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월드컵 징크스 (3) >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소 두 골이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제퍼슨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마."
"하지만 집중해야 해. 다른 선수들도, 특히 산티아고, 풀리시치. 이 둘은 제퍼슨만큼 경계해야 한다고."
포르투갈은 스타선수들이 즐비하다.
한 시대를 장식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부터,
AT마드리드의 한축을 담당한 주앙 펠릭스.
맨시티의 베르나르두 실바 등. 그 외에도 선수 대부분이 빅리그, 그것도 빅팀에서 뛰고 있다.
"젠장."
하지만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전반전 2점이나 헌납했으니까.
단지 그것뿐이면 이 정도로 분위기가 죽지는 않았으리라.
"이 멍청이들아! 슈팅 길을 막아야지! 왜 넋을 놓고 있어!"
호날두의 날카로운 어조가 라커룸에 파고들었다.
실점을 헌납한 수비수와 골키퍼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괜히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게 그들의 속내였다.
나름 철저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제퍼슨은 그간의 데이터나 동영상등으로 대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재적인 드리블은 둘째 치고, 그 폭발적인 스피드와 동작과 동작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에는 딜레이가 극도로 짧았다.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표현하곤 하는 그 특유의 신체 반응은······.
"웃기는 소리. 이젠 짐승보고 이렇게 소리쳐야 해. 오! 제퍼슨 같은 반사신경인데?"
차라리 짐승보고 제퍼슨 같은 반사 신경이라 고쳐 말해야 할 정도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거기까지였으면, 그래.
차라리 이해했을 거다.
여기 호날두가 젊은 시절, 세계를 놀라게 하던 절정의 기량을 내보이는 것처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으리라.
다만.
그 두 번째 골.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거기서 라보나 킥을 때려?"
"심지어 그걸로 골을 넣었지."
"치욕적이야."
치명적이었다.
라보나 킥으로 철저하게 농락하며 골까지 넣었다.
그 사실에 포르투갈 선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화가 나지도 않았다.
"크로아티아가 뉴질랜드를 3대 0으로 박살 내고 있다는군."
누군가 중얼거리자.
"제기랄. 목숨 걸어야 하는군."
"그 엿 같은 놈에게 반칙이라도 쓰려면 조심해. 할리우드 배우 저리가라니까."
다닐루 페레이라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터널로 나가는 선수들의 어깨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무거워 보였다.
***
[크리스티아누! 패스 받고 슈웃! 오, 이런! 잭 스테판의 선방입니다!]
[잭 스테판의 선방 쇼가 미국을 여러 번 구해 내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마치 예측한 것처럼, 슈팅 궤적을 미리 읽고 움직이고 있어요!]
후반전 들어서서 포르투갈은 승리를 위해 전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제기랄!"
호날두가 또 한 번 막히자 애꿎은 잔디를 스터드로 찍었다.
계속해서 이런 과정이 반복됐다.
전반전 두 골을 몰아친 미국은, 후반전 들어서서 라인을 내리고 경기를 안정적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도 측면에서 계속해서 뒷공간이 공략당해 슈팅을 내줬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득점은 터지지 않았다.
의외로 골키퍼 잭 스테판의 선방이 눈부시게 빛났다.
크로아티아전까지만 해도 아직 미숙한 면모를 보였던 잭 스테판.
그래서 벤치의 코치들도 잭 스테판의 활약에 살짝 놀라고 있었다.
'이거, 진짜 똑같잖아?'
정작 놀란 건 잭 스테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몸에 짜르르하고 전율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똑같아. 슈팅 궤적, 폼, 방향까지. 심지어 슈팅의 세기마저도.'
크로아티아에서 자신이 내준 허무한 실점 때문에 그는 많이 낙담해하고 있었다.
언론은 공격력은 최강이지만 수비력과 골키퍼의 능력이 형편없다고 비판했다.
잭 스테판은 본인이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을 때.
제퍼슨 리가 찾아왔다.
'천부적인 재능이 없으면, 오로지 시간과 땀으로만 이겨 낼 수밖에 없다고 했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제퍼슨은 공을 들고 슈팅을 때리기 시작했다.
분석팀이 내놓은 포르투갈 선수들의 슈팅 영상들.
그것들을 다 돌려본 제퍼슨은 그걸 똑같이 보여 주겠다면서 막으라고 했다.
'정말 똑같아.'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제퍼슨은 비디오 속 포르투갈 선수들의 슈팅을 똑같이 따라 했다.
궤적, 폼, 방향, 강도까지.
물론 미세한 차이로 다른 점이 존재했지만,
그 연습만으로도 잭 스테판은 지금 충분히 슈팅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타고난 감각과 반사 신경으로 막아 내는 게 아니다.
