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간절함의 크기 (1) >
스코어 3대 1.
8강전,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 많은 경고가 주어지긴 했다.
그러나 크게 걱정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반칙과 거친 플레이를 유지하던 선수들은 백업 멤버였으니까. 4강전에는 아마 본래의 베스트 일레븐이 출전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8강에서 이탈리아를 잡아내면서.
미국은 4강이라는 엄청난 신화를 이룩하게 됐다.
[미국이 4강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1930년 이후 무려 92년 만에, 그렉 버홀터 감독과 그의 빛나는 제자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성과입니다! 미국 시민 여러분,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십시오! 미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도 달아오른 흥은 쉽게 식지 않았다.
관중들은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노래를 불렀다.
나 역시도 내 이름을 외치는 팬들을 향해 다가갔다.
유니폼과 신발을 벗어 주고 사진까지 찍느라 바빴다.
심지어 월드컵 탈락에도 떠나지 않고 경기장을 찾아온 소수의 한국팬들은 끝까지 날 응원해줬다.
"고마워요!"
"어쩌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국인 중에 1등일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승하세요!"
"저, 사진 한 장······."
사진을 찍을 땐 내 손엔 태극기와 성조기가 같이 들렸다.
흠. 한국 커뮤니티에서 꽤 화제가 될 만하겠군. 이 양반이 인터넷에 올린다면 말이야.
아무튼 분위기는 엄청, 뜨거웠다.
[월드컵 핫토픽, 제퍼슨에게 찢어진 이탈리아의 수비진.]
[이탈리아의 패인은 미국의 터프함을 이겨 내지 못한 것.]
[제퍼슨 리는 가장 용맹한 캡틴임이 틀림없다.]
특별히 세련된 전술은 아니다.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
왕성한 활동량과 터프함을 넘어선 폭력적인 미드필더 둘이 만들어 낸 투박하고 거친 플레이.
그것에 이탈리아는 맥을 못 췄다.
물론 이탈리아도 반격할 수 있지만, 이미 16강에서 지칠 만큼 지친 상태. 거기에 자칫 거칠게 하다 경고를 받으면, 4강전에 경고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는 선수가 네 명이나 됐다.
어쩔 수 없이 소극적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그 약점을 제대로 물고 늘어진 결과였다.
거기에 내가 해트트릭까지 터뜨리면서.
이탈리아가 반격할 힘조차 무너뜨렸다고 보면 된다.
[캡틴 아메리카의 폭발적인 득점력! 득점 13점으로 선두!]
[북미의 왕, 세계를 정복하는 중.]
북미 전체가 뜨거웠다.
심지어 이런 통계도 나올 정도였다.
[미국의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엔, 강력범죄 비율이 30% 이상 하락한다.]
신기한 일이다.
길거리에 시민들이 뛰쳐나와 응원을 펼치고.
들뜬 연기와 흥분된 상태 속에서도 범죄율이 떨어지는 상황.
그만큼 월드컵이란 축제가 이들에게 다가가는 의미는 컸다.
그래서 전해져 오는 부담감도 크다.
"사실 4강 이후로 준비한 건 없어."
버홀터 감독도 기뻐하면서도 썩 당황한 눈치였다.
설마 미국이 4강까지 올라올 줄은, 그것도 쉽지 않은 상대를 번번이 깨고 올라올 줄은 몰랐으리라.
아무튼 4강부턴, 객관적인 전력을 떠나 정신력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팀이 다른 나라보단 낫지만,
그래도 이젠 서서히 체력적인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전을 치르면서 몸에 자잘한 부상이 생긴 친구도 있었다. 피지컬 팀에서 급히 움직인다고 해도, 다음 4강전까지는 고작 3일 밖에 시간이 없다.
아무리 율리아겐이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
"4강은 잉글랜드하고 독일전의 승자와 맞붙지. 제프, 어디가 상대하기 편해?"
감독의 질문에 잠깐 생각했다.
잉글랜드와 독일이라.
흐음.
음.
"솔직히, 상관없는데요?"
진짜로.
***
잉글랜드와 독일의 4강전.
[마크 우트의 돌파! 오! 이런, 거친 태클에 쓰러집니다! 션 올리버가 튀어나와 거친 태클로 무너뜨리네요!]
