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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223화 (223/258)

< 223. Fucking American (2) >

한국이 16강에서 탈락하고 귀국하게 되면서 원정 응원단도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남아서 월드컵을 즐기고자 했다.

특히, 이탈리아전이 너무 찜찜하고 안 좋게 끝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다음 경기를 꼭 보고싶어했다.

더구나 8강전이 이탈리아와 미국의 매치업이 아닌가.

미국에는 다름 아닌 제퍼슨 리가 있다.

한국계 혼혈 선수로 피파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최고의 스트라이커.

"제훈이가 복수해 주겠지."

"근데 이탈리아가 이기지 않겠냐?"

"플레이가 더럽긴 한데. 실력은 진짜잖아."

"아. 이탈리아가 이기면 개빡칠 것 같은데."

경기장엔 이탈리아 관중들과 미국인 관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극히 소수에 불과한 한국인들은 이내 어느 쪽 좌석 티켓을 구매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Oh, Korean?"

그때, 덩치 큰 턱수염의 미국인이 갑자기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한국인들이면 이쪽으로 오라고!"

"우린 동료지!"

"같은 팀이라고!"

뜻밖의 환영에 한국인 관중들은 얼떨떨해하며, 미국 관중 좌석의 티켓을 구매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래 월드컵에서 타국의 관중이 찾아오면, 그 관중에게 자신의 국기를 걸어 주는 장면이 꽤 자주 나온다.

같이 응원하자면서 말이다. 그것이 월드컵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 중 하나였다.

하물며 미국이 이탈리아를 박살 내주길 바라는 한국인들이야.

미국인들은 유쾌하게 그들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복수를 해 주지!"

"동맹국이잖아?"

"어, 음. 이탈리아도 미국의 동맹국 아닌가요?"

"괜찮아! 난 무솔리니가 싫어!"

언제적 무솔리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 관중들은 웃으며 미국인들과 좌석에 앉았다.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오는 미국 선수들을 보는 순간.

서로 다른 문화권의 두 국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똑같이 소리쳤다.

"제-퍼-슨!"

축구라는 공통점이, 그들을 묶고 있었다.

***

"Wuuuuuuuuuuuuu!"

적대적인 목소리와 야유.

"USA! USA! USA!"

거기에 뒤지지 않는 호의적인 응원까지.

좋아. 역시 이래야 우리팀이지.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쪽 목소리가 더 크다.

아무튼 우리를 향한 이탈리아 관중의 적의는 단순한 적의가 아니었다.

분노?

어쩌면 살인 욕구?

뭐, 그런 것들?

이탈리아는 좀처럼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조심스러운 볼터치와 패스가 연이어 이어졌다.

답답한 양상이 보이려고 하자, 이탈리아 관중들은 자기네 선수가 아닌 우리들에게 욕설을 집어던졌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 개 같은 자식들아!"

비명인지 욕인지.

좀 미안하긴 한데.

이탈리아의 핵심 미드필더, 산드로 토날리는 필드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맨시티에 이적해 제 2의 피를로라고 불리던 선수로, 이탈리아의 플레이 메이커였다.

하지만 우리 팀 더블 볼란치로 출전한 두 명. 조 맥과 팀 클라인이 산드로 토날리를 완벽하게 지우고 있었다.

뻐억!

"꺽!"

뻑!

"끄윽!"

삐비빅!

흠.

뭐, 지우는 방식이 좀 특이하긴 하지.

그걸 지운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만.

마치 볼펜으로 쓴 글자가 안 지워져서, 지우개로 막 뭉개다가 종이를 찢어 놓고, 다 지웠다! 라고 순진하게 말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두 명의 터프가이는 중원에서 강력한 차징과 터프한 플레이로 이탈리아를 꼼짝 못 하게 했다.

현재 우리의 포지션은 4-3-3.

세 명의 미드필더와 세 명의 스트라이커.

