 통하는 북중미의 미국.

매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 브라질, 독일 등의 팀이 없지만.

이젠 이 네 개의 팀에서 우승팀이 반드시 나온다.

그리고 그런 잉글랜드의 중심은, 의외로 이번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주전을 쟁취한 션 올리버였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션 올리버가 산티아고에게 거친 태클로 응수합니다! 공을 빼내고, 벌떡 일어나 곧바로 공을 전개합니다! Oh! 절묘한 패스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선수의 변화를 보고 놀라곤 한다.

프로에서 뛰고 있는 선수라면, 본래의 플레이 습관이 잘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월드컵에서 올리버의 변신은 꽤 놀라운 것이었다.

[첼시에 이적하고 점점 발전하고 변화했던 션 올리버입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기량이 만개하는군요! 그는 파이터입니다! 온몸이 부서지라 뛰고! 또 뜁니다!]

미친 듯한 활동량.

때로는 하프백처럼 수비진 사이에 위치하고, 3선에서 포백을 보호하고, 가끔은 2선까지 공을 몰고 들어갔다.

전후좌우로 미친 듯이 날뛰며 공을 향해 태클하고, 넘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대가 슈팅을 시도하면 온몸을 날려서 몸으로 막아 내는 그 치열한 헌신에 사람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도대체 무엇이 선수에게 변화를 이끌어 냈는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관중들에게 중요한 건, 선수가 몸을 던져 보여 주는 헌신이었고, 그 헌신으로 말미암아 잉글랜드가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차베즈! 션 올리버의 태클에 넘어지고도, 곧바로 벌떡 일어나 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맹렬한 기세입니다!]

서로가 각자의 이유를 안고 뛴다.

션 올리버는 축구선수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머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한 산티아고는, 오로지 병실에서 자신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할머니를 위해.

각자가 가진 치열한 간절함.

[산티아고의 슈팅! 오오! 션 올리버가 머리를 갖다 댑니다! 이런! 션 올리버의 얼굴에 피가 흐르는 군요! 스터드에 긁혀 상처가 찢어진 것 같습니다!]

넘어질 듯 말 듯,

수많은 태클과 거친 몸싸움. 온몸에 스며드는 충격을 이겨 내고 간신히 때린 마지막 슈팅.

그리고 그 슈팅에 망설임 없이 머리를 갖다 박아 버리는 션 올리버의 수비까지.

꿀꺽.

몇몇 관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각자의 이유.

그러나 선수들이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선수들의 투지와 혈투 속에서, 관중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Yeaaaaaaaaaaaaaa!"

"Wuuuuuuuuuuuu!"

"USA! USA! USA!"

그저 미친 듯이 응원을 내뱉을 수밖에.

비단 둘뿐만이 아니었다.

해리 케인과 타미 에이브러햄은 미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스트라이커로서 늘 2인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엄청난 득점 기록을 세우고도 늘 제퍼슨에 밀려 2위에 불과 했던 해리 케인.

'정든 첼시를 떠난 건, 어쩔 수 없었어.'

월드컵을 위해. 제퍼슨이란 거대한 벽을 끝내 넘지 못하고 맨유로 이적했던 타미 에이브러햄.

둘 다 제퍼슨을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했다. 그러면서도 그와 맞부딪친 이 대결에서 입증하고 싶었다.

자신들도 세상에서 대단한 스트라이커임을.

오늘 이 경기에서 보여 줘야 했다.

제퍼슨 리라는 거대한 선수 외에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그렇게 서로가 간절한 이유를 안고 뛰었다.

[해리 케인의 헤더! 제임스 로드릭이 막아 냅니다! 튕겨져 나오는 공! 아무도 없습······ 오 이런! 타미 에이브러햄이 있습니다! 그대로 허벅지에 맞고! 골문을 가릅니다! Gooooooaaaal!]

[golgolgol! 잉글랜드가 타미 에이브러햄의 선제골로 1대 0! 앞서갑니다!]

어쩌면 그 간절함은, 잉글랜드 선수들이 가진 것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승부의 추가 일찍이 잉글랜드에게 기울어지는가 싶을 때.

[곧바로 이어지는 미국의 볼 전개입니다! 웨스턴 맥케니, 공을 잡고 곧바로 풀리시치에게! 풀리시치! 내려와 공을 받습니다!]

"풀리시치!"

"꺼져, 올리버! 오늘 만큼은 널 죽일 수도 있으니까!"

풀리시치는 공을 우아하게 받아놓으면서, 동시에 달려드는 올리버를 물 흐르듯이 피해 빠져나갔다.

그리고 순간 탁 트인 눈앞의 광경이 시야에 담겼다.

비록 제퍼슨과 산티아고에 비교해 손색이 있지만, 그도 엄연히 빅클럽에서 도움왕을 차지했던 타고난 천재였다.

단 한 번 앞을 스쳐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타고난 감각이 필드 위의 선수들의 움직임을 모두 캐치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순간 자신이 빠진 왼쪽 측면으로 달려 나가는 제퍼슨의 움직임이 잡혔다.

"뛰어!"

뻐엉!

가죽이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풀리시치가 망설임 없이 길게 공을 차 냈다.

밀집된 수비의 머리를 넘겨 왼쪽 빈공간을 향해 내지르는 긴 로빙패스.

[이런! 너무 깁니다! 터치라인을 벗어나 공이 아웃······!]

너무나 길었던 패스.

터치라인 선상 위에서, 부심이 깃발을 들어 올릴 준비를 마친 순간.

"으아아아아!"

