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18화 (218/258)

< 218. 월드컵 징크스 (2) >

대표팀으로 뛰면서 절실하게 느낀 점이 있다.

'혼자서는 축구할 수 없지.'

소속팀에서 뛸 때, 나 혼자서 팀을 캐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적도 있다.

여기저기서 내 이름을 외치니까.

하지만 아니다.

축구는 팀 스포츠다.

내가 아무리 최전방에서 두 골, 세 골을 넣어도 수비진에서 네 골을 헌납하면 지는 스포츠다.

프리미어리그 최소 실점 2위에 빛났던 첼시의 수비진과 지금 대표팀의 수비진은 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로드릭이야 성장을 많이 하고, 맨유에서도 준주전 멤버로 평가받고 있긴 하다.

하지만 바카는 냉정히 말해서 아직 빅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수비수.

양쪽 풀백은 말할 것도 없으며, 골키퍼는 맨시티 소속이긴 했지만 자리 잡지 못하고 하부리그 팀에 임대를 전전하는 신세다.

때문에 버홀터 감독님은 수비진의 수비력을 향상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젠장! 뭐 하는 거야? 그쪽으로 움직이라고!"

"정신 차려!"

"내 말을 안 듣는 거냐, 아니면 무식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특히 크로아티아전에서 계속해서 약점을 노출했던 풀백은 팀의 큰 우환이었다.

버홀터 감독의 전술은 안정성과 정석적인 플레이를 추구한다.

현재 맨유의 그랜드 감독처럼 극단적인 공격전술은 시도하지도 않는다.

첼시의 필마르크 감독처럼 변칙전술을 즐기지 않는다.

오로지 안정성에 집중한다.

물론 이게 꽤 잘 통해서, 회귀 전 역사에서는 16강 진출에 성공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바로 저 수비력 때문이다.

정석적인 플레이는 단단한 수비력이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팀이 엄청 부족한 수준은 아니다.

센터백 조합은 훌륭한 편이었고, 양쪽 풀백이 수비력이 부족해도 공격력 측면에서는 꽤 괜찮았으니까.

다만 월드컵이란 무대.

다음 상대, 포르투갈 상대로는 의문부호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알고 대비했던 크로아티아에게도 그렇게 휘둘렸는데 말이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이 제프가 아니라면, 내 말 듣고 닥치고 움직여!"

쩝.

버홀터 감독의 기본 전술적 철학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니 낙관적이지는 않다.

이대로 수비력만 강화해 무승부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리그가 아니다. 월드컵, 토너먼트라는 형식에선 지극히 실리적인 축구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팀의 장점은 명확하지 않나.

"감독님. 차라리 절 믿고 공격적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요?"

"뭐?"

"무승부를 목표로 두고 수비에 힘쓰다가, 자칫하면 한 방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끄응!"

사실 버홀터 감독도 잘 아는 사실이리라.

이미 코치진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나오는 얘기니까.

그래도 당사자가 말을 하면, 감독님도 받아들이는 게 좀 다를 거다.

"두 골, 세 골을 먹혀도 우리는 네 골, 다섯 골을 넣으면 그만입니다."

"가능하겠나?"

"월드컵에선 가능성을 논할 수는 없죠. 단지 제 발끝과 동료들의 발끝을 믿을 뿐입니다."

"으음."

선택은 감독의 몫이다.

여기서 감독이 수비적인 전술을 지시해도, 나는 철저하게 따를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골을 넣기 위해 노력할 거다.

다만 우리의 장점을 죽여 가며 단점을 극복하려는 것보단,

단점은 단점으로 내버려 두되.

장점을 더 극대화하는 게 낫지 않나.

이게 내 생각이다.

뭐 어찌 됐든 간에.

내 생각대로 되던, 감독님 의중대로 되던.

결과는 똑같이 만들 거다.

반드시.

더 높은 곳으로.

***

경기장을 찾은 미국 관중들의 열기는 각국 언론사들이 취재할 정도로 뜨거웠다.

온몸에 성조기로 페인팅 한 사람부터, 캡틴 아메리카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몇몇 언론에선 미국에서 축구 열기가 이렇게 뜨거웠나 조명했다.

하지만 단지 이게 축구라는 종목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의 생활은 스포츠와 아주 밀접해 있었다.

미국은 여러 스포츠 방면에서 최정상이지만,

사실 그 스포츠들을 보면 축구만큼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끼친 종목이 있는지 의문이다.

야구와 아이스하키, 농구 등 정상급 스포츠는 많다. 다만 그것들이 축구만큼 전 세계적인 파괴력을 지녔는가?