미드필더 세 명엔 롤단이 조금 풀어 주는 역할을 했고, 조 맥과 팀 클라인이 더블 볼란치의 룰을 수행했다.

산티아고와 조던 모리스가 최전방에 서고, 내가 그들 보다 약간 내려앉아 지원하는 형태.

뭐, 이렇긴 하지만 내 역할은 프리롤이다.

즉.

내 맘대로 하는 거다.

"제프!"

"Wuuuuuuuuu!"

"Yeaaaaaaa!"

팀 클라인이 우당탕탕 뺏은 공이 내게 오자, 온갖 야유가 쏟아진다.

가끔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야유가 들리면 그 야유를 하는 주둥이를 때려 주고 싶단 생각.

그러나 내가 관중에게 쿵푸킥을 날린 칸토나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이 분노를, 너희가 사랑하는 선수들에게 쏟아 낼 수밖에.

"산티! 앞에서 날뛰어! 내가 좀 내려갈게!"

"오케이!"

산티는 내 얘기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내가 밑으로 내려가 중원에 힘을 실어 주겠다는 말엔 여러 의미가 있다.

공격의 연결고리를 매끄럽게 해 주는 것과 더불어.

빠악!

"크으윽!"

"무, 무슨 몸이!"

"제기랄! 제프! 너를 여기서 만나긴 싫었어!"

미드필더 사이에서 날뛰면서 적의 진형을 붕괴시킨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특히 첼시에서 같이 뛰었던 조르지뉴가 나와 경합을 벌이다 쓰러지곤, 저렇게 소리치곤 했다.

세상에. 조르지뉴가 이리 순진한 양반이셨나.

여기에 동료가 어딨나.

"조르지뉴, 오늘은 우리 일생일대의 적입니다! 실망하지 말아요!"

"살살해, 살살! 누구 하나 죽일 일 있어?"

"뭐, 거의 반 죽여 놓으려고 마음먹고 오긴 했어요. 조심해요."

"뭐?"

흠. 조르지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무튼 조 맥과 팀 클라인은 헌신적인(상대방에겐 폭력적인) 움직임으로 공을 선점했다.

이어 롤단에게 패스.

롤단은 무리하게 공을 돌리지 않았다. 위험한 스루패스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창의력이 높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나에게 온 패스.

"뛰어!"

누구를 지칭한 건 아니지만,

기특하게도 산티는 말없이 박스를 향해 뛰었고, 모리스도 뒤늦게 선수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받고, 왼쪽으로 공을 툭 치면서 가볍게 터닝해 미드필더 하나를 벗겨낸 후 스프린터.

파바박!

"거리 내주지 마!"

"공간 주지 마! 공간 내주면 저 스피드 못 잡아!"

조르지뉴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

그러나 토넬리는 팀 클라인이 해결했다. 나에게 덤벼드는 건 조르지뉴와 니콜로 바렐라.

둘 다 좋은 선수지만.

글쎄.

나보다 피지컬이 좋진 않단 말이지.

서서히 속도를 내면서.

비교적 끈질기게 매달리는 니콜로 바렐라를 어깨로 밀어 넘어뜨린 뒤,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개자식!"

다음에 나타난 건 밀란의 수비수 알레시오 로마뇰리.

두려워할 건 없다.

멈칫할 것도 없다. 생각할 시간 따위는 사치다. 이미 최고속도에 도달한 가속도. 생각할 시간보다 내 몸이 움직이는 시간이 더 짧다.

이때는 생각보단 행동으로, 이성보단 본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본능이 어디서 오는가?

타고난 축구 센스에서 나온다.

투욱!

"제기랄!"

오른발로 공을 살며시 끌다가 순간적으로 왼쪽 대각선으로 빠져나가는 사이드 스텝.

툭툭툭툭!

지독히도 짧은 볼터치로 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며.

왼쪽, 오른쪽, 공을 드레그 백 한 뒤 다시 전진.