우트는 애꿎은 잔디를 주먹으로 때리곤, 신경질적으로 올리버에게 소리쳤다.
"젠장! 우리가 런던에 돌아가면 웃으면서 만날 수 있을까?"
"우트, 보통 잘생긴 사람을 보면 호감을 느끼지. 넌 곧 풀릴 거야."
"솔직히 지금 네 얼굴이 잘생겨 보이진 않는데."
올리버는 우트의 날선 말에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까 수비를 위해 공을 향해 머리를 던졌다가,
상대 선수의 스터드에 긁혔다.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왔고, 붕대를 감았지만 얼굴에 묻은 피딱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곱상한 올리버라고 믿기지 않는 모습.
우트가 혀를 내둘렀다.
"월드컵이 월드컵이군, 올리버. 첼시에서도 이렇게 뛰면 캉테도 이기겠는데?"
"흥. 16강 진출 못한 캉테보단 내가 낫지."
"아직 경기 안 끝났어. 반드시 골 넣어서 널 먼저 런던으로 보내지."
올리버는 대답 대신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핏물이 잇새에 새겨져 있어 다소 섬뜩한 미소.
우트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월드컵이 어떤 의미인지. 그 바람둥이 사고뭉치를 헌신적인 플레이어로 만들다니."
올리버는 우트의 중얼거림을 한 귀로 들으면서 생각했다.
'글쎄.'
자신이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뛰게 될 줄이야.
물론 선수로서 월드컵에서 뛴다는 건 큰 영광이긴 하다. 그러나 이렇게 까지 몸을 던져가며 뛸 줄은 몰랐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에게 있어 축구는 단지 자신이 빛날 수 있는 부차적인 직업일 뿐이었다.
현직 축구선수인 잡지 모델과 패션사업 CEO!
그런 후광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첼시로 이적 후, 제퍼슨과 경기를 뛰면서 많이 바뀌었다.
'축구만으로 찬란히 빛나는 사람!'
오로지 축구로만 사람이 빛날 수 있다는 걸 그는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자신이 내뿜고 있는 빛 따위는 초라한 촛불처럼 느껴질 정도로.
눈부신 후광이 제퍼슨의 뒤에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타고난 재능.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노력이 합쳐진 빛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올리버의 생각을 많이 바꿔 놓았다.
'주목받고 싶었지.'
속된 말로 '관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올리버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건, 일종의 애정결핍이었다.
부모님의 별거와 이혼. 양쪽 어디로도 가지 못한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축구를 했다. 공 잘 찬다고 사람들이 치켜세워 주고 관심을 가져 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워낙에 힘든 스포츠니까. 서서히 지쳐갔다. 흥미도 떨어지고, 그의 애정 결핍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올리버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남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쪽으로.
한데 최근,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가족이 할아버지부터 대대로 첼시 팬인 그 여자는 올리버가 본업인 축구에서 프로페셔널하고,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이면 좋겠단 말을 했었다.
흘러가는 듯이 했던 말.
어쩌면 그것이 올리버가 바뀐 결정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우스운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축구를 하는데 특별한 동기 부여가 필요하나.
'나름 간절하다고.'
선수들은 누구나 각자의 이유를 안고 뛴다.
그것이 가족이든, 본인의 명예욕이든, 아니면 단지 돈이든지.
누구나 간절함을 마음에 품고 있고, 그것의 크기는 다른 법이다.
그리고 오늘 경기.
올리버의 간절함의 크기가, 독일의 그것보다 더 컸다.
[잉글랜드! 해리 케인의 선제득점을 꿋꿋이 지켜 냈습니다! 경기! 끝납니다! 잉글랜드가 전차군단 독일을 꺾고 4강에 진출합니다!]
잉글랜드가 4강 진출이 확정됐다.
경기가 끝나고, 올리버에게 우트가 다가와 유니폼을 교환하자고 했다.
"축하해, 올리버."
"축하는 무슨."
올리버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4강.
이제 한 경기만 더 치르면,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축구선수로서 프로페셔널함을 인정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행복한 상상은 우트의 중얼거림에 깨졌다.
"하긴. 축하할 이야기는 아니군."
"어?"
"4강에서 네가 막아야할 선수 알잖아."
"누군데?"
