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17화 (217/258)

< 217. 월드컵 징크스 (1) >

미국에 있어 월드컵은 즐거운 기억만이 가득한 대회는 아니었다.

100년 가까이 되는 월드컵의 역사 동안, 절반은 진출조차 못 했다.

진출하더라도 조별리그. 조금 운이 따르고 잘하면 16강이었다. 4강과 8강에 올랐던 적이 있지만, 4강은 1930년이었고 8강은 2002년 월드컵이었다.

아무튼, 그것은 다 과거의 이야기였다.

미국인들에겐 월드컵이란.

2018년엔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해서, 그저 TV로만 볼 수 있는 남의 집 잔치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제퍼슨 리! 끝내 미국을 구해 냅니다! 그는 히어로입니다!]

크로아티아 전.

2대 0으로 패색이 짙은 상황.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마저 포기할 때.

몇몇은 '우리가 여기서 지면 16강은 어떻게 돼?'라고 경우의 수를 따질 때.

[제퍼슨이 산티아고에게 멋진 골을 선물해 주고, 마지막에는 직접 밀집수비를 꿰뚫고 완벽한 동점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터져나오는 제퍼슨 리의 극적인 동점골.

미국인들은 미친 듯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에 미국 국가와 제퍼슨의 이름이 크게 울려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인이 아닌 아시안계의 스포츠 선수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된 것도 이례적이지만,

미국인들은 그런 사실에 단 조금의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다.

정말로 히어로처럼 팀을 구해 내고, 그들이 목표하는 바를 향해 미친 듯이 노를 젓고 있으니까.

[미국, 크로아티아와 2대 2 극적 무승부!]

[위기에 빠졌던 미국, 하지만 제퍼슨이 있었다. 후반 20분 동안 1골 1어시시트 몰아치며 무승부 견인.]

[제퍼슨 리. '내 유니폼에 USA가 붙어 있는 이상 우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

월드컵은 이변의 연속과 정석의 연속이었다.

포르투갈은 무난하게 뉴질랜드를 2대 1로 잡아냈다.

이로써 조별예선은 혼란에 빠졌다.

포르투갈이 1승 1무로 승점 4점.

미국이 1승 1무로 승점 4점.

크로아티아가 2무로 승점 2점.

뉴질랜드는 0점.

크로아티아는 3차전에서 뉴질랜드와 붙는다.

아마도 승점 3점을 가져갈 확률이 높다.

그리고 미국과 포르투갈이 만난다.

여기서 우리 두 팀이 사이좋게 무승부를 한다면, 승점 5점이 된다.

이렇게 되면 골득실까지 봐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유리하다. 뉴질랜드를 6점 차이가 나는 대승을 거뒀으니까.

그에 반해 포르투갈은 1점차 승리를 거뒀고.

크로아티아가 뉴질랜드 상대로 2점 이상만 뽑아내면······.

아우.

복잡해.

"필요 없어! 그딴 건 너희는 생각하지 마! 오늘 분석관들에게 보고를 받았다. 딱 하나다. 승점 3점! 승리만 하면 계산 따위는 필요 없다. 너희들 수학 잘 못 하잖아?"

버홀터 감독 말대로,

승리만 하면 복잡하게 계산할 건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크로아티아 양반들이 우리에게 이런 부탁도 했잖아?"

산티아고가 슬쩍 기사 하나를 보여 줬다.

크로아티아 감독의 경기 후 인터뷰였다.

'솔직히 말해 그 상황에서 승리를 의심하는 감독이 있을까요. 애석하지만 저 역시 그랬습니다. 후반전까지. 우리가 두 골을 넣고 서서히 지키는 포메이션으로 전환했을 때. 저는 이 경기에서 승리하고 16강에 한 발 더 가까워졌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다리치 감독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결코 패장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하지만 제퍼슨은 그 짧은 시간 동안 경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참 허탈하더군요. 우리는 코치진이 모든 전략을 쥐어짜 내고, 선수들이 미친 듯이 뛰어서 두 골을 겨우 만들어 냈죠. 하지만 제퍼슨은요? 정말 골을 쉽게 넣는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우리를 처참하게 했습니다. 더 무서운 사실 말입니까?'

다리치 감독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그 괴물이 고작 스물한 살이란 겁니다. 앞으로 월드컵은 적어도 세 번은 더 나갈 수 있죠! 우리에게 처참한 기분을 안겨 줬으니, 그가 제발 포르투갈을 상대로 대승을 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로서는 우리가 포르투갈을 잡는 그림이 베스트다.

물론 크로아티아가 뉴질랜드와 비기거나 패배한다면 다 물거품이긴 하지만.