30도, 60도, 40도로 급격하게 꺾어 버리는 드래프트.

"미친!"

아연해하는 로마뇰리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 버리며 크게 공을 치고 달렸다.

"Wuuuuuuuuuuuuuu!"

더 커지는 야유.

느껴진다.

저 야유엔 적의보단,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살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그들의 시선 속엔 오로지 나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이거다. 심장이 뛰고, 온몸에 닭살이 올라온다. 도파민이 퐁퐁퐁 솟구치고 근육이 팽팽해지며, 긴장감이 아슬아슬한 선 위로 쭉 내달린다.

온몸의 감각이 확장되고 개방되며 아드레날린이 뇌 속을 마구 휘젓는다.

이 순간에.

나는 신이 된 것처럼 뭐든지 할 수 있다.

시간이 느려지며 내 행동이, 내 움직임이, 내 근육이 컨트롤된다.

"제발!"

양쪽 풀백이 내 양 어깨 사이로 치고 들어온다.

오른발로 한쪽 측면을 뒤흔들어 버리고, 왼손으로 한 놈의 상체를 지그시 밀어 내며.

"젠장!"

"어억!"

고통스러운 신음을 감상하면서.

공을 왼발로 찍고 축으로 삼아 가볍게 터닝.

"오! 신이시여!"

"제에바아아알!"

이탈리아 관중의 절규가 어렴풋이 귓가에 꽂히자, 역설적으로 온몸에 흥이 난다.

남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건 썩 좋은 취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필드 위에선 나쁜 취미는 아니다.

양 풀백은 무너졌다.

남은 건 마지막 센터백. 나폴리의 프란체스코 아체르비가 이해할 수 없는 이태리어로 무어라 지껄이며 태클해 온다.

"---!"

위험한 슬라이딩 태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조급함.

피하면서 넘어질까? 그러면 페널티킥인데.

하지만 심판이 한국전처럼 오심을 하면?

심판에게 기대는 선택 따윈 하지 않는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

툭,

왼발에서 오른발로.

툭!

오른발로 드래그백하며 백스텝.

후웅!

아체르비의 슬라이딩 태클이 잔디를 가르고.

"#@##@!#!!"

흠.

저것도 욕 같은데.

이러다가 유럽의 모든 언어로 된 욕은 다 들어보겠군.

드래그백 한 공을 앞으로 다시 툭 치면서 스프린터.

그리고 튀어나오는 골키퍼.

공을 다시 안쪽으로 끌어당기며 가볍게 왼발, 오른발 플립플랩 후 왼쪽으로 스프린터를 터뜨리며 전진.

그 모든 동작이 딜레이가 전혀 없이 이뤄지는 순간.

내 몸의 근육이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근육은 이렇게 외친다.

이제 저 빈 골대에 후려갈겨!

이 모든 일련의 동작이 끝났을 때.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이탈리아 관중이 보이고.

더 너머, 환호하고, 소리치고 웃고 있는 미국과 한국인의 무리가 보인다.

"복수다, 이 개자식들아!"

뻐어어어어어엉!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골키퍼는 벗겨졌고, 나에겐 빈 골대니까 툭 밀어 넣어도 된다.

그렇지만, 나는 있는 힘껏 공을 후려갈겼다. 내 허벅지 근육에 모여든 모든 근력이, 가속도와 더불어 임팩트 되면서 골네트를 찢을 듯이 꽂혔다.

"----------!"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올라, 내 주위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모를 때.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들렸다.

"제퍼슨! 다 죽여 버려!"

***

조 맥과 팀 클라인은 제퍼슨에 대해 경외감을 느꼈다.

그 화려한 선제골 때문에?

아니다.

"끄으으윽!"

고통스러워하는 상대 미드필더를 보며, 조 맥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였다.

그는 MLS에서 가장 많은 카드를 받은 선수였다.

거칠 것 없는 터프한 플레이 덕분이다.

