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라이벌은 없다 (2) >
네덜란드는 강팀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2018년 월드컵에 미국처럼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좀 옅어진 감이 있다.
하지만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팀이다.
월드컵에서 준우승만 무려 세 번이나 한 팀이니까.
역설적으로, 그런 사실이 네덜란드 축구팬을 고통스럽게 한다.
결국, 월드컵 준우승은, 단지 준우승에 그칠 뿐이니까.
[전세계 도박사, 박빙의 승부 끝에 미국의 8강 진출 예상]
언론의 예측은 반반이다.
미국이 조별리그에서 보여 준 모습이 압도적이었단 점.
네덜란드는 조별리그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줬단 사실.
그 두 가지로 인해 오히려 미국이 약간 우세하리란 예측이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는, 반반이 더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경기 시작 후 제퍼슨이 먼저 터뜨린 선제 득점에 미국 관중은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Hup, Holland, Hup"
뿌-뿌우우-뿌우!
오렌지 유니폼의 네덜란드 관중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격렬한 응원가와 특유의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한 골이지 않은가.
아무리 제퍼슨이 폭발적이어도,
미국은 유럽의 강팀도 아니었다. 객관적인 전력으론 네덜란드가 앞선다.
선수단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한 골이야! 한 골쯤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어! 집중해!"
로날드 쿠만 감독이 소리쳤다.
하지만 미드필더 바이날둠은 그 말에 쉽게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캡틴이지만, 평소처럼 선수들을 격려하지 못하고 잔뜩 굳어 있는 얼굴의 반 다이크를 보는 순간.
바이날둠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걸 느꼈다.
어떤 공감대냐면.
'리버풀에서 캡틴하고 같이 뛰면서, 저 친구를 제대로 막았던 적이 있었나?'
그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격려에도 표정을 펴지 못하는 선수가 두 명 있다.
반 다이크, 바이날둠.
두 명의 공통점은 하나다.
리그에서 수도 없이 제퍼슨 리를 맞닥뜨렸다는 점.
그랬기에 그들은 잘 알았다.
제퍼슨의 발끝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무리 잘 막는다고 해도, 별안간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골을 만들어 내는 괴물이란 사실을.
'아니야. 여긴 월드컵이다. 놈에겐, 첼시의 미드필더도, 수비진도 없어.'
바이날둠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췄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심 불안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는 내심 알고 있었다.
여기가 월드컵이어도,
제퍼슨 리는, 똑같이 치명적이란 걸.
***
4-2-3-1의 포메이션이지만.
4-4-2에서 변형된 전술의 의미가 컸다.
다만 풀리시치가 안쪽으로 치고 들어와서 힘을 실어 주는 경향이 짙어졌다.
거기에 산티아고가 2선에서 쉐도우 스트라이커의 룰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번 전술의 컨셉은 명확했다.
"제프!"
나에게 몰아 주는 전술이었다.
조별리그를 다 겪은 감독의 선택은,
"제프, 네가 볼을 잡아야 경기에서 이긴다!"
라는 것이었다.
사실 딱히 반박할 얘기도 아니었다.
애당초 스트라이커가 공을 잡아야 경기에서 이길 확률이 높지 않겠나.
아무튼.
그런 덕택에 초반에 쉽게 선제골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네덜란드의 압박이 조금은 달라졌다.
풀리시치와 산티아고에게 쏠리던 견제가 나에게 좀 더 집중된 것.
뭐 그렇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다.
"Wuuuuuuuuuu!"
이런 압박은 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늘 겪던 것들이다.
내가 산티로부터 패스를 받자, 오렌지색의 관중들이 야유를 쏟아 냈다.
투욱!
관중의 야유에 신경 쓰지 않는 건, 산티도 마찬가지다.
빛나는 그의 공격 재능은 나도 가끔 혀를 내두른다.
나에게 공을 내주고 곧바로 공간을 찾아 뛰어 들어간다.
나는 그의 패스를 가볍게 긁은 뒤에 왼쪽의 풀리시치에게 내준 뒤. 산티의 반대 방향을 달렸다.
풀리시치는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며 빠르게 곁눈질했다.
왼쪽엔 내가, 오른쪽엔 산티가. 그리고 오른쪽 터치라인에는 조던 모리스가.