다리치 감독의 반응을 보건데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패배하고도 담담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 우리 조는 마지막 경기까지 지켜봐야 16강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그림이 다 그려진 조도 있었다.

[A조 멕시코 1위, 3차전 튀니지와 무승부만 해도 16강 진출 확정.]

A조는 아직 혼란 중이었지만, 멕시코는 16강이 확정적이었다.

[C조, 독일과 폴란드, 우루과이. 독일이 승점 1점 차로 1위 자리 고수.]

C조는 독일이 앞서나가는 모양새에 우루과이와 폴란드가 2위 싸움.

[D조, 브라질 2승으로 16강 진출 확정! 일본 사실상 탈락]

D조는 브라질이 진출 확정했고, 스웨덴과 세네갈이 경쟁 중이었다. 일본? 미안하지만 이번 대회에 일본의 자리는 없었다. 본래 역사처럼,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E조, 벨기에, 나이지리아, 이탈리아 3파전. 이미 탈락이 확정된 온두라스가 마지막 변수.]

E조는 우리 조와 유사하다. 벨기에, 나이지리아와 이탈리아가 서로 승점 차이가 거의 없어서 마지막 경기까지 봐야 했다.

[F조, 디펜딩 챔피언의 몰락?]

가장 충격적인 건 F조였다.

프랑스가 스위스와의 첫 경기에서 1무를 한건 그럴 수도 있을 만했지만,

두 번째 경기인 우크라이나전에서 무승부를 거뒀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16강에 진출할 거란 예상이 깨졌다.

그 와중에 한국이 우크라이나에게 3대 1로 승리했고, 스위스 상대로 4대 2로 패배했다. 여기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G조, 네덜란드, 16강 진출 포기하지 않아.]

네덜란드가 1위할 거란 예상과 달리 콜롬비아가 벌써 16강 진출이 확정됐다.

네덜란드는 2위로 진출하기 위해 마지막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아, 그리고 B조를 깜빡했네.

[B조,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16강 진출 확정!]

16강 진출팀이 완전히 가려진 건 B조조가 유일했다.

B조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가 벌써 2승씩 16강이 확정됐다. 남은 건 3차전에서 1위와 2위를 가리는 싸움이다.

올리버는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자주 내 숙소를 찾아왔다.

"제프. 널 막는 게 쉬울까, 메시를 막는 게 쉬울까?"

"어려운 얘기군."

"올. 난 네가 당연히 나지! 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야. 메시나 나나, 너에게 '쉽다'라고 표현될 수는 없으니까."

"······나쁜놈. 말이라도 좋게 해주면 어디 이상한 데에 털이라도 나냐."

올리버의 울상에 난 피식 웃었다.

메시를 막는 방법이라.

우리가 아르헨티나를 만나면, 그것도 고민할 거리지만.

글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나마 다행인건 메시가 많이 늙어가고 있어서, 체력적인 문제가 크게 두드러진다는 점?

하지만 이런 걸 조언이라고 해 줄 수는 없고.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훈련장에서 날 막았던 걸 많이 생각해 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야."

"흠. 그러니 더 자신이 생기는데."

"그런데 날 한 번도 못 막아 봤잖아? 아마 메시도 못 막을 거야."

"······재수 없는 자식. 만일 미국을 만나게 되면 혼쭐을 내주마."

흠. 아마도 아르헨티나가 이기려나.

잉글랜드도 만만치 않은데.

하지만 지금 메시의 페이스가 미쳤다.

2경기 동안 1골 5어시스트.

공격수보단 중앙에 위치하면서 경기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이란 생각으로 미친 듯이 뛰고 있던 것이다.

마지막 월드컵이라면,

음.

이 친구도 마찬가지인데?

[크리스타누 호날두, '나는 포르투갈을 이끌고 유로에서 우승했고, 이번에는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다.']

우리 둘 다 꿈이 똑같다.

월드컵 우승.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이제 남은 3차전에서 우리 둘 중 하나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쩝.

우짜겠냐.

여까지 왔는데.

***

카타르 월드컵이 다른 월드컵과 다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겨울에 열린 월드컵이란 점.

그 사실로 인해 여러 변수가 생겨났다.

특히 유럽팀들은 고작 조별리그 두 경기를 치렀지만, 벌써 부상을 호소하는 선수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음바페가 쓰러지고, 수비진에서 센터백만 두 명이 쓰러진 것이 가장 심하긴 했지만.

나머지 유럽팀도 자잘한 부상 하나쯤은 안고 있었다.

불과 개막 일주일전까지 리그 일정을 치러왔으니까, 갑작스레 변한 기후에 적응도 되지 않은 점이 컸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미국과 상관없었다.