왜 그런 플레이를 즐기느냐고 누군가 물었었다.

'이게 스포츠지!'

그랬다. 그는 주먹질은 하지 않아도,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미친 듯이 격렬한 게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질 때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쏟아지는 건 경고와 파울.

경기에 오래 뛸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제퍼슨이 알려 준 '절묘하게 수비를 깨부수는 법'은 거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가르침이었다.

심판이 보지 않게 은근슬쩍.

상대 미드필더를 붕괴시키는 이 손기술이라니!

"캡틴은 캡틴이군!"

조 맥과 팀 클라인은 히죽이면서 무자비하게 상대 미드필더들을 짓밟았다.

***

[제퍼슨 리가 중원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맹렬한 전차 같습니다! 아니, 양떼에 풀어 놓은 늑대 같아요! 아니죠. 늑대가 저렇게 크지 않죠. 이건 숫제 불곰이나 다름 없군요! 필드의 포식자가 이탈리아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제퍼슨 리는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신기한 광경이다.

어떤 수비수든, 미드필더든.

제퍼슨이 달려오는 순간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튕겨 나갔다.

그토록 단단한 이탈리아의 수비진이 너무 쉽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치 버스를 세워 놓은 것처럼 이뤄진 그 수비진을.

제퍼슨은 일직선으로 내달려, 양쪽 수비 사이로 어깨를 비집고 들어가 말 그대로 파괴시켰다.

그리고.

[Goaaaaaaaaaaal! golgolgolgol! 제퍼슨이 수비수 사이를 돌파해 강하게 때려 넣습니다!]

[그 누구도 제퍼슨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퍼슨은 드리블이 대단한 선수지만, 이건, 차원이 다릅니다! 일직선으로 내달려 수비진을 말 그대로 붕괴시켰습니다!]

[힘이 느껴집니다! 그 어떤 압박도 불가사의한 상체 힘과, 굳건한 무게중심으로 이겨 내는 제퍼슨 리! 벌써 두 골을 터뜨리며 이탈리아를 침몰시키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관중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 관중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네요.]

"제기랄! 이 개자식들아!"

"이게 축구냐! 이건 너희들의 미식축구가 아니야!"

물론, 오늘의 심판 성향이 관대하다 못해 부처 수준이란 걸 이미 엄청난 정보력으로 파악한 미국이었기에.

이토록 거친 플레이가 가능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에게 경고가 쏟아졌다.

조 맥과 맥클라인이 한 장씩 받았다.

그렇다 한들.

이탈리아가 이 거친 축구를 이겨 낼 방법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축구다!"

"닥쳐! 이건 축구에 대한 모욕이야!"

"시끄러워! 이게 미국의 축구야!"

"그건 슈퍼볼에서나 하라고오!"

이탈리아 선수들의 비명 같은 소리를 무시하며, 제퍼슨은 공을 치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조르지뉴가 기겁하며 제퍼슨을 붙잡다가.

제퍼슨이 왼손으로 스냅을 주며 쳐 내자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난 미국인이 싫어! Fucking American!"

"쟤가 지금 우리한테 욕한 거지?"

"제기랄!"

"나도 무솔리니가 싫다고! Fucked Mussolini!"

"피자도 싫어! I hate Pizza!"

"그건 아니지."

"그건 좀."

"가서 사과해."

이탈리아 선수들은 자기네끼리 미친 듯이 떠드는 미국 선수들을 보며,

그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제퍼슨이 골문까지 돌파해 세 번째 해트트릭을 터뜨린 순간까지.

이 미국인들은 달려가 세레머니를 하지도 않고 외쳐 대고 있었다.

"Fucking Mussolini!"

도대체 21세기 월드컵에서 무솔리니가 왜 나오는 건지 모르지만.

이탈리아 선수단의 마음은 공통됐다.

"이 또라이 새끼들!"

"Fucking American!"

< 223. Fucking American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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