"이탈리아하고 미국전이 방금 전에 끝났어. 누구일 거 같아?"
우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왠지 악동처럼 짓궂어 보였다.
그 순간에 올리버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Oh, Shit."
"제프를 막아 보라고, 친구."
어쩌면.
그 간절함을 시험하기엔, 너무 잔혹한 무대가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
세상엔 좋은 일만 가득하진 않다.
예정된 불행이 찾아올 때가 있다.
월드컵이 시작하고도 부모님이 카타르에 오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후우. 산티가 빠지다니."
산티아고는 급히 공항으로 떠났다.
산티아고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가 최근 1년 동안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같이 지내면서 돌봐 주고 계셨다.
월드컵이 시작할 쯤에 건강이 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부모님이 산티의 할머님과 같이 계시느라 날 응원하러 오지 못했다.
뭐, 그런 게 섭섭하지는 않다.
나도 산티 할머님을 많이 봤으니까.
산티하고 고등학교, 토론토에서 같이 뛰면서 우리 가족에겐 산티의 할머니가 사실 내 할머니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쨌든.
바로 어제 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위독하단 소식이 전해졌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린 산티아고가 급히 공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
"제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라."
"물론이죠, 감독님."
산티아고가 떠난 건 나에게도 힘든 일이다.
4강까지 온 건 산티가 내 옆에서 같이 뛰어 줘서 가능했다.
내 기록이 압도적이라고 한들, 많은 사람이 오로지 나만 주목한다고 해도.
산티가 수비 두셋을 갖고 노는 클래스를 지니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 못 한다.
산티가 있기에 내가 이번 월드컵에서 더 폭발적일 수 있었다.
산티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삐익, 삑!
그 빈자리는 훈련장에 들어가서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 믿을 선수가 하나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플레이에 큰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풀리시치와 맥캐니가 있지만, 최전방에서 나에게 쏠린 견제를 상당수 가져가는 산티아고의 존재는 우리 미국에 핵심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미국은 말 그대로 끔찍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 것들이 맞물려 중압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산티 녀석 얼굴이 이렇게 보고 싶을 줄이야."
혼잣말로 푸념을 늘어놓을 때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내가 보고 싶었던 거지?"
"산티?"
"봐봐. 말하지 않아도 안다니까."
솔직히 조금 놀랐다.
산티가 훈련장에 빙글거리며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물며 산티아고의 헤어스타일이 다소 바뀌어 있었다.
"웬 염색이야? 아니, 그건 그렇고. 미네소타에 안 갔어?"
"괜찮아, 괜찮아. 이제 고작 9일인데 뭐. 할머니도 그때까진 무탈하실 거야. 근데 눈이 조금 잘 안 보이시잖아."
"아."
"그래서 일부러 보라색으로 염색 좀 했어. TV로 볼 때 내가 잘 보이게."
산티아고는 대수롭지 않게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산티와 함께 뛰어 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격동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노력이 보였다.
아무튼 산티아고는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월드컵의 남은 경기를 마저 치르고 가는 결정을 택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분기점이 될지는 모른다.
어쩌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그의 선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후우, 산티. 네 덕분이라도 4강전은 무조건 이겨야겠어."
"물론이지, 제프. 난 이기려 공항에서 돌아온 거야.생각해 보니 슈퍼히어로 곁에는 사이드킥(SideKick : 히어로와 함께 행동하고 지원해 주는 역할)이 있어야 하잖아?"
산티의 넉살에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감독이 피식 웃었다.
"아시아계 캡틴 아메리카에, 멕시칸 팔콘이라. 역시, 이게 미국이지."
흠.
재미있는 조합이긴 하네.
훈련장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살아났다.
돌아온 산티를 보며 동료들이 머리를 툭툭 치고, 담담하게 환영해 줬다. 살짝 죽어 있던 분위기가 확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산티는 웃고 있지만,
아마 속은 그 누구보다 간절할 것이다.
위독하시다는 할머님에게 단 한시라도 빨리 다가가고 싶은 심정을 꾹 누른 채 이곳에 왔으니까.
하긴.
월드컵이란 대회에, 그 누가 간절하지 않는 선수가 있겠나.
이젠 그 간절함의 크기가 운명을 결정할 때다.
< 224. 간절함의 크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