오로지 땀과 시간.
제퍼슨이 도와준 그 치열한 훈련 때문에, 잭 스테판은 포르투갈의 몇 없는 슈팅을 계속해서 막아 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잭 스테판의 빛나는 활약에 힘입어.
포르투갈은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고.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자 호날두는 동료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순간에 경기의 결과는 판가름 났을지도 모른다.
'제프!'
잭 스테판은 또 한 번 슈팅을 막아 내고,
저 멀리 손을 들고 뛰어 들어가고 있는 제퍼슨을 똑바로 봤다.
'연습한대로 막기만 하랬지. 나머지는 자신이 해결한다고.'
그 얼마나 든든했던 말인가.
잭 스테판은 캡틴의 말을 철저하게 따랐다.
뻐어어엉!
어태킹 서드로 넘어가는 긴 골킥.
[제퍼슨 리가 공을 잡았습니다!]
***
[월드컵에 관해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 #월드컵 #징크스 #월드컵역사 #미국]
[첫째, 전 대회 디펜딩 챔피언은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다. #프랑스 #16강 진출실패 #프랑스 0 : 0 한국]
[둘째, 미국은 조별리그 2차전에서 21세기 이후에 무조건 무승부를 했다. #크로아티아전 #미국 2 : 2 크로아티아 #미국징크스]
[셋째, 미국은 아르헨티나를 만나면 처참한 패배를 기록했다. #1:6 #0:4 #단 두 번뿐이지만 징크스]
[그리고 넷째, 미국은 월드컵에서 포트루갈을 만나면, 항상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미국VS포르투갈 #H조3차전 #제퍼슨 리 #징크스]
***
징크스만큼 미신적인 것이 존재할까.
세상엔 수많은 징크스가 존재했다.
스포츠에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징크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징크스들은, 언젠가는 깨졌다.
가령 첼시의 9번 저주를 보라.
9번이란 등번호를 다는 선수는, 그 선수의 퀄리티를 떠나서 무조건 실패한다는 그 지독한 징크스.
그걸 내가 시원하게 깨부수지 않았나.
징크스는 정신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징크스를 직면하면, 그 징크스를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는 자신감에 찬 채로 싸워야만 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그 징크스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포르투갈은 21세기 들어 월드컵에서 두 번 만났으며, 그 두 번 다 포르투갈을 16강도 진출 못 하게 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딱 두 번이지만,
객관적인 실력 차이를 무시하는 결과였기에, 그건 징크스가 될 만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포르투갈을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저들에겐 가장 끔찍한 징크스가 되리라.
"LEE Will, LEE Will Kill you!"
지금, 나는 공을 잡았다.
골킥으로 단 한 번에 도착한 잭 스테판의 패스.
"Yeaaaaaaaaaaaaaaaa!"
공을 잡을 때마다 들려오는 환호성.
이 관중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단순한 득점과 승리일까?
아니다.
어쩌면 나는 저들에게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미국을 대표하고, 월드컵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캡틴 아메리카.
"제프!"
"오른쪽!"
산티아고가 신호를 주며 먼저 앞으로 달려나가고.
풀리시치가 왼쪽 측면에 수비를 달고 뛴다.
산티아고가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으로 수비를 헤집어 놓고 공간을 만들어 준다.
툭툭.
촘촘한 수비.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공격력은, 세계 최정상이다.
투욱!
왼발로 공을 띄워 수비의 슬라이딩 태클을 하고.
툿!
발등으로 공을 받은 채, 그대로 떨어뜨리지 않고 다시 수비진 머리 위로 넘기는.
툭 찍어 찬 패스는 산티아고의 발끝으로 떨어졌다.
"Lovely Pass!"
"Fucked Pass!"
그리고 산티는 무리하지 않고 수비수 두 명을 잡아끈 채, 가운데로 다시 툭 내주는 패스.
"USA! USA! USA!"
미국인들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에 죽고 사는 양반들이다.
때로는 과도한 애국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내게 품은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건.
이제 단순한 골로 안 된다.
두 번째 라보나킥으로 넣었다면,
음.
조금 화려하고.
압도적이고. F로 시작하는 욕이 절로 튀어나올 그런 거?
뭐.
이런 거?
투욱!
골문만 노려본 채, 마치 슈팅을 때릴 것처럼 큰 자세를 취하다가.
아무도 보지 못한 틈.
촘촘한 수비 블록 사이에 발생한 미세한 틈 안으로.
노룩 패스를 질러 넣었다.
그리고 왼쪽 측면에서 냅다 달려온 풀리시치의 발에 공이 도달했다.
뻐엉!
후반전.
계속해서 득점에 실패하던 포르투갈은 세 번째 실점을 내주면서 무너졌다.
