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09화 (209/258)

< 209. 파리채 (3) >

챔피언스리그를 맞이하는 선수들의 마음은 평온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첫 경기가 다름 아닌 파리 생제르맹이었으니까.

비록 늘 우승과는 연이 따르지 않은 팀이지만, 언제든 우승후보로 부각되는 강팀이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쫄려면 그쪽이 쫄아야지."

감독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처럼.

디펜딩 챔피언은 우리다. 도전자는 파리고.

그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생각이었고, 경기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챔피언스리그와 거리가 멀었던 신입생들은 달랐다.

"아니, 그거 별거 없다니까. 그냥 분위기만 막 비장하지. 정작 붙어 보면 빳빳하게 긴장해서 별거 아니야."

올리버가 뻐기며 말했다.

그의 주위로 신입생들이 몰려 있었는데, 나름 챔스 선배라고 폼 잡는다.

쯧. 기존 동료들은 올리버의 곁에 얼씬도 하지 않고 있지만, 신입생들은 달랐다.

특히 마음이 좀 심약한 웨스턴 맥케니는 챔스 얘기에 상당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미겔 오야르사발도 그렇고. 트라오레도 살짝 긴장한 표정이네. 하긴, 둘 다 챔스 경험이 없나.

"긴장할 것도 없어. 걔네들도 별거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누가 보면 결승까지 캐리한 줄.

흐음, 사실 저 신입생 중에 다음 챔스에 출전할 선수는 없다. 아마 산티만 출장할 거 같고. 파리가 강한 상대인 만큼, 감독은 기존의 주전 라인업을 사용할 것이다.

챔스 경험이 없는 친구들이라 아직은 그 분위기를 천천히 몸으로 체득해야지.

시작부터 파리 상대로 선발 출전하면?

타고난 배짱이 아니면 제대로 플레이할 수 없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고 훈련에 임했는데.

경기 전날. 일이 벌어졌다.

"장염이라니. 대체 뭘 처먹은 거야?"

카이 하베르츠가 장염을 호소했다. 우리 팀 중앙의 핵심이고, 파리의 수천만 유로의 미드필더를 이겨 낼 천재 미드필더의 결장.

그리고 그 대체자는······.

감독이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맥케니! 준비는 되어 있지?"

웨스턴 맥케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파리의 투헬 감독은 1차전에서 첼시를 꺾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었다.

직전 리그 경기를 완전히 백업 멤버로만 가동시켰다.

네이마르와 음바페를 비롯한 주전 선수들이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경기를 조율했다.

그런데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파리가 비록 챔스 우승은 늘 실패했지만, 적어도 만나는 모든 팀이 꺼려하는 강팀이다.

엄청난 오일 머니로 이룩한 선수단 구성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와도 비견해 뒤쳐지지 않는다.

현재 선수단 몸값과 주급만 봐도 파리가 첼시보다 높다.

하지만, 그런 객관적인 사실을 짚어 봐도 투헬은 구겨진 얼굴을 도저히 펼 수가 없었다.

'캉테와 하베르츠. 첼시의 포백까지. 모두 우리가 앞서거나, 비등해. 하베르츠와 캉테의 중원은 무섭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지. 하지만,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앞서거나 비등하다.

혹여 열세인 부분이 있어도, 그것이 승부를 판가름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딱 하나.

정말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제퍼슨 리!'

차마 목구멍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이름.

모두 굳이 거론하지 않지만, 모든 신경이 쏠린 한 선수.

그 이름이 적힌 포메이션을 보고 있노라니.

모든 전술계획이 뒤죽박죽되는 기분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봐도, 딱 하나 때문에 모든 게 소용이 없는 기분이었다.

참담함이 가슴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희소식이 전해졌다.

"하베르츠가 부상으로 빠진답니다."

"뭐?"

"대체 자원으로는 웨스턴 맥케니 또는 메이슨 마운트입니다."

"누가 출전할 것 같지?"

"하베르츠가 빠지면 창의적인 패스를 해줄 자원이 적습니다. 캉테가 아무리 많이 뛰어도, 그 모든 걸 커버할 수 없고요. 아마도 션 올리버가 홀딩, 캉테가 박투박. 그리고 그 빈자리에 웨스턴 맥케니가 출전할 것 같습니다만. 확신은 못해요."

