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라이벌은 없다 (1) >
[다시 나타난 '포르투갈 미국 징크스', 미국 포르투갈 4대 0으로 격파하고 조 1위 16강 진출 확정!]
[H조, 크로아티아 뉴질랜드 4대 2로 꺾고, 16강 진출]
[3경기 8골의 제퍼슨 리.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까?]
[미국 버홀터 감독, '재미있는 경기였다. 월드컵에서 우리 팀은 절대 약체가 아님을 보여 줬다.']
[포르투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믹스트존 인터뷰 거부하고 빠져나가]
[미국 잭 스테판, '캡틴과 함께 훈련하면서 스스로 성장했음을 느꼈다.']
[제퍼슨 리, 16강 진출에 '아직 많은 경기가 남았다.'라며 담담한 의견 밝혀.]
***
솔직히 말해.
이번 월드컵은 신기한 점이 많았다.
회귀 전, 한국 대표팀으로 뛸 때.
비단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부상 관리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과도한 부담감과 심리적 압박감.
단 조금도 쉴 수 없는 분위기.
그런 상황에서 짧으면 3일, 길어 봤자 5일 간격으로 연이어 치러지는 격렬한 경기.
경기마다 필요한 집중력은 어마어마하다.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다치기 아주 쉬운 환경이다. 부상을 당해 중간에 낙마하는 선수가 나타나는 건 대표팀마다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땐 어땠죠?"
"별로 힘들진 않았어요. 조금 피곤할 뿐."
"멋지군요.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베드에 누워서 전문 스포츠 마사지사 두 명에게 마사지를 받고.
동시에 앞에 앉은 심리 상담가와 얘기를 나누는 건.
미국 대표팀에서 역시 흔한 일이었다.
미국엔 스포츠 관련해 무수히 많은 직업이 있다.
스포츠 마사지사와 스포츠 심리 상담가도 그중 하나다.
경기 직후 마사지사가 달라붙어 근육을 풀어 주는 과정만으로도, 부상 확률이 급격하게 낮아진다.
그뿐만 아니다.
심리 상담가와의 대화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만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스포츠 선수들은 부상이나 경기에 대한 부담감, 출장하지 못한다는 압박감에 의해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큰 편이다.
이런 월드컵 같은 대회에서는 그 스트레스가 터져나갈 정도다.
"기분이 어때요?"
"어음. 뭔가 불편한 건 없어진 것 같아요."
"좋아요."
심리 상담사는 노련했다.
미국 전역에 있는 스포츠 구단마다 심리 상담사가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카타르에 같이 왔다.
덕택에 선수들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나도 마찬가지다.
상담사와 얘기를 하다 보니까, 회귀 전 이학현일 때 부상으로 고통받던 트라우마를 얘기해 버린 것.
물론 상담사는 절대 당황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했지만.
감독에게 이 얘기가 전해졌단다.
혹시 제퍼슨이 크게 다친 적이 있냐고.
물론 그런 적은 당연히 없다.
다만 미식축구를 하던 시절에 자잘한 부상이 다행히 몇 번 있었나 보다.
그 부상에 대한 트라우라마라고 어물쩍 잘 넘겼다.
아무튼.
이 덕택에 대표팀은 타 팀보다 앞서나갈 수 있었다.
자료 종합 분석은 호텔의 분석팀에서 해 줘.
선수들 멘탈 관리와 부상 관리는 피지컬팀과 상담팀에서 해 줘.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은 오로지 다음 경기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타 팀이 과부하가 걸려 일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돈이 좋긴 좋아."
"동감."
마사지사 세 명에게 행복한 마사지를 받고 있던 산티의 중얼거림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돈 좀 많이 벌어서.
내 개인 트레이닝 팀에 이 마사지사들 좀 고용해 볼까.
***
16강.
훈련장에 가라앉은 공기부터 남다르다.
"거기 막아야지!"
"정신차리고 집중해!"
"인마! 거기서 피하면 어떡해?"
"슈팅 각도 열렸잖아!"
조별리그까지는 무언가 예고편 같던 느낌이었다면.
이제야 진짜 본편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16강 진출이 확정된 후 훈련장에 감도는 분위기는 비장했다.
조별리그에서 출전하지 못한 후보 선수들은 언제든 출전을 대비해 컨디션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주전 멤버들은 자잘한 부상이라도 확실히 짚고 넘어갔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지 않다.
이게 만일 프로리그였다면, 주전과 비주전을 가리기 위한 경쟁이 끊임없겠지.
대표팀에선 다르다.
백업 멤버들은 주전 선수가 이탈할 때,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 본인의 역할을 명백히 인식하고 몸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물론 불만을 가지는 선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럴 때 빛난 게 심리 상담사들의 활약이다.
