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13화 (213/258)

< 213. World Cup (3) >

"산티, 제발 저 녀석 좀 어떻게 해 줘."

"원래 저런 놈이잖아."

"아니, 영국 가서 더 미친놈이 됐다니까. 고등학교 땐 그래도······."

"똑같았지?"

"생각해 보니 그러네."

다 들린다. 산티놈아. 로드릭놈아.

"캡틴이 공식선상에서 우승하겠다고 한 건 진짜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니야?"

"우승해도 본전으로 만든 거지. 제프가 멍청한 거야. 맥케니, 넌 저런 캡틴을 닮지 마."

풀리시치는 놀라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맥케니를 위로한답시고, 그런 말을 해 댔다.

쯧.

정작 그러면서 표정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다.

은근슬쩍 내 뒤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그래, 까짓 것 우승해 버리자. 우리가 리그에서 만난 월드 클래스 수비수들도 다 별거 아니었잖아?"

뭐, 홧김에 지른 것이긴 한데.

반쯤은 진심이 담겼다.

솔직히 16강에 만족하기엔 월드컵이란 대회가 너무 크고 길다.

16강만 해도 러시아 월드컵 본선 자체에 진출하지 못했던 미국으로서는 좋은 성과다. 나쁜 조 편성을 생각하면 말이지.

하지만 1년, 2년만 지나도 그 성과는 잊힌다.

우리는 그 이상을 바라봐야 한다.

토너먼트는 변수가 너무 많고 이변이 자주 일어난다. 하물며 본래 역사의 카타르 월드컵은 더 그랬다.

'물론 원래 역사하고는 많이 틀어졌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미국은 포르투갈이나 크로아티아와 한조가 아니었다.

그걸 명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한국이 당시 포르투갈이랑 한 조였으니까.

여러모로 역사가 바뀐 셈이다.

어쨌든, 이젠 아무도 모르는 변수와 이변을 기대하고, 또는 견제해야 한다.

2002년엔 한국이 4위를 할 줄은 누가 알았으며, 러시아 월드컵에선 독일을 이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또 그 전차군단 독일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줄은 어떻게 알고?

그렇다.

절대적인 건 없다.

우리 대표팀이 저 높은 곳까지 가는 것에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완벽하게 만드는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가자! 가서 기죽은 애들 기 좀 살려주고! 첫 게임 끝장내야지!"

첫 상대는 뉴질랜드.

우리로서는 최선이다.

첫 승리만큼 팀 사기를 북돋는 건 없으니까.

***

<2022 카타르 월드컵 조 편성>

[A조: 카타르, 멕시코, 터키, 튀니지]

총평: 의외의 죽음의 조? 확실한 강자가 없다. 카타르는 개최국 프리미엄을 살릴 것이고, 멕시코는 북중미의 강자이며 터키와 튀니지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상대. 16강 진출팀을 예상하기 힘든 조.

[B조: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이란, 페루]

총평: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16강 진출 유력. 그러나 이란의 늪축구와 코파아메리카 준우승에 빛나는 페루가 이변을 연출할 수도!

[C조: 독일, 우루과이, 폴란드, 코스타리카]

총평: 힘의 축구 독일과 폴란드, 남미의 강자 우루과이. 그리고 약체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는 기적을 바라야 한다.

[D조: 브라질, 스웨덴, 세네갈, 일본]

총평: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과 힘과 높이의 스웨덴, 그리고 아프리카의 강국 세네갈, 아시아의 블루 사무라이 일본. 브라질의 진출이 유력한 가운데, 두 번째 진출팀은 과연?

[F조: 프랑스, 스위스, 우크라이나, 한국]

총평: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는 깰 수 있을까? 조 편성으로는 프랑스의 16강 진출이 유력. 한국과 우크라이나가 이변을 만들 수 있을까?

[G조: 네덜란드, 콜롬비아, 모로코, 카메룬]

총평: 근래 힘이 빠진 네덜란드, 상승세인 콜롬비아, 아프리카의 만만치 않은 모로코와 카메룬. 그래도 네덜란드는 16강에 간다.