"이번 시즌 영입된 선수라 그렇지?"

"네. 하지만 플레이 메이커 룰을 소화해 줄 선수는 그 친구뿐입니다. 마운트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 다소 밋밋해지겠죠."

"흐음."

머릿속에 뭔가 번쩍하는 기분이었다.

"맥케니가 출전하거나, 아니면 제퍼슨이 미드필더로 나오거나."

그간 첼시의 경기를 살펴봤다.

제퍼슨이 미드필더 포지션으로 나온 몇 경기가 있었다.

일명 제퍼슨 쉬프트라고 불리는 변칙 전술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런 전술이 가동될 수도 있다.

'차라리 그게 낫지.'

물론 미드필더로서 제퍼슨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스트라이커로서 제퍼슨을 상대할래? 미드필더로서 제퍼슨을 상대할래?'

둘 다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서라면 후자다. 스트라이커로서 폭발적인 득점력은 몸이 떨릴 정도다. 미드필더로 나오는 제퍼슨은 그래도 전술적으로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지 않나.

하지만 만일 맥케니가 나온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거친 게임으로 끌고 간다. 중원을 우리가 가져가고, 거칠게 몰아붙여서 제퍼슨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러면 그 무지막지한 공격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여지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투헬 감독은 한 선수를 불렀다.

이번 시즌 포르투에서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선수.

다닐루 페레이라. 타고난 홀딩형 미드필더로서, 투헬이 판단하건대, 이미 월드클래스 반열에 든 선수였다.

"축구에서 낭만과 아름다움은 없어. 축구란 전쟁 그 자체지. 챔피언은 그들이고, 우리는 도전자야. 도전자는 도전자다운 패기로 무장해야 해."

페레이라가 잠자코 들었다. 클롭이 하는 말은 선수에게 하는 말이지만, 본인 자신에게 되새기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승리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뭐든 다 해야만 해. 카드 따위 받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걸 무서워하지 마라. 더러운 플레이라고 누가 욕하거든, 내가 앞에서 돌을 맞겠다."

페레이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실하기도 하지만, 경기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는 파이터형이기도 했다.

그런 투헬의 지시는, 그에게 썩 반가운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죠, 감독님."

물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

[웨스턴 맥케니! 다닐루 페레이라의 거친 태클에 고통을 호소합니다!]

[위험한 태클이었습니다. 심판 카드를 꺼내네요. 카드 색깔이 중요합니다. 이런, 옐로카드군요!]

[첼시 선수단 모두 심판에게 뛰어가 항의합니다! 레드카드를 꺼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죠?]

[물론 판단은 심판이 하는 것이지만, 글쎄요. 많은 논란을 낳을 판단이군요. 맥케니, 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개자식들."

풀리시치는 절뚝이는 맥케니를 바라보며 눈을 치켜떴다.

수줍음이 많은 맥케니와 가장 친한 동료가 바로 풀리시치였다.

같은 미국 국적이기도 했고, 풀리시치는 맥케니를 국가대표팀에서도 꽤 말이 잘 통하는 친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맥케니는 계속 뛸 수 있다는 표시를 했다. 하지만 정말 위험했다. 자칫했으면 발목이 완전 꺾였으리라. 그랬다면 시즌 아웃은 물론이고, 월드컵도 포기했어야 했다.

다시 경기장에 들어선 맥케니는 살짝 기죽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잔부상으로 선발보단 병원을 더 자주 갔던 게 바로 맥케니였다. 이번 시즌 제대로 해 보겠다고, 열심히 해 보겠다고, 제퍼슨한테 운동을 배우면서까지 뛰고 있는데.

그것도 첫 선발 출전한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크게 다칠 뻔했으니.

아무리 배짱 두둑한 선수여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제기랄."

풀리시치는 맥케니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제퍼슨이 맥케니에게 다가가 뭐라고 얘기하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가 산티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조심히 다가간 풀리시치는, 왠지 모르게 차가운 듯한 제퍼슨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이 싸늘해졌다.

"산티. 나 없이 챔피언스리그 남은 경기에서 골 넣을 수 있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마도 다음 챔스 경기는 출장정지가 될 것 같아서."

"뭐?"

"아니, 그럴 거야."

제퍼슨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

거친 태클과 수비.

그것이 파리 생제르맹이 가져온 판단이다.

그 판단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축구에서는 승리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져야 하는 법이다.

필마르크 감독은 노심초사하면서 필드를 바라봤다.

웨스턴 맥케니.

높은 활동량, 번뜩이는 센스, 꽤 괜찮은 테크닉. 가진 재능만 보면 차후 리그 최고 중 하나가 될 법한 실력.

그러나 늘 잔부상을 달고 뛰었기 때문인지, 성격 자체가 온순하다 못해 수줍음이 많고 겁이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위험한 태클 이후, 눈에 띄게 기가 죽은 플레이.

공을 돌리기에 급급했다. 누군가 압박해 오면 놀라서 몸이 굳어 버리는 게 보일 정도다.

'교체를 해야 하나.'

전반전부터 이른 교체.

만일 지금 교체한다면, 맥케니는 잔뜩 실망할지도 모른다. 챔피언스리그 첫 출전, 자신이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했다고 자책할지도 모르지. 다들 강인하고, 투지 넘치고, 또는 제멋대로인 괴상한 선수들만 지도해 온 필마르크에게 있어 너무나 온순한 선수였기에, 그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Yeaaaaaaaaaaa!"

"Ruuuuuun!"

그때 경기장이 일순 뜨거워졌다.

전반적으로 전진해서 파리를 향한 공세를 펼치던 첼시.

후방에 센터백만 내버려두고 전진했던 첼시는, 순간적으로 기회를 차지했다.

기죽은 맥케니 대신 투지를 뽐내고 있는 올리버가 거칠게 빼앗은 공이 캉테에게로. 캉테가 아름다운 긴 스루패스를 측면으로 보냈다.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선수는 다름 아닌 제퍼슨 리.

뻐엉!

제퍼슨은 앞을 가로막는 수비형 미드필더 페레이라를 바라보면서 거침없이 전진했다.

그때, 필마르크는 무언가 봤다.

제퍼슨의 입이 달싹이는 걸.

'뭐지?'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다. 그거 독심술을 익힌 것도, 독순술을 아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뭔가, 그 분위기 있지 않나.

그 느낌.

무언가 욕 같은 느낌말이다.

하물며 정면에 있던 다닐루 페레이라가 순간 눈이 뒤집혀 미친 듯이 내달리는데.

"죽여 버리겠어!"

그 말은 똑똑히 들렸다.

페레이라가 그렇게 외치는 소리는 아주 크게 들렸다.

페레이라는 망설임 없이 위험한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제퍼슨은 그때 공을 살짝 띄워 중앙에서 측면으로 쇄도하는 산티아고에게 보냈고, 곧바로 넘어졌다.

그 순간 경기장 곳곳에서 경악성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제퍼슨이 거친 태클에 쓰러지는 장면이었으니까.

심지어 그 이후 들리는 '빡!'하는 소리와 제퍼슨의 고통스러운 비명까지.

빠악!

물론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제퍼슨의 입에서만 튀어나온 건 아니다.

같이 나뒹군 페레이라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기는 스탬포드 브리지.

당연히 온갖 야유가 파리를 향해 쏟아졌다.

"Wuuuuuuuuuuuuuu!"

한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필마르크 감독은 정말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자신의 선수가 위험한 태클에 쓰러졌음에도.

그것이 팀의 가장 중요한 핵심 선수가 쓰러졌단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목젖까지 치밀었다.

'미친놈!'

태클이 작렬하는 순간, 제퍼슨은 특유의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몸을 먼저 띄웠고,

넘어지는 '척'하면서 무릎으로 페레이라의 코뼈를 찍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저건.

"미국인 아니랄까 봐. 할리우드 하나만큼은 죽이는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양 팀의 선수들이 모두 한곳으로 달려들고, 주심이 잠시 당황하는 가운데.

필마르크는 웃음을 참고, 빠르게 표정을 바꿨다. 누구보다도 험악한 표정으로 바꾼 채 뛰어나갔다.

"헤이 심판! 파리 이 개자식들아! 이 쓰레기 자식들아! 내 선수를 죽일 셈이냐! 이 축구의