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파리채 (4) >
필드는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맥케니가 처음 태클을 당하기 전부터 이미 치열하게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물며 거기에 또 한 번 선수가 쓰러졌으니까.
물론, 나는 최대한 고통스러운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
"이, 개자식. 넌 내가 죽여 #@#@@."
"#@@@$@#@!"
"Wuuuuuuuuu!"
주심이 휘슬을 삑삑 울렸다. 과열되기 시작한 분위기. 양쪽 선수들이 충돌할 것처럼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대기심까지 급히 필드로 뛰어갔다.
선수들이 서로 자기네 언어로 불같이 화를 토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다.
심판은 그 상황에서 쓰러진 페레이라에게 옐로카드를 줬고,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선언했다.
나에게도 의료진이 다가왔고, 아쉽게도 옐로카드를 줬다.
"괜찮아? 다리 괜찮아?"
"제프! 어때? 괜찮아? 오, 세상에. 정말 괜찮아?"
캉테와 맥케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구겨진 내 표정을 보더니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달려온 의료진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다리는 괜찮아. 빌어먹을."
"표정이 너무 심각한데?"
"내 연기력이 너무 허술한가 봐. 나도 경고를 받을 줄이야."
"······."
할리우드 액션 연습 좀 할 걸.
***
비록 제퍼슨도 경고를 받았지만, 먼저 위험한 태클을 한건 페레이라였다.
페레이라의 경고 누적으로 인한 퇴장.
그리고 그 지점에서 프리킥이 선언됐다.
필드에 다시 들어온 제퍼슨이 맥케니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맥케니, 이제 저 녀석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뛰어. 아, 프리킥은 네가 차고."
맥케니의 얼굴에 일순 파문이 일었다.
"내가? 내가 차라고?"
당황스러움, 그리고 자신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샬케에서도 세트피스를 담당했을 정도로 킥이 좋다.
그러나 축구에서 기술과 실력만으로 모든 게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수비벽을 앞에 두고, 자신이 원하는 궤적으로 정확히 찰 수 있는 선수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실력에 대한 확신과 믿음, 그리고 수비벽을 보고도 쫄지 않는 담대함이다.
그런 면에 있어 맥케니는 반쪽짜리 선수였다.
하물며 오늘 페레이라에게 부상을 당할 뻔하고, 잔뜩 위축된 맥케니가 아닌가.
그러나 제퍼슨은 담담하게 말했다.
"생각해 봐. 챔스 데뷔전, 그것도 파리 상대로 데뷔골을 넣는다고."
"내가 그걸 한다고?"
"페레이라도 없어. 너 발목 멀쩡해. 제대로 때릴 수도 있지. 앞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에, 월드컵 우승컵까지 들어야 하는데. 고작 그걸로 쫄아?"
"허."
맥케니는 입을 쩍 벌렸다.
대체.
이 녀석은 심장이 강철로 되어 있단 말인가?
챔스 우승컵까지 노리겠다는 건 그래도 들을 만하다. 이미 작년에 한번 해본 친구니까.
하지만 갑자기 월드컵 우승이라니.
이 녀석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이건 숫제 담대함이 아니라, 대담함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월드컵 우승까지 자신도 함께한다고 거론했다는 것.
그 사실에 맥케니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어쩐지 모르게 몸에 기운이 나는 기분이었다.
"왼쪽 구석 아래로 낮게 때려 봐."
"저쪽?"
"응. 골키퍼가 저쪽이 가장 취약해."
"수비가 속을까?"
"그건 문제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어느새 맥케니는 프리킥을 차기로 했다.
그건 제퍼슨의 배짱인지, 아니면 담대함인지 알 수 없는 대단한 배포에 감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묘하게, 제퍼슨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골문까지 거리는 26m.
충분히 직접 득점을 노릴 만한 거리.
하지만 감겨 차는 궤적이 아니라, 바닥으로 낮게 직선으로 깔아 차는 건.
맥케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차라고 조언한 걸까.
지금은 수비벽을 넘기며 감겨 들어가는 궤적이 베스트다.
'지금이라도 감아 찰까?'
그렇게 한다면, 제법 괜찮은 궤적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맥케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간 경기에서 본 제퍼슨은 필드 위에서 만큼은 허투루 말을 내뱉지 않는다. 무언가 확신이 있을 때만 조언을 던진다.
이번에도 그럴 거다.
하물며 본래 프리키커인 제퍼슨이 자신에게 공을 양보하지 않았나.
심리적인 갈등을 끝내고, 맥케니는 그대로 공을 때렸다.
있는 힘껏.
뻐엉!
잔디 밑으로 낮게 깔려 들어가는 직선 슈팅.