[H조: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미국, 뉴질랜드]

총평: 유로 우승팀 포르투갈, 월드컵 준우승 팀 크로아티아의 진출이 유력하다. 하지만 변수는 존재. 미국의 공격진 제퍼슨 리와 산티아고 차베즈는 월드컵 전체를 봐도 최고다. 이들이 이변을 연출할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아! 뉴질랜드? 아쉽지만 그들의 꿈은 여기까지일지도.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제퍼슨이 미국 대표팀 캠프에 합류한 이후.

카타르와 멕시코의 개막전이 열렸다.

결과는 멕시코의 4대 1 승리.

개최국인 카타르는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그렇게 시작된 지구촌 가장 큰 행사인 월드컵은, 감독들의 날카로운 신경전도 화제가 됐다.

"감독님, 미국과의 첫 경기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뉴질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인 디키 헤이에게 쏟아진 질문이었다.

뉴질랜드와 미국은 H조 첫 경기를 치른다.

양 팀은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서로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다.

포르투갈과 크로아티아라는 확실한 강팀이 존재하는 H조.

뉴질랜드로서는 미국이 그나마 할 만하다는 상대였다.

16강이라는 기적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든 승점을 얻어 내야만 한다.

만일 이번 경기에서 지는 팀이 있다면, 그 팀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확률이 매우 높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우리는 강합니다. 마오리 전사들은 강인합니다. 남아공에서 이탈리아, 파라과이, 슬로바키아 등이 우리를 얕봤다가 큰코다쳤죠. 미국은 껄끄러운 상대입니다. 하지만 축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명백한 의도가 담긴 답변이었다.

현재 미국은 제퍼슨과 산티아고가 없으면 그저 그런 팀이라고 꼬집은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뉴질랜드는 그만한 스타 선수도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미국은 호주하고 친선전 때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가능성이 있어!'

뉴질랜드는 애당초 월드컵 본선 진출이 기적이라고 평가받는 팀이다. 그런 기적이 조별리그에서 또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팀입니다. 원팀! 스타 한두 명을 앞세우는 미국과 다르죠. 원팀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뉴질랜드 감독이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면,

미국의 버홀터 감독은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그래서 우리가 만만하답니까? 제기랄. 엿이나 처먹으라고 하십쇼!"

***

"버홀터 감독이 원래 이런 감독이었나?"

"너 없는 동안 미친 듯이 스트레스 받았어. 미국 기자들 극성인 거 알잖아."

토론토 시절 함께 뛰었던 수비수, 알렉산더 바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바카와는 오랜만이다.

몇 번 대표팀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말이지.

그러고 보니 바카도 이번 월드컵을 기점으로 해외에 진출한다고 들었는데.

"프리미어리그는 안 가."

"왜?"

"로드릭이 고통스러워하더라고. 널 상대하는 것도 죽겠는데 산티아고도 왔다고."

"그럼 우리 팀으로 오면 되지."

"오퍼가 와야지."

듣기론 바카는 스페인으로 갈 거라고 들었다.

현재 몇 개 오퍼가 온 상태고, 월드컵에서 활약하면 더 좋은 조건으로 갈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도 이번 월드컵이 중요했다.

"그래도 네가 오니까 좀 마음이 놓인다. 우리 팀 공격 진짜 안 풀렸거든. 평가전 때 죽어라 막아도 골이 안 들어가니까, 결국 한두 점 내주고 지고······ 너랑 산티도 오고, 풀리식도 오고. 맥케니도 왔으니까."

바카는 확실히 얼굴이 좋아 보였다.

공격진에서 확실한 카드가 왔고, 수비진에도 로드릭이 왔으니 혼자 수비하던 부담감을 덜어 낼 수 있으리라.

어쨌건 팀의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여러 압박에 시달리던 팀이지만,

유럽파 친구들이 온 이후로는 꽤 분위기가 좋아졌다.

"내가 너를 캡틴으로 정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버홀터 감독이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사실 내가 뭘 한 건 없다.