축구는, 월드컵은 전 세계적인 무대다.

미국의 그 대단한 슈퍼볼 무대도 월드컵에 비교해 손색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슈퍼볼은 단지 미국인들만의 스포츠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 않나.

한데 이번 월드컵에선 미국이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확히는 제퍼슨 리가 그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이지만, 그딴 게 무슨 소용이랴!

"제프! 당장 저 자식들을 죽여 버려!"

"Sir, Captain!"

"Oh Captain, my captain!"

늘 남의 집 잔치에 불과했던 월드컵.

그 월드컵이 미국인들에게 있어 같이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됐다.

[미국이 시작부터 공격적으로 움직입니다! 맥케스의 패스! 제퍼슨이 잡습니다!]

제퍼슨 리가 공을 잡는 순간.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는 묘한 기대감.

공만 잡아도 무언가 해 줄 거란 그 기대감이, 뜨거운 함성이 되어 쏟아졌다.

[제퍼슨 리의 트레이드마크! 고스트 스텝입니다!]

맥케니의 패스를 이어받은 제퍼슨은 속도를 끌어올렸다.

달려드는 후벤 네베스의 거친 압박을 특유의 대각선으로 빠져나가는 고스트 스텝으로 간단하게 벗겨 냈다.

"미쳤군!"

"저 속도 보라고! 저 속도 그래도, 공을 놓치지도 않고 대각선으로 빠져!"

관중들은 환호했고, 중계진도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때로는 화려한 발재간이 사람들의 시선을 뺏지만, 지금은 오로지 압도적인 스피드를 활용하여 펼칠 수 있는, 상상만 했던 플레이가 현실화되는 것에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 리! 절대 속도를 죽이지 않습니다! 암, 그럼요! 달리기 시작한 전차에겐 전진, 또 전진밖에 없습니다! 포르투갈이 찢기고 있습니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린 지 고작 3분.

시작부터 맹공을 펼치는 미국의 선봉장은 제퍼슨 리였다.

[그의 고스트 스텝에 수비수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립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눈앞에서 휙 사라지는, 마치 유령을 본 것만 같은 플레이죠!]

무리하는 것 같으면서도, 유연한 움직임.

급격하고,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무브먼트.

수비수들은 제퍼슨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풀 악셀을 밟는 부가티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제퍼슨 리! 공간이 열리고, 슈웃! 슛! Goooooal! 골입니다!]

단숨에 수비수 셋을 허물고.

나머지 수비가 달라붙기 직전, 아주 짧게 열린 공간에 타이밍을 빼앗아 버리며 냅다 질러 버리는 직선 슈팅.

골키퍼가 차마 반응도 못 할 정도로 골네트에 꽂혀 들어가자.

"제----퍼----슨!"

"Yeaaaaaaaaaaaaaaaa!"

"LEE Will, LEE Will Fuck you!"

관중석의 미국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아니, 미국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의 관광객들.

경기를 보러 온 수많은 일반인도, 그 순간만큼은 미국인이 된 것처럼 일어나며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조직력도 아니고, 변칙적인 전술도 아닌.

그저 개인적인 힘으로 돌파 후에 꽂아 넣은 화려한 득점.

월드컵이란 세계의 축제에, 미국인들은 그 누구보다 더 기뻐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골이었다.

어쩌면, 이 골이 이들을 16강.

그리고 그 너머 더 높은 곳으로 가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제퍼슨 리! 월드컵 H조에서 벌써 6골을 뽑아냅니다! 믿기지 않는 엄청난 플레이입니다. 만일 미국이 16강, 8강, 4강, 그리고 그 너머까지 간다면! Oh, 이런! 제퍼슨 리가 기록할 득점은 도대체 몇일까요!]

[미국의 16강 진출. 첫 조추첨이 진행됐을 때, 그 가능성을 크게 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퍼슨 리는 가장 높은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 스포츠 방송의 중계진은 격정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쩌면 그건 스포츠 캐스터로서 중립적인 위치를 벗어난 것인지만.

그딴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람 감정은 더없이 솔직한 법인데.

[미국이 제퍼슨 리를 보유하고 있는 한, 그 무엇이든 가능할 것입니다!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

경기 시작 5분과 끝나기 5분 전을 조심하라.

축구계의 오래된 격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저 격언은 이렇게도 해석된다.

시작 5분과 종료 직전 5분 전에 기회를 노려라.

감독님은 결국 타협을 보였다.

"전반 초반에 골을 넣고 후반에 안정적으로 플레이한다!"

선수비 후역습이 아니라,

선공격 후역습.