그 순간, 수비벽에 찰싹 붙어 있던 제퍼슨이 벼락처럼 뛰었다.
'어딜!'
제퍼슨은 파리의 경계대상 1호였다.
그를 향한 견제는 집중되어 있었고, 손짓부터 발짓까지. 모든 것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제퍼슨이 뛰자, 거짓말처럼 그를 마킹하던 수비수가 달라붙었다.
그 아주 미묘한 간격.
그 순간, 맥케니는 머리가 번쩍하고 트이는 기분이었다.
'열렸다!'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돋았다.
단단했던 수비벽.
그리고 그사이. 정확히 슈팅 궤적 사이로 열리는 공간.
제퍼슨의 움직임에 따라 흩뜨려진 그 짧은 사이로 공이 빠져나갔다. 너무나도 절묘한 궤적이다. 골키퍼의 얼굴이 다급함으로 물들고, 뒤늦게 손을 뻗지만.
가장 취약했던 부분.
왼쪽 골대 구석.
제퍼슨이 얘기했던 그 지점으로, 거짓말처럼 빨려 들어갔다.
"Yeaaaaaaaaaaaaaaa!"
"Gooooooaaaaaaaal!"
맥케니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제퍼슨을 쳐다봤다.
"나만 믿으라 했잖아. 이제 마음껏 뛰어. 널 괴롭혔던 페레이라도 없어. 뭐 또 괴롭히는 놈이 있어?"
그 말에 맥케니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누구? 쟤?"
"응."
"뭐라고 했는데?"
"여자애처럼 공 찬다고······."
"흠. 그럼 내가 저 녀석을 숙녀로 만들어 주지."
맥케니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몸이 으슬으슬하게 떨리는 느낌과, 또 왠지 믿음직한 큰형한테 고자질한 후 마음이 놓이는 그런 느낌.
물론,
나이는 맥케니가 더 많았지만.
***
"뭐지?"
투헬 감독은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페레이라가 설마 두 번째 파울까지 저지르면서 카드를 받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11대 11로 싸워도 이길까말까 한 힘겨운 싸움인데,
더구나 미드필더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홀딩형이 퇴장당했다.
이어지는 프리킥 골과, 정신없이 몰아치는 제퍼슨의 슈팅세례에 파리는 벌써 여러 번 골문을 내줬다.
[제퍼슨의 원샷 원킬입니다! 단 두 개의 슈팅으로 벌써 두 개의 득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야말로 강력한 슈팅입니다! 골키퍼,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합니다!]
[이런, 심각해 보이는데요? 도대체 슈팅이 얼마나 강해야 손목 통증을 호소할 수 있을까요?]
[오늘 파리 의료진이 정말 바빠 보입니다!]
제퍼슨이 순식간에 두 골을 몰아친 건 차라리 이해가 됐다.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미친 스트라이커인지 잘 알았으니까.
아무리 파리라고 해도 첼시의 홈구장이 아닌가. 더구나 한 명이 퇴장당한 파리니까. 제퍼슨이 미쳐 날뛰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다만.
"왜 내 선수들이 계속 고통스러워하지?"
"제퍼슨하고 몸싸움이 되지가 않습니다."
"아니, 그런 거 하고는 좀 달라."
투헬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퍼슨과 계속 경합을 펼치던 선수들이 픽픽 쓰려져 나가는 것쯤이야.
몸싸움에서 제퍼슨이 압도적인 점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쓰러지는 선수들이 문제였다.
하필이면 첼시 선수들과 거친 태클을 하던 선수들이 유독 제퍼슨하고 부딪칠 때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설마? 보복 행위?'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 보니 페레이라가 코피를 철철 흘리며 퇴장할 때 억울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저 개자식! 할리우드 액션이라고요! 저 쓰레기 자식!'
투헬은 선뜻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페레이라의 코뼈가 부러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 태클은 자신이 봐도 너무 성급했던 게 아닌가?
제퍼슨은 카드까지 받았음에도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묵묵히 뛰었다.
오히려 프로페셔널의 표본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심장을 쿡쿡 찌르는 이 묘한 불길함.
그 불길함은, 이내 곧 진실로 드러났다.
***
축구장에서 폭력은 자주 일어난다.
물론 그 폭력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느냐가 중요하다.
공을 지키고, 뺏어 내기 위한 과정 중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어쩌면 축구의 하나라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확연히 다르지만.
가끔은 사람이 좀 뻔뻔해져도 된다.
늘 도덕적이고, 성인군자가 되기엔 세상이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래서 좀 뻔뻔해질련다.
이학현일 때는 꿈에도 못 꿨다.