[제퍼슨입니다! 제퍼슨이 공을 살려 냅니다!]

전력 질주로 터치라인까지 뛰어온 제퍼슨이 그대로 달려들어 공을 향해 머리를 내던졌다. 이마에 공이 맞는 수간 기묘한 각도로 고개를 틀었다.

공은 이마에 맞고 터치라인 코앞에 바로 떨어졌다.

"······!"

그토록 강한 힘인 담긴 패스를, 바디 밸런스가 맞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무나 우아하게 잡아 놓는 환상적인 트래핑.

[맙소사! 세상의 미드필더들에겐 제퍼슨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존재일 겁니다!]

[그에겐 패스 미스란 단어 자체가 없습니다!]

패스 미스.

애석하게도 제퍼슨에게 향하는 패스에는 미스가 없었다.

터무니없이 높고 긴 패스여도, 제퍼슨은 그걸 끝내는 받아 냈다.

[제퍼슨! 달리기 시작합니다! 공을 트래핑하고, 곧바로 뛰쳐나갑니다!]

[질주합니다! 질주!]

터치라인 근처에서 겨우 트래핑해 낸 그 동작 그대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질주.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힘과 속도.

제퍼슨을 향해 냅다 달려가던 올리버는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대체, 대체,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냐!'

그는 그저 질린 눈빛으로 제퍼슨의 등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가속, 가속, 가속!

숨이 넘어갈 듯한 그 가공할 속도.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한 그의 가공할 속도는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했다.

그의 폭발적인 가속에, 수비수는 공을 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손을 뻗어 파울로 제퍼슨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타앗!

그러나 거칠게 걷어 내는 제퍼슨의 손목 스냅에 수비수는 중심이 무너져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유니폼을 잡아 끌면 무엇 하는가.

저 폭발적인 가속엔 환상적인 무게 중심까지 버텨 주고 있는데!

[제퍼슨 리! 그대로 수비수를 지나쳐 달립니다!]

파비앙 델프와 해리 맥과이어가 좌우에서 급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제퍼슨의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급격한 방향 전환으로 치고 들어오는 델프의 역방향으로 빠져나가려는 제퍼슨 리.

'왼쪽!'

파비앙 델프는 선택했다. 따라가서 공을 잡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달려들어 바디체크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

파울로 막겠단 생각이었다.

때문에 그의 허벅지엔 힘이 실렸다.

전속력으로 내달려 몸으로 찍어 누르겠단 속셈.

두 명 다 큰 고통을 느끼겠지만, 델프는 느꼈다. 저 폭발적인 가속을 멈추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그렇게 몸을 내던지려는 순간.

투욱!

완벽한 급정지.

공을 발바닥으로 긁어 내는 드래그 백.

오른발로 긁어 낸 공을 안쪽으로 치고, 180도 터닝.

그리고 다시 한번 폭발적인 가속.

"미친!"

제퍼슨은 델프와 맥과이어의 사이를 그대로 꿰뚫었다.

탄환처럼 튀어나간 제퍼슨은 빛처럼 쭉 이어졌다.

[도대체 이걸 뭐라 해야 할까요! 델프와 맥과이어가 무너집니다!]

맥과이어와 델프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그들은 놀라다 못해 경악하고 있었다.

너무나 빠른 스피드.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동작이 연이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제퍼슨은 달리고 있었다.

[제퍼슨! 하나, 둘! 오! 세 명! 네 명! 맙소사! 다 제쳐 냅니다!]

마지막 남은 풀백과 센터백마저 제쳐 내고 박스 안으로 들어온 순간.

"후웁!"

제퍼슨은 폐가 쪼그라드는 고통을 참아 내며 숨을 들이켰다.

허파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머릿속을 찌르지만,

역설적으로 강한 흥분이 온몸에 타고 흘렀다.

삐이이이이이.

순간 귀에 이명이 울리며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다.

정지된 시간의 흐름.

눈앞의 마지막 골키퍼가 아주 천천히, 슬로우 화면처럼 움직인다.

박스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는 마지막 수비수들의 동작이 모두 머릿속에 잔상처럼 스쳐간다.

상대의 표정과 근육의 움직임. 상체와 하체의 방향.

그 모든 걸 뇌리에 담은 순간.

그의 선택은 결정됐다.

"후우."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는 순간.

정지됐던 시간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골키퍼가 일그러진 얼굴로 튀어나왔다.

제퍼슨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터져 나왔다.

허벅지의 근육이 역동하며 부풀고

디딤발이 땅에 뿌리박듯이 필드를 밟고.

제퍼슨의 상체와 뒤로 길게 빼낸 반대편 다리가 터져나가듯이 앞으로 쏘아졌다.

상체가 둥글게 휘어지며, 오른 발등이 공에 임팩트 되는 순간.

제퍼슨은 생각했다.

'20년. 그 이상을 오로지 축구를 위해 살아왔고, 드디어 이 자리까지 왔다.'

각자가 지닌 간절함.

그러나 제퍼슨은 두 번의 생을 거쳐 그 간절함을 키워 왔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신을 찾으며 억울함을 토로했던 그 간절함.

만일 간절함이 스포츠의 승부를 가른다면,

간절함의 크기가 결정을 짓는다면.

제퍼슨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경기는, 내가 이긴다."

뻐어어어엉!

[Goooooaaaaaaaaal! 제퍼슨 리의 원맨쇼입니다! 그의 환상적인 돌파, 치명적인 동점골! 잉글랜드의 심장에 탄환이 파고듭니다!]

< 225. 간절함의 크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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