그 덕택에 감독은 선수단 장악을 비교적 쉽게 했다.
'원팀'이란 인식이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16강에 진출해 준비할 때.
"저기 프랑스 팀 가는군."
멀리 호텔 쪽에서 짐을 빼고 있는 프랑스 선수단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짬을 냈다.
"캉테."
캉테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끄응.
이렇게 보니 안쓰럽네.
사실 프랑스의 16강 탈락은 정말 이번 대회 가장 큰 이변이었다.
3경기 무승부.
마지막 경기인 한국전에서 0대 0으로 무승부로 끝나면서, 한국은 1승 1무 1패. 2위로 16강 진출, 프랑스는 3무로 탈락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온 징크스 중에, 가장 유명하고 또 화제가 된 징크스다.
직전 대회 월드컵 우승팀은 다음 대회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는다는 징크스.
프랑스가 이번엔 그 징크스의 희생양이었다.
뭐, 운이 안 따르긴 했지.
음바페 부상에. 센터백 두 명 부상에. 마지막 경기에선 공격수도 다쳐서 실려 나갔었나.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쉬워 죽을 것 같아."
캉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월드컵을 보고 있으면, 경기 중에 패배를 직감하고 서럽게 우는 선수들이 카메라에 많이 잡힌다.
그만큼 월드컵이 선수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남달랐다.
혹자는 유럽 챔피언스리그가 더 가치 있지 않냐고 하겠지만,
절대다수의 선수는 월드컵을 최고라고 여긴다.
으음.
캉테와 잠깐 대화를 하려고 감독에게 말하고 짬 내서 왔건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쉽군. 나도 프랑스를 결승전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근데 그것도 끔찍한 일인데."
"왜?"
"결승전에서 널 만나서 정말 패배하게 된다면, 평생 널 싫어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건 더 싫어."
이러니 누가 널 싫어할까.
"지루한테 전화가 왔어. 자길 뽑았으면 16강 갔을 거라고."
"하하하."
"참. 이 양반 눈치 없는 거 알아줘야 해. 욕하고 싶었다니까."
이 순진한 캉테가 욕을 하고 싶었다니.
정말 속이 상하긴 했나보다.
아무튼 캉테는 애써 표정을 펴며 말했다.
"꼭 우승하라고. 잉글랜드가 우승하는 것보단 너희가 우승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잉글랜드는 왜?"
"그냥. 별로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올리버가 있잖아? 만일 걔가 우승하고 와서 뻐기는 꼴을 어떻게 참고 봐?"
"그건 그렇지."
"만일 중간에 잉글랜드를 만나면 반드시 부숴 버려."
"음. 그래야겠어."
이건 좀 진지하다.
올리버가 우승하고 와서 뻐겨 대는 꼴을 상상하니.
살짝 뒷골이 당길 것 같았다.
아르헨티나에게 3차전에서 2대 1로 패배한 잉글랜드는, 현재 나름 우승후보로 평가받고 있었다.
"좋아. 런던에서 보자고, 제프."
"응."
프랑스 구단 버스가 떠나는 모습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축구는 알 수 없군.'
정말로.
축구란 알 수 없다.
누군가 말했다.
강팀과 약팀은 정해져 있어도,
승리 팀과 패배 팀은 아무도 모른다고.
단순히 객관적인 전력을 벗어나는 결과는 지금까지 수 없이 일어났다.
그 얘기는 우리도 절대 방심할 수 없다는 거다.
언제든 패배할 수도 있고, 또는 언제든 승리할 수 있다.
결국 부단히 노력해서 준비하는 것 뿐.
약간은 해이해지려던 마음이 제대로 잡히는 기분이었다.
"Attention!"
훈련장에 복귀하니, 때마침 감독이 소리치며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좋아. 모두 컨디션이 좋아 보이니, 내 마음이 행복하군."
감독은 자잘한 부상을 제외하곤 부상자가 하나도 없는 선수단을 흐뭇하게 여겼다.
"다음 상대가 어디인지 알지?"
암.
대진표는 조추첨 되면서 작성되니까.
"이번 포메이션은 4-2-3-1이다. 분석실에서 내놓은 자료에 코치진이 내놓은 대답이지. 좋아. 준비해 보자고!"
"Yes, Sir!"
4-2-3-1이라.
"음. 이번엔 원톱이네?"
산티가 내 곁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원톱이라.
"아닌가? 4-2-3-1인데. 내가 세컨톱으로 서려나?"
흐음.
지금껏 4-4-2로 투톱 포메이션이었는데.