여기서 풀리시치의 선택은 뭐, 어디로 가든 나쁘지 않다.
그래도 그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제프!"
리그에서 수없이 발을 맞췄던 호흡.
그의 패스는 세기가 아주 딱 좋았다. 내 발끝에 도달하는 순간, 저절로 멈추는 느낌이 들 정도다.
"안 돼!"
바르셀로나의 미드필더, 데 용이 화들짝 놀라 나에게 달라붙는다.
투욱!
하지만 한 발짝 더 먼저 움직인다.
풀리시치의 패스를,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그대로 오른쪽으로 툭 치면서 달려드는 데용을 피해 낸 뒤.
화악!
선수 한 명을 비켜 내면.
아주 찰나지만 공간이 열린다.
물론 네덜란드의 수비는 그 공간을 메우기 위해 급히 자리를 잡지만.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웃사이드로 공을 오른쪽으로 치고,
그대로 인프론트로 감겨 차는 슛으로.
뻐어어엉!
있는 힘껏 다리를 휘저었다.
맞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거, 제대로 감겼다고.
골키퍼 야스퍼 실러센이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왼쪽 구석으로 아름답게 감겨 들어가는 궤적은.
"Yeaaaaaaaaaaaaaaaa!"
아슬아슬하게 손끝을 스쳤다.
그것만으로 슈팅의 위력이 줄진 않는다.
그 위력을 잃지 않은 채, 그물이 철렁였다.
"Bravo! Bravo!"
"제퍼-슨!"
이거.
의외로 오늘 감각에 물이 올랐는데?
***
16강부터는 그 누구도 승자를 쉽게 예측 못 한다.
토너먼트라는 변수가 그렇다.
하지만 가끔 이 월드컵에선 정말 말도 안 되는 스코어가 발생한다.
가령 브라질이 독일에게 7대 1로 패배하는 충격적인 스코어.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결과가 월드컵에선 꼭 한 번씩 나타났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일지도 모른다.
제퍼슨이 두 골을 뽑아내며, 후반전에 들어서 네덜란드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게 보이는 네덜란드와는 달리 미국은 지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벌떼 같습니다! 제퍼슨이 선봉장 같네요! 제퍼슨을 필두로 우르르르 달려나갑니다! Oh! 산티아고, 산티아고, 산티아고골골골골골골! 산티 골!]
후반전부터 오히려 미국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졌다.
웨스턴 맥케니, 크리스티안 롤단.
두 명 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봤을 때, 패싱력이나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다.
다만 둘 다 장점 하나는 특출났다.
그것은 바로 왕성한 활동량.
그렇지 않아도 네덜란드가 지친 모습을 보여 주는 가운데.
미국의 닥터와 트레이너들이 만들어 낸 체력의 우위가, 후반전 있어서 더욱 두드러졌다.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공을 향해 달려드는 저돌성. 과감한 태클.
그리고 소심했던 맥케니는 제퍼슨의 영향을 받아 과격하고도, 과감하게 몸을 부딪쳐갔다.
어쩌면 트레이너 팀으로 인해 신체 밸런스가 잘 형성되면서 얻은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인해 미국의 공격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산티아고의 침투! 날카롭습니다! 제퍼슨에게 패스! 제퍼슨 리! 하나 제치고, 둘 제치고, 셋 제치고! Oh, God! 반 다이크의 태클이 허공을 가릅니다. 슛! 아니, 슈웃! 슛 하려다가, 패스! 왼쪽으로 공을 내주고, 풀리시치 튀어나와 침착하게 마무리합니다! Goooooaaaal!]
엄청난 벌떼가 우르르 달려가 독침을 쏴 대는 것처럼.
미국의 공격진은 미드필더부터 끊임없이 네덜란드를 두들겼다.
물론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역습을 시도해 한 골을 만들어 냈지만.
캡틴인 반 다이크부터 제퍼슨을 상대하는 데 힘겨워하는 이상.
[제퍼슨 리가 경기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와우! 버홀터의 미국이 이렇게 강력했나요? 네덜란드를 흠씬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 미국이, 미국이 북중미의 제왕을 넘어 유럽을 넘보고 있습니다! 제퍼슨 리가 선봉에 서서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버홀터 감독에 대한 찬사부터.
선수단에 대한 호평까지.
사실 이 전술이 특별할 건 없었다.