다만 존재감이란 게 있다.

우리 대표팀에 있어서,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에 있어서 내가 가진 상징성은 내 입으로 얘기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그저 평범한 축구선수가 아니다.

몇몇 어린 이들에게 나는 우상이었고, 믿음직한 후배였으며, 강인한 선수였다.

내가 대표팀에 합류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독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이렇게 살아나는 분위기를, 확실하게 살리는 방법은 딱 하나다.

승리.

"당연하지. 뉴질랜드는 우리가 무조건 이겨야 한다."

버홀터 감독이 비장미가 감도는 얼굴로 소리쳤다.

만일 뉴질랜드에게 진다면, 아니 무승부라도 한다면.

온갖 이변의 연속인 월드컵에선 치명적인 실책이 된다.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도 모른다.

이겨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월드컵의 첫 시작.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 그쳐선 안 된다.

"뉴질랜드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우리는 압도적으로 이겨야 합니다. 감독님."

"압도적?"

"미국이란 팀이, 절대로 약체가 아님을 보여 줘야죠. 그것도 압도적으로 말이에요."

압도적인 승리.

그것이 필요했다.

***

미국과 뉴질랜드의 경기.

H조 첫 경기가 시작되는 시간.

"Run! Crush New Zealand!"

라커룸에서 감독이 그렇게 소리쳤다.

달리고, 뉴질랜드를 부숴 버려라.

터널에서 나가기 전부터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온다.

비록 카타르였지만, 이곳까지 날아온 미국 관중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월드컵에서 비교적 비인기 팀들의 경기는 관중석이 비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 경기장은 거의 매진에 가깝다고 들었다.

그것도 대부분 미국 관중으로 말이다.

"오랜만이네? 대표팀에서 이렇게 투톱으로 나오는 거?"

"사이좋게 해트트릭하자고."

"허. 그게 쉬운 줄 알아?"

"둘이 하면 쉬워."

나와 산티아고가 투톱으로 나선다.

미드필더에는 풀리시치, 웨스턴 맥케니, 크리스티안 롤단, 조던 모리스가 출전한다.

수비수로는 왼쪽부터 다니엘 로비츠, 알렉산더 바카, 제임스 로드릭, 레지캐논이 나온다.

맨시티 소속의 잭 스테판이 골키퍼 장갑을 꼈다.

그러고 보니 같은 프리미어리그인데, 임대로만 전전해서 그런지 정작 리그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MLS에 소속된 선수가 절반이 넘는 라인업.

사실 쉽지 않다.

크리스티안 롤단은 시애틀 소속의 꽤 좋은 미드필더지만, 유럽 정상급과 비교해서는 부족한 면이 많다.

우측 윙어인 조던 모리스는 공격수 출신으로, 정통 윙어는 아니다. 하지만 발이 빠르고 킥도 괜찮은 편이라 그 자리에서도 꽤 활약해 주리라.

수비진은 로드릭과 바카 조합이다. 꽤 믿음직한 조합이지만, 양쪽 풀백이 걱정되긴 한다. 다니엘 로비츠는 공격력은 좋지만, 돌아오지 않는 수비수로 불릴 정도로 수비력이 다소 부족하다. 레지 캐논은 발 빠르고 돌파력 있지만 패스가 끔찍한 수준이더라.

'월드컵이 빡세긴 하구나.'

첼시에서 뛰다가 대표팀으로 오니,

몸으로 느껴지는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인제 와서 겁먹고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축구는 모른다.

강팀과 약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

그러면 늘 강팀이 이길 것이고, 약팀은 패배만 할 것이 아닌가.

축구는 수많은 복합적인 요소가 맞물려 일어나는 화학반응과 다름없다.

나는 이 화학반응을 우리 쪽으로 이롭게 만들어야 한다.

아니,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Great America! For the Victory!"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우리를 응원하던 소리도 잠잠해졌다.

성조기를 들고 그들은 곧 우리와 함께 미국 국가를 불렀다.

쩝.

미국 대표로 월드컵에 출전할 줄이야.

