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에이스의 무게 (1) >
'텐백'이란 전술을 들고나온 팀의 목표는 하나다.
승점 1점이라도 얻거나, 역습으로 운 좋게 한 골을 넣어 승리하는 것.
뉴질랜드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다.
월드컵에선 이런 광경이 자주 벌어진다.
공격을 도외시하고 거북이처럼 움츠린 축구를 깨부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강팀이 터무니없는 차이가 있는 약팀에게 질 때가 바로 이런 경우다.
그러나 난 지금껏 이런 팀을 많이 상대해 왔다.
"제퍼슨을 막겠다고? 제기랄! 일단 수비부터 늘려!"
"공격 따위 포기해! 우리 목표는 승점 1점이다! 제퍼슨 상대로 1점을 따내는 것이 현실적이야!"
그간 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겪었던 수많은 팀.
그들 중 약팀들은 이런 선택을 수도없이 해왔다.
그리고 그런 팀을 만날 때마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Jefferson BOMB!"
"뉴질랜드에 핵폭탄을 터뜨려 버려!"
그런 약팀을 수없이 깨부쉈다.
"LEE Will LEE Will Fuck you!"
미국 관중은 특징은 이거다.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지르고, 서로 몸을 격렬하게 흔들며 노래를 불러 댄다.
마치 축제의 현장에 온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응원은, 의외로 아드레날린을 마구 치솟게 한다.
"USA!"
"GO! USA!"
맥케니가 거칠게 압박하는 뉴질랜드의 떡대 둘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오자 경기장이 일순간 뜨거워진다.
그리고 오른쪽 대각선으로 쭉 뻗어 나가는 스루패스.
짜식, 거친 플레이에 망설임이 없어졌네.
"조던 모리스!"
"Ruun!"
윙어, 조던 모리스가 엄청난 속도로 우측면을 내달렸다.
비록 테크닉이나 여러 면이 부족하더라도, 그 주력만큼은 엄청났다.
"Ruuuuuun!"
지켜만 봐서는 안 된다.
스피드가 빠르다고, 팀에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중앙의 스트라이커가 너무 느리다면, 윙어는 공을 몰고 들어가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수비는 자리를 잡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공을 돌리기 마련이다.
조던 모리스의 장점은 딱 두 가지다.
빠른 주력과 꽤 정확한 킥으로 배달되는 크로스.
전형적인 클래식한 윙어 스타일.
그래서 나는 그가 뛰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앞의 선수를 그대로 지나쳐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것은 특별한 계산 하에 이뤄진 게 아니다.
그저 본능적으로.
'골 냄새.'
골 냄새가 났다.
여기로 가면 골이 나온다.
그 특유의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양옆으로 치열하게 어깨싸움을 걸어오는 수비 사이로 파고들었다.
"죽여 버려!"
영어권 국가하고 경기 치를 때 장점이 이거다.
서로 언어가 통한다는 점.
아, 이게 왜 장점이 되냐고?
"꺼져라! 이 쓰레기 같은 고자 새끼들아!"
트래시 토크가 잘 통하거든.
날 감싸는 놈들의 팔에 순간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을 파고들었다. 헐거워진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조던 모리스가 오로지 나를 보고 올린 감아 차는 크로스.
힘껏 뛰어올라, 다리로 공을 후리듯 목을 길게 빼서 후려버렸다.
음.
머리로 공을 후린다는 게, 이런 건가?
뻐엉!
"Gooaaaaaaaaaaaaaal!"
"U—S—A!"
"Jeff Fucked New Zealand!"
축구를 하면 행복하다.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관중도 행복해하고.
벤치에서 필드를 바라보던 버홀터 감독도 어퍼컷 세레머니를 하며 웃었고.
나 역시도, 울상인 수비수들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했다.
뭐.
전반 18분 두 골이라.
아직 압도적이려면 골이 더 필요한데.
***
뉴질랜드의 수비 전술은 이미 통한다는 것이 증명된 전술이었다.
그들은 월드컵 전에 치른 평가전에서 에콰도르, 일본, 터키를 상대로 세경기 2실점만 내줬다.
물론 실전과 평가전은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수비력이 나쁘지 않다는 건 분명 증명됐다.
그러나 그 증명된 사실에 제퍼슨이 정면으로 반박했다.
바글바글한 수비진을 상대로 과감하게 돌파한 후 골을 때려 넣는 폭발적인 스트라이커의 전형.
멀리 날아오는 크로스를 단 한 번에 골문 안으로 욱여넣는 헤더 능력.
거친 몸싸움에서도 절대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
스트라이커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으로도, 뉴질랜드의 단단한 수비를 박살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제퍼슨은 계속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
제퍼슨을 잘 모르던, 그리고 그의 플레이를 늘 보지는 않던 뉴질랜드 관중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저렇게 몸이 큰데 왜 이리 빨라?"