전반전 상대가 신중하게 나올 때 몰아쳐서 득점을 만들고, 이후 수비적인 역습을 노리겠단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제프!"

풀리시치가 소리치며 중앙의 롤단에게 공을 내주고 왼쪽 측면으로 내달렸다.

크리스티안 롤단은 비록 미국 리그에서 뛰고 있는 친구지만, 그래도 왕성한 활동량만큼은 빅리그 선수에 뒤지 않았다.

그의 패스는 맥케니에게 향했고, 맥케니는 번뜩이는 센스로 선수 사이를 가로지르는 패스로 풀리시치에게 보냈다.

허!

저거 하베르츠에게 제대로 배웠는데?

"산티!"

풀리시치의 선택은 산티아고였다.

비록 나보다 주목은 덜 받고 있지만,

만일 내가 없다면 산티아고는 미국의 영웅으로 빛날 선수였다.

투욱!

발바닥으로 가볍게 공을 트래핑해 내며 동시에 빙그르르 턴.

수비수 하나를 떨쳐 내고, 스프린터를 터뜨리며 전진.

앞을 가로막는 태클을 발 안쪽으로 공을 소유하며 피해 낸 뒤.

"제프!"

슈팅하는 척 페이크.

그다음 뒤로 빼내는 힐 킥.

즉.

나에게 오는 패스다.

타앗!

"막아! 공간 내주지마!"

"저 괴물 자식을 막아!"

포르투갈 선수들이 기함하며 달려왔다.

저 최전방에서 수비 가담 따위는 안 하고 그저 지켜만 보는 그 자식은 빼고.

서너 명의 선수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특히 그중 눈에 익은 선수 하나.

"개자식! 이 쓰레기 자식! 미국으로 꺼져서 영화나 찍으라고!"

나에게 코뼈가 깨졌던 다닐루 페레이라가 온갖 욕을 쏟아 내며 달려들었다.

미안하지만.

"코 수술 잘됐다, 야."

"닥쳐!"

수비에 있어 중요한 건 침착성과 집중력이다.

고작 말 한마디로 흔들린다는 건.

이런 큰 무대에서는 치명적인 실책이다.

투욱!

달려드는 페레이라의 발끝을 피해 공을 드래그 백.

동시에 왼발로 오른쪽으로 쳐 내고, 갸우뚱하는 페레이라를 피해 역방향으로 다시 왼쪽으로 공을 툭 치면서.

"Wuuaaaaaaaaaaaaa!"

단 두 번의 터치로 벗겨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다음엔 또 다른 선수가 달려들었지만.

그 잠깐의 틈.

페레이라를 두 번의 터치로 벗겨 내면서 생기는 아주 짧은 시간.

공간이 열렸다.

"----!"

가끔 이런 순간이 있다.

집중과 집중이 중첩된 상태.

긴장이 최고조로 올라가고, 온몸의 감각이 활짝 열리는 듯한 느낌.

그 모든 감각이 내 앞의 공과, 발끝과 달려오는 수비수와 험악한 골키퍼의 표정에만 집중될 때.

새하얀 길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리던 온갖 함성과 수비들의 욕설, 야유가 음소거처럼 사라지는 시간.

이 순간을,

스트라이커들은 마법의 시간이라 부른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든 스트라이커가 한 번쯤은 공통으로 경험하는 현상.

그 순간이 찾아올 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게 있다.

전반전에 몰아치는 것만으로 상대의 의지를 죽일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더 절박해질 수도 있다.

하면 그 의지 자체를 끊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끔찍한 경험을 하게 해 주면 된다.

무기력하게 만들어 주면 된다.

스트라이커가 그렇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투욱!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내 감각이 천천히 근육을 작동시켰다.

공을 왼발로 긁어 뒤로 살짝 빼내고.

골문에서 약간 튀어나온 골키퍼를 본 뒤.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발을 뒤로 쭉 뺐다.

왼발 뒤로 오른발을 크게 꼬아서.

수비들의 시선을 혼란케 하고, 골키퍼의 시선을 교란하며.

그대로.

뻐어엉!

경기장이 거대한 침묵에 가라앉은 채.

발등에 정확히 공이 얹히는 느낌과 함께.

골키퍼의 손끝을 스쳐 가며 골문 안으로 뚝 떨어지는,

"--------!"

라보나 킥.

무시무시한 적막 속에서.

철럭!

상대에게 끔찍한 경험을 심어 주는 것.

그딴 건.

어렵지 않다.

늘 하던 일인데 뭐.

< 218. 월드컵 징크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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