리그는 일찍 끝나 피로를 해소했다.

그뿐만 아니다.

달라붙은 온갖 피지컬 닥터, 트레이너, 코치들이 선수 한 명씩 전담하며 케어해 주고 있었다.

특히 각종 장비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미국이 직접 공수한 재활 장비들은 선수들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 줬다.

이런 무자비한 자본은 여러 팀의 감탄을 불러왔는데,

가장 부러움을 산 건 바로 이거였다.

"아니, 왜 얘들은 실내 잔디구장이 있어?"

"만들었대."

"뭐?"

"날씨가 더워서 훈련이 힘들다고 제퍼슨이 말했나봐. 그러더니 미국의 기업가들이 여기 건물 하나 통째로 사서 실내 구장 만들었다는데?"

"그게 돼?"

"되더라."

바로 실내 잔디구장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카타르는 11월인데도 한낮에는 최대 34도를 넘나드는 폭염을 자랑했다.

겨울철 리그 일정을 치르던 선수들에게 갑작스러운 이 변화는 꽤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다.

이런 사실이 미국에 전해지자,

평소 스포츠광이자, 이번 월드컵과 관련된 각종 사업에 투자한 미국의 부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제프하고 우리 미국의 영웅들이 더워서 훈련을 못하고 있다는데?"

"제기랄! 그러면 건물 안에 잔디구장을 만들어!"

"인조잔디로?"

"미쳤어? 우리 선수들이 인조잔디에서 뛰다 다치면 어떡할 거야?"

"천연잔디를 공수해서 실내구장을 만든다고?"

"만들어! 만들라고! 만들란 말이야!"

제퍼슨의 말 한마디에 실내 잔디구장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며 다른 팀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미국은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잘 할 수 있었다.

여러 첨단 스포츠 과학 기술이 도입된 결과물이었다.

하나 스포츠에는 늘 과학적인 것만이 있는 건 아니다.

스포츠만큼, 미신과 징크스에 신경 쓰는 분야는 없으리라.

"제기랄! 내 성모 마리아상 누가 봤어?"

가령 풀리시치는 개인 라커에 마리아상을 놓고 반드시 경기 전에 기도해야만 했고.

"난 경기 당일 날 씻지 않아. 재수 없거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산티아고는 당일날 씻으면 패배한다는 징크스가 있었고.

"수염 좀 깎으세요, 감독님."

"중요한 경기 앞두고 수염 깎으면 재수 없더라."

버홀터 감독은 수염을 밀지 않았다.

사실 별거 없는 미신처럼 보이지만,

스포츠 선수는 이런 징크스에 아주 예민했다.

"이 보고서는 뭔데?

"그 슈퍼컴퓨터로 경기 예측하는 시스템 있잖아요. 그거 이번 월드컵에 시험 삼아 도입한다고 하니까. 가볍게 의견 들어보라고 자리 좀 마련했답니다."

"쯧. 스포츠는 컴퓨터로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

버홀터가 미간을 확 좁혔다.

스포츠 현장에서는 미신과 징크스에 예민하다고 해도,

과학과 스포츠가 접목되면서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방식도 나타나고 있었다.

미국에선 슈퍼컴퓨터로 경기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시험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는데,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 일종의 참고사항으로 보고서가 보내지고 있었다.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각종 자료를 분석 종합하는 분석 팀장이 스크린을 띄웠다.

"이번 포르투갈전 관련 슈퍼컴퓨터의 분석 결과입니다."

그는 매우 담백한 표정이었는데, 특별한 얘기 없이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인업에 제퍼슨이 포함된 결과입니다."

"What?"

"제퍼슨이 라인업에 포함되면 승리확률 76%, 무승부 23%. 패배확률 1%입니다."

"······."

"즉, 제퍼슨이 라인업에만 포함되면 100번 경기해서 한 번 진다는 결론이죠."

"허."

"하지만 스포츠는 컴퓨터로 예측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죠."

"그렇긴 한데."

버홀터 감독은 헛웃음을 지었다.

엄연히 슈퍼컴퓨터의 예측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실제로 각국 언론에서 슈퍼컴퓨터가 예측한 월드컵 결과들이 늘 경기 전에 발표되는데,

실제로 빗나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이건 참고사항에 그칠 뿐이고 확신을 주지 못한다. 한데.

"믿을 만한데?"

"네?"

"제퍼슨이 있으면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는 결론. 이거 믿을 만한데?"

버홀터 감독은 순수하게, 슈퍼컴퓨터의 예측에 신뢰감이 생겼다.

< 217. 월드컵 징크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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