"드리블을 봐! 저 친구 이름이 메시라고? 아니지. 네이마르랬나?"
간간이 터져 나오는 화려한 개인기.
플립플랩부터 시작해서 라 크로케타, 수비를 농락하는 넛 메그. 알고도 속아 넘어가는 스텝 오버까지.
단지 개인기만으로 수비 네 명을 벗겨 낸 제퍼슨은 또 한 번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제퍼슨 리는 월드컵에 참가한 수많은 선수 중에 최고가 분명합니다! 맙소사! 세상에! 믿기지 않네요! 아무리 뉴질랜드 수비수가 톱 레벨은 아니더라도, 프로선수를 저렇게 농락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중계진의 격양된 외침처럼,
제퍼슨은 수비수들을 그저 바보로 보이게 만들었다.
수비를 전혀 하지 못하는 선수인 것처럼 말이다.
공간을 만들어 낸 제퍼슨은 페널티 박스 우측에서, 왼발 인프론트로 강력한 슈팅을 감아 찼다.
뻐어엉!
[Gooooal! 골! 골입니다! 전반 27분 만에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만들어 냅니다! 이번 월드컵 첫 번째 해트트릭입니다!]
[왼발 인프론트 슈팅! 아름답군요. 오, 찬란하게 빛나는 스트라이커입니다. 돌파력, 드리블, 스피드, 강인함, 몸싸움, 침착함까지!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강력한 스트라이커가 틀림없습니다!]
[미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지금이 그에 대한 답변이군요! 미국은 변수가 아닙니다! 제퍼슨과 미국은, 언제든 월드컵의 높은 자리를 향하는 상수입니다!]
그간 답답한 경기력으로 온갖 비난에 직면했던 그렉 버홀터 감독은 새빨개진 얼굴로 방방 뛰었다.
"다 좆까! 이게 축구다!"
***
[누군가 축구가 재미없다고 했다. 그런 머저리 자식들은 당장 TV를 켜서 폭스 스포츠를 틀어! #월드컵 #미국VS뉴질랜드 #제퍼슨 리 #캡틴 아메리카]
[솔직히 말하지.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순간, 바지가 젖었어. #제퍼슨 리 #해트트릭 #월드컵]
[빌어먹을. 마약을 끊었는데, 마약을 다시 하는 기분이야. 황홀하기 짝이 없어! #제퍼슨 리]
ㄴ너 마약수사대에 신고했음.
[이제 경기 보기 시작했는데, 골 넣는 거 나만 못 본 거야? 경기 다시 시작하면 안 돼? #월드컵]
ㄴ오, 세상에. 신이시여. 왜 미국엔 머저리들만 가득 합니까.
ㄴFuck you.
***
"이 머저리 같은 것들아! 정신 차리라고!"
뉴질랜드의 디키 헤이 감독은 목이 갈라질 정도로 소리쳤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파악했다.
'어째서 그게 득점이 된 거지?'
그저 평범한 패스였다.
웨스턴 맥케니가 짧게 내주는 패스였다.
그리고 평범한 윙어가 페널티박스로 올려 준 나름 날카로운 크로스였다.
그런데 말이다.
"평범했는데, 왜 이렇게 위협적인 거야? 제기랄! 9번에 달라붙어!"
제퍼슨 리.
평범한 패스. 평범한 크로스.
도저히 득점 찬스로 연결되리라 믿기지 않는 그 일련의 행위들이 제퍼슨에게 연결되는 순간.
평범함이 특별함이 되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다.
통제 불가능이다.
수비수 두 명, 세 명, 아니 네 명이 달라붙어도 막지 못한다.
괴물이다.
혼자 수십 명의 군인을 학살하는 영화 속 괴물 같았다.
에일리언?
그랬다.
상식 외의 존재.
보면 몸이 절로 굳어지고,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공포스런 존재 말이다. 그 영화 속의 괴물처럼 느껴졌다.
압도적인 힘과 피지컬. 수비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은 위치 선정까지.
심지어 거기엔 유연함과 화려한 개인기까지 탑재되어 있다.
하지만 선수 네다섯이 붙기 시작하자, 제퍼슨은 전반전과 같은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투욱!
뻐어엉!
[산티아고! 제퍼슨이 떨어뜨려 준 볼을 그대로 가볍게 밀어 넣습니다!]
[gol! gol! gol! 5대 0! 제퍼슨은 벌써 3골 2어시스트, 산티아고는 2골을 기록합니다!]
[가장 위협적인 Big and small! 그 누구도 이 환상적인 듀오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제퍼슨을 어찌어찌 막는다?
그럼 뭐 하나.
제퍼슨에게 몰린 수비수들.