상대가 거칠게 대한다? 혹은 입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는다?
기껏 반격할 수 있는 게, 나도 눈을 부라리며 덤벼드는 것뿐이었다.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다르지 않나.
가령 앞에서 사사건건 거칠게 밀어붙이는 놈을 은근슬쩍 밀어 넘어뜨려 버리면.
삐빅!
"죄송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어요."
"조심해. 너 경고 한 장 갖고 있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쓰러진 놈이 황당해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것도 축군데.
하지만 파리도 악에 가득 찼다. 계속해서 내가 교묘하게 몇몇을 쓰러뜨리고도 심판이 별 다른 수를 쓰지 않자, 악에 가득 차서 흥분했다.
그러다 보니 몸싸움이 심해지고, 아예 대놓고 우리 팀 선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끄억!"
맥케니는 전반보다 기가 살아났지만,
그래도 소심한 플레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때문에 만만해 보였나 보다. 파리 선수들은 맥케니를 노렸다. 실제로 괜찮은 판단이다. 좋은 축구 지능으로 나쁘지 않은 패스를 활용해 경기를 풀어내고 있었으니까.
"질질 즙이나 짜지 말고 일어나! 여긴 여자축구가 아니야! 애송아!"
그놈이다.
파리의 수비수, 나이크 헤롤랑이라고 했나.
묘한 놈이다.
대놓고 폭언을 던지기도, 때로는 조롱하기도 한다. 심지어 여자축구를 운운하는, 때에 맞지 않는 남녀차별적인 소리를 해 댄다. 스포츠에 그딴 게 어디 있나. 그리고 가끔, 인종차별적인 제스처를 한다. 나를 보곤 가끔 눈이 찢어지는 특유의 인종차별을 하는데.
좀 어이가 없긴 하다.
내가 임마, 너보다 눈이 더 커!
아무튼, 맥케니에게 계속 폭언을 내뱉던 놈이고.
나에게 몇 번 걷어차이고도 맹렬하게 싸울 만큼 깡도 있었고, 몸도 튼튼한 놈이다.
튼튼하다라.
거기도 튼튼하려나.
경고 한 장을 받은 채 비열하게 웃으며 돌아간 놈을 바라보며,
프리킥을 차기 위해 공 앞에 섰다.
직접 득점을 노리기에 무리가 없는 위치.
사실 이쯤 되면 경기 결과는 이미 확실하다. 우리가 이겼다.
다만 이대로 나가면 이긴 게 이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찜찜하지 않나.
앞서 말했듯이, 난 좀 뻔뻔해질 생각이다.
여기서 더 어떻게 뻔뻔해지냐고?
뻐어어엉!
빠아아악!
"······."
순간 주위가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
모두 멍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코. 골문이 거기가 아니었네."
계속 여자축구 운운하는 저놈을,
얌전한 숙녀로 만들어 주는 거다.
물론, 물리적으로.
***
"······."
필마르크는 제퍼슨이 하는 일이라면 모두 지지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은퇴선언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필드 위에서 벌어진 상황에 입이 쩍 벌어졌다.
"우우우우우우!"
"쓰레기 자식!"
"개자식!"
"닥쳐! 슈팅 때렸는데 맞은 너희들의 병신 같은 수비수가 잘못이지!"
"왜 거기로 슈팅을 막아?"
글쎄.
골문하고는 다른 위치였는데.
그것도 냅다 후린 강슛이다.
골키퍼가 손목 통증을 호소할 정도로 엄청난 발목 힘인데,
그 발목 힘이 좀 안 좋은 곳으로 작렬했다.
거의 기절하듯이 눈을 까뒤집은 채 들것에 실려 나가는 나이크 헤롤랑을 보라.
물론.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해지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양 다리를 얌전히 오므렸다.
"심판! 이건 보복 행위입니다! 명백한 반칙이라고요!"
그때 파리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때서야 필마르크는 다시 표정을 바꿨다.
황당 하고, 놀란 표정에서 다시 억울함과 분노로 점철된 표정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뭔 개소리야! 제프가 공 차는데 너희 수비수가 막은 거잖아?"
"막은 거라고?"
"그래! 니네 수비수 월드클래스더라? 어떻게 사타구니로 공을 막을 생각을 다 했냐?"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보복 행위라니! 개소리하지 마! 프리킥 찼는데 그냥 너희가 안 좋게 막은 것뿐이라고!"
"심판, 이게 말이 됩니까?"
"된다고! 돼! 된다고!"
그 모습을 보며 제퍼슨은 속으로 웃었다.
아무래도 뻔뻔해지기로 한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나보다.
< 210. 파리채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