골키퍼는 입을 다물고 바닥에 쓰러졌고, 수비수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하늘을 올려다 봤다.
저 멀리. 최전방에서 그 자식은 온갖 짜증을 쏟아 내고 있었고.
"제프!"
"끝내주는 패스였어!"
흐음.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말이지.
***
[솔직히 말해,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해설자의 말은 많은 축구전문가의 생각과 일치했다.
후반전 67분, 3대 0으로 끌려가는 포르투갈은 모든 의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승리를 위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제퍼슨 리의 화려한 득점과 아름답기 짝이 없는 패스는 감동적입니다. 잭 스테판의 선방 쇼에 제퍼슨이 그대로 보답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비수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었죠.]
[두 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거대한 몸과 폭발적인 힘에서. 저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개인기가 나올 수가 있을까요. 거기서 누가 라보나킥으로 골을 넣을 줄 알았겠습니까?]
[제퍼슨의 경기를 보는 건 참 즐겁습니다. 화려하고, 짜릿하며, 멋진 골을 넣어 주죠.]
[미국은 월드컵 16강 진출조차 의심스러웠습니다만,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예측이었군요.]
[멍청했죠. 제퍼슨 리는 늘 그렇듯이, 모든 예측을 벗어나는 상식 외의 존재입니다!]
모두가 제퍼슨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제퍼슨의 플레이는 보는 눈이 즐거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치명적인 골을 언제든지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스피드했으며 폭발적이었다.
사람을 가슴을 들뜨게 하는 속도와 힘을 겸비하고 있었다.
거기에 화려한 개인기에, 다른 선수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고스트 스텝, 제퍼슨 턴.
미국 관중은 행복한 얼굴로 제퍼슨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웨스턴 맥케니가 다닐루 페레이라와의 몸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악연이 있던 맥케니와 페레이라.
하지만 이번에는 맥케니의 승리였다.
"쓰레기 자식! 죽어 버려!"
확연하게 바뀐 맥케니의 고성에 페레이라가 당황한 사이.
맥케니가 은근슬쩍 손을 쭉 뻗어 페레이라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으억!"
황당했다.
그토록 어린 강아지 같던 소심한 놈이, 언제 이런 짓까지 배웠단 말인가?
맥케니는 페레이라를 이겨 내고 곧바로 오른쪽을 향해 길게 패스를 질렀다.
[맥케니의 롱 패스! 오, 이런 깁니다! 패스가 길어요!]
포르투갈의 풀백이 더 가까운 위치로 떨어지는 긴 패스.
패스 미스였다.
그때였다.
타앗!
[제퍼슨! 제퍼슨이 뜁니다! 제퍼슨이 뛰어요!]
제퍼슨이 뛰었다.
"미친!"
그 순간 달려들던 풀백, 마리오 루이는 기함했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제퍼슨이 순식간에 눈앞에 도달했다.
'뺏긴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는 순간.
루이가 있는 힘껏 내달려 발끝으로 볼을 툭 건드는 순간.
투욱!
[아아! 제퍼슨 리! 공을 길게 차고 냅다 뜁니다!]
제퍼슨이 반박자 먼저 공을 터치라인 선상으로 길게 내질렀다.
루이는 경악하며 곧바로 몸을 돌려 뛰었다. 아직은 루이가 앞서 있는 상태. 길목을 먼저 점유하며 공을 걷어 내면 그만이다. 달리면 된다.
'대체 언제?'
하지만 이내 루이는 눈이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뒤에 있던 제퍼슨이 오른쪽에서 별안간 튀어나와 공을 향해 냅다 달리고 있었다.
[제퍼슨 리! 터치라인 바깥으로 크게 돌아나가면서 치고 달립니다! 엄청난, What the······ 도대체 저 폭발적인 스피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패스 미스에 가까웠던 그 패스를.
단순히 스피드 하나로 이겨 내면서.
"막아!"
달려드는 포르투갈의 두 센터백 사이로.
투욱!
다시 길게 내지르는 공.
공이 먼저 빠져나가고,
그만한 속도로 제퍼슨이 두 센터백 어깨 사이를 오로지 힘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활짝 열린 공간.
뻐어어엉!
[Gooooooaaaal! 골입니다! 골! 환상적입니다! 정말로, 오, 이건 정말로! 아아!]
터치라인 바깥쪽으로 크게 돌아 치달하면서.
포르투갈의 최고 수비수 세 명을 허수아비로 만든 건.
단 두 번의 터치였다.
그것만으로.
제퍼슨은 포르투갈을 침묵시켰다.
[이 이름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의 이름은, 미국을 이끌고 월드컵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이름은, 제퍼슨, 제퍼슨 리입니다!]
< 219. 월드컵 징크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