빙빙 돌아 이렇게 오긴 했지만.

이젠 내가 할 건 하나다.

국가 연주가 끝나고.

"가서 죽여 버려! 제프!"

누군가의 외침처럼.

오늘 뉴질랜드를 부순다.

***

휘슬이 울리고, 시작은 탐색전이었다.

뉴질랜드 감독은 라인을 내리고 역습을 노렸다. 미국도 황급히 공격하다가 역습에 무너질 수도 있기에, 신중하게 움직였다.

"USA! USA! USA!"

성조기가 나부끼고.

조용한 탐색전과는 달리 관중석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제-프!"

"Wuuuuuuaaaaa!"

그 얼마나 그리워했던 이름인가.

미국 관중들은 제퍼슨을 보며 환호했다. 그가 유럽에서 보여 준 압도적인 활약을 보고 길거리에 나와 응원하던 사람들이 바로 지금의 관중이다.

미국 축구 역사상, 북미 축구 역사에 있어 유일한 선수.

유럽을 제패하고, 세계에서 공인받은 넘버원 스트라이커.

여기에 온 관중들의 자부심이었다.

[제퍼슨! 웨스턴 맥케니의 패스를 받고 움직입니다!]

산티아고가 최전방으로 나가고, 다소 내려앉은 제퍼슨이 맥케니로부터 패스를 받고 급격하게 90도로 틀면서 수비를 떨쳐내자 박수가 쏟아졌다.

"제퍼슨! 축구가 재밌다는 걸 보여 줘!"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제퍼슨 리! 속도를 끌어올립니다! Oh, God! 말도 안 되는 스피드! 단숨에 공간을 찢어 버립니다!]

전반전 시작 5분.

탐색전이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제퍼슨 리의 돌파! 치명적입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뉴질랜드의 건장한 수비들이 모조리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건 화려한 발재간도 아니었다.

보통 어렸을 때 럭비를 즐기던 뉴질랜드의 수비수들 대부분은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 체격이 우습게, 제퍼슨의 돌파에 너무도 허무하게 틱틱 쓰러졌다.

제퍼슨은 맹렬한 기세로 우직하니 밀고 들어갔다.

"미친!"

"손으로라도 막아!"

어림도 없었다.

[오늘 제퍼슨은 온몸에 오일이라도 바르고 온 것 같군요! 수비수들이 건들 때마다 모조리 튕겨 내고 있습니다! 오, 이런! 또 한 번 제쳤습니다! 넛 메그라니요!]

수비수 하나를 넛 메그로 무너뜨리는 굴욕을 선사한 제퍼슨은, 어느새 모든 수비를 쓰러뜨리고 박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제퍼슨 리! 슈, 슈웃, 이런! 한 번 접고! 오 이런! 골키퍼 어정쩡하게 튀어나오는, 오 마이갓! 로빙 슛! 골키퍼 머리를 넘겨 골문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Goal! Goal! 미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첫 골을 넣습니다!]

뉴질랜드 진영을 마치 본인 집 앞마당처럼 누빈 제퍼슨이, 끝내는 골키퍼를 속이는 로빙슛으로 첫 골을 신고하자.

"What the Fuck!"

"God bless America!"

"캡틴 아메리카의 슛이다! 이 개자식들아!"

답답했던 양상을 뻥 뚫어 버리는 장면.

그간 미국 팬들이 그토록 원했던, 격렬하고, 맹렬하며 다이나믹했던 그 장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뉴질랜드 선수 네다섯 명을 홀로 스피드와 압도적인 힘으로 떨쳐 낸 채.

골키퍼를 코앞에서 농락하는 화려한 발재간과 일대일 상황에서 침착하게 끝까지 기회를 엿보는 두둑한 배짱.

[제퍼슨 리가 뉴질랜드의 월드컵을 향한 꿈을 처참하게 찢어 버립니다! 아아! 제퍼슨 리! 미국의 월드컵은, 이제 시작입니다! 제퍼슨의 발끝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시작됐다.

< 213. World Cup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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