버홀터 감독이 조별리그 경기를 치르고, 분석팀의 자료를 보면서 깨달았을 뿐이다.
세상에 원맨팀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선수 한 명이 팀의 퀄리티를 바꿔 줄 수는 있다.
제퍼슨 리가 그런 선수였다.
"제퍼슨이 중심이 되고, 제퍼슨이 선봉대장이 되고, 제퍼슨에게 패스를 해 주고."
그것이 미국 축구의 핵심이었고,
어쩌면 이것이 네덜란드가 처참하게 부서지는 이유였다.
풀리시치는 제퍼슨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조던 모리스의 날카로운 크로스는 제퍼슨에게 가장 어울렸으며.
산티아고와 끊임없는 스위칭 플레이는 두 명이 마치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재능이 타고 넘치는 이들은 때로는 예측 못 할 드리블을 하거나.
수비벽을 허무는 스루패스를 찔러주거나.
아니면 직접 해결하거나.
[제퍼슨의 패스를 이어받은 산티아고가 다시 골을 집어넣습니다! 맙소사! 정말 이걸 어찌합니까! 반 다이크, 좌절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수비수들이 허무하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지독한 딜레마였다.
조별리그에서 보여 준 제퍼슨의 임팩트.
그리고 제퍼슨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는 반 다이크.
반 다이크는 제퍼슨을 대비해 수비수들과 발을 맞췄다.
하지만 제퍼슨을 완벽하게 막아 내지 못했다.
리그에서 처음 맞닥뜨렸을 때, 어느 정도는 할 만하다고 느꼈으나.
이제는 격차가 벌어졌다.
반 다이크는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퍼슨을 막을 수 있다고?'
아니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무거운 중압감이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에 대해 집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산티아고가 미쳐 날뛸 수밖에 없었다. 산티아고도 AT 마드리드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줬던 선수가 아닌가.
빈틈이 생길 때마다 그는 여지없이 골문을 뒤흔들어 버렸다.
누군가 말했다.
'제퍼슨을 막을 수 있는 수비수는 반 다이크뿐이고, 어쩌면 그가 진짜 라이벌. 호적수다!'
그런 말이 나온 건, 당연했다.
실제로 제퍼슨은 리그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수비수로 반 다이크를 꼽았다.
리그에서도 제퍼슨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게 반 다이크가 유일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라이벌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반 다이크는 쓰게 웃었다.
"저 녀석에게 라이벌은 없지. 세상에 제퍼슨 리가 두 명이지 않은 이상."
그는 패배를 인정했다.
***
미국이 네덜란드를 5대 1로 격파한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조별리그에서 포르투갈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연이어 네덜란드까지 격파한 건, 유럽의 축구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축구의 변방으로 통하던 미국이 연이어 유럽의 거함을 박살 냈으니까.
"우리는 미국입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텍사스 출신의 버홀터 감독은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그는 경기가 끝나고도 흥분이 남아있는지 목소리 톤이 높았다.
하지만 몇몇 언론들은, 그러니까 정확히 유럽 쪽 기자들은 그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운이 좋은 것 아니었나요?"
5대 1의 대승을 그저 운으로 깎아내리는 질문.
그러자 버홀터 감독이 크게 웃었다.
"하나님은 착한 아이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죠. 그렇군요! 네덜란드의 쿠만 감독은 죄를 지었나 봅니다!"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던 버홀터 감독은, 별안간 그 기자를 노려봤다.
"그래서요. 우리가 운이면 어떻습니까?"
"······."
버홀터 감독은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기자단을 쭉 둘러보았다.
"운이라. 운. 그렇습니다. 우리 미국에 제퍼슨 리가 태어난 것도. 산티아고가 태어난 것도. 풀리시치, 매케니, 모리스, 롤단, 잭 스테판, 로드릭 다! 행운이죠. 뭐 어떻습니까. 행운으로 이긴다고 해도. 그 누구도 우릴 비난할 수 없습니다."
승자는 승자의 권리가 있다.
기자들이 입을 다물자 버홀터는 씩 웃었다.
"기억하십시오. 행운은 준비된 자가 잡아야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완벽히 준비했고, 눈앞에 찾아온 행운을 움켜쥐었습니다. 이제는, 계속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제 선수들과 함께요."
< 221. 라이벌은 없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