그 사이로 피파 베스트 일레븐에 오른 공격수, 산티아고가 거짓말처럼 파고드는데.
"공격진만큼은 월드컵 최고입니다."
"저 투톱은 이번 대회 통틀어 최고 중 하나일 게 틀림없어요!"
코치진은 어느새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디키 헤이 감독은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지금 그는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도미노!'
마치 도미노처럼 와르르르 무너져 내리는 뉴질랜드.
이대로라면, 이 흐름이라면 실점을 더 내준다.
그러면 최악의 스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앞으로 있을 모든 경기에 영향을 미치리라.
하물며 자신의 커리어에도 가장 치욕적인 기록으로 남으리라.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더는 실점을 내주면 안 된다.
"미드필더를 공략해! 미국의 약점은 미드필더다!"
그래도 월드컵에 진출한 팀의 감독 안목은 남다른 법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날카롭게 상황을 분석했다.
미드필더가 약점이다.
미국의 조금 허술한 중원을 꿰뚫어 본 것.
그의 예상은 맞았다.
중원에 숫자를 늘리고, 압박을 가하자 제퍼슨이 공격진에서 2선으로, 심지어는 3선까지 직접 내려가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이거다!'
물론 최전방에는 아직도 산티아고가 있다.
그러나 최전방 박스에 제퍼슨이 있는 것보단, 아래에 있는 게 부담감이 덜하지 않나?
페널티 박스에서는 폭군, 그 자체였으니까.
"후우. 일단 한숨 돌렸군."
"아무리 제퍼슨이어도 설마 미드필더 자리에서 골을 미친 듯이 넣겠습니까?"
코치의 말에 디키 헤이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유명한 격언을 뒤늦게 떠올렸다.
[제퍼슨 리, 2선까지 내려와 공을 잡았습니다!]
[오, 공간이 열렸습니다! 그대로! 그대로 때립니다! 슈우우웃! Lovly Goal! 대략 30m 거리에서 중거리 슛을 꽂아 넣습니다!]
"Gooooooooaaaaal!"
"제프! 제프가 또 넣었어!"
"제-퍼-슨! 제-프!"
"LEE Will, LEE Will Fuck you!"
괴물같이 우렁찬 함성소리는 디키 헤이의 감독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볼펜을 툭 떨어뜨렸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저기서 골을 넣는다고?"
***
[H조 첫 경기, 미국 대승으로 월드컵 산뜻한 시작! 뉴질랜드를 7대 1로 무너뜨리다!]
[제퍼슨 리, 월드컵 데뷔전에서 4골 2어시스트 폭발! 카타르에서 가장 위험한 스트라이커가 되다.]
[미국 팬들, 제퍼슨을 부르짖다. '제퍼슨을 건드는 놈은 미국의 주적이 될 거다!']
[미국 감독, 그렉 버홀터 '우리 월드컵은 이제 시작됐다. 보라. 이번 월드컵의 주인이 누가 될지.']
[뉴질랜드 핵심 수비수, '차원이 다른 클라스. 세계의 높은 벽을 체감했다.' 제퍼슨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1 어시스트 적립, 조던 모리스 '그는 나를 가장 완벽한 윙어처럼 만들어줬다. 내 크로스를 예술적인 헤더로 마무리했다. 완벽한 캡틴이다.']
[미국, 제퍼슨 리의 이름을 연호하다.]
[뉴욕, 캘리포니아, LA, 미네소타 각 주에서 길거리 응원 쏟아져 나와]
[믹스트존 인터뷰]
Q. 엄청난 대승이다. 기분은 어떤가?
A. 행복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죄송하다.
Q. 뉴질랜드에게 미안함을 느끼는가?
A. 물론 그들에게 냉혹한 패배를 안겨줘서 미안한 감도 있다. 하지만 내가 죄송함을 느끼는 건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Q. 당신은 4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결과물인가?
A. 지금 이 자리에서 웃으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건 내가 경기가 끝나고도 좀 더 뛸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단 증거다. 경기가 끝났는데 체력이 남은 건,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과 북미에서 지켜보고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죄송한 일이다.
Q. 18년 러시아 월드컵 진출이 실패했던 미국이다. 당신은 미국에게 큰 선물이 되었고, 미국이 어디까지 갈 것으로 예상하는가?
A. 너무 뻔한 질문 아닌가?
Q. 뻔하다니?
A.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시선은 오로지 가장 높은 곳에 닿아있다.
Q. 하지만 너무 꿈같은 얘기 아닌가?
A. 꿈은 누구나 꾸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꿈을 평가하고 판단 내릴 수 없다.
나는 더는 꿈만 꾸기는 싫다.
보라.
이제 우리가, 위대한 아메리카가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을.
지금부터다.
가장 뜨거운 겨울이 온다.
< 214. 에이스의 무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