그러다가 가끔 공격 장면에서 내가 밑으로 처지거나, 산티가 처지면서 4-2-3-1로 변경된 적이 몇 번 있지만.
시작부터 4-2-3-1이라.
"감독님이 조금 과감해졌군."
"다음 상대가 할 만하다고 느껴진 건가?"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 상대가 약해서가 아니다.
16강부터는 절대 약한 상대가 없다.
다만 감독은 우리 선수들의 발이 유기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리라.
거기서 자신감을 좀 얻었겠지.
상대가 약팀도 아니니까.
"네덜란드라. 반 다이크하고 또 싸우겠군."
어휴. 지긋지긋하네.
***
<16강 1경기>
독일(C조 1위) VS 스웨덴(D조 2위)
<16강 2경기>
멕시코(A조 1위) VS 잉글랜드(B조 2위)
<16강 3경기>
아르헨티나(B조 1위) VS 터키(A조 2위)
<16강 4경기>
브라질(D조 1위) VS 폴란드(C조 2위)
<16강 5경기>
이탈리아(E조 1위) VS 한국(F조 2위)
<16강 6경기>
미국(H조 1위) VS 네덜란드(G조 2위)
<16강 7경기>
스위스(F조 1위) VS 나이지리아(E조 2위)
<16강 8경기>
콜롬비아(G조 1위) VS 크로아티아(H조 2위)
***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엔 언제나 화려하거나, 골을 넣은 선수가 있다.
팀을 상징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또한 골을 책임지는 선수였다.
스트라이커.
11명이 뛰는 축구에선, 모든 포지션이 똑같이 중요하다. 어떤 포지션이 없으면, 제대로 된 전술을 수행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화려한 골을 넣고 직접 승부에 종지부를 찍는 스트라이커 포지션이 주목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반 다이크가 더 빛나는 이유였다.
그런 스트라이커를 막아 내는 수비수가 반 다이크였으니까.
'내 뒤로 선수가 빠져나가는 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짓이지.'
메시와 호날두의 시대에.
그들이 독점하던 발롱도르에.
수비수로서 정면으로 도전했던 선수였고,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유럽, 나아가 세계에서 톱클래스의 수비수라는 것도 부정의 여지가 없다.
리버풀의 팬들에겐 엄청난 든든함을 안겨 주던 굳건한 벽과도 같은 선수.
그의 역할은 대표팀에서도 그랬다.
[반 다이크, 득점과도 같은 실점 위기를 막아 내는 기적의 클리어링!]
[종료 직전, 터져 나오는 역전 헤딩골! 반 다이크가 네덜란드를 16강으로 이끌다!]
네덜란드는 이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생각보다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1승 2무.
물론 16강에 진출할 성적으로 충분했고, 실제로도 진출했다.
다만 경기 내용은 영 엉망이었다.
자칫하면 패배를 할 수도 있었고, 마지막 경기에서 반 다이크가 역전 헤더골을 넣지 못했다면, 탈락했을 수도 있었다.
하여 반 다이크는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수비수 중 하나였다.
네덜란드 관중이 믿어 의심치 않는 선수였다.
든든하고, 뭐든지 막아 낼 것만 같은 수호신.
하지만.
[제퍼슨 리, 제퍼슨! 제퍼슨! 오! 이런! 반 다이크가 달라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트라이커 제퍼슨 리.
그가 공을 몰고 박스 안으로 침투할 때.
반 다이크가 막기 위해 튀어나갈 때.
네덜란드 팬들은 반 다이크가 막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늘 벗어나는 법이었다.
[맙소사! 반 다이크가 튕겨 나갑니다! 나가떨어졌어요! 제퍼슨! 캡틴 아메리카가 이겼습니다! 제퍼슨이 이번 몸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제프, 제프, 제퍼슨 리! 슈우우웃!]
중계진의 격정적인 목소리와 함께.
폭발적인 질주에 이은, 수비진을 헤집는 그 파괴력.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롭고도 치명적인 슈팅.
[Goaaaaaal! gol, gol, gol! 제퍼슨이, 제퍼슨이 네덜란드를 부수고 있습니다!]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골.
혼자서 박스 안으로 들어가 반 다이크를 튕겨 내고.
양옆에서 튀어나오는 발끝을.
지독히도 짧은 볼터치의 연속으로 가볍게 헤집어 내더니, 낮게 깔리는 슈팅은 골키퍼의 동작보다 훨씬 빠르게 골문을 갈라 버렸다.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수호신이 무너졌다는 네덜란드의 감상.
그리고 네덜란드의 수호신이었던 반 다이크는 골을 넣은 제퍼슨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젠 지긋지긋하군. 정말로."
< 220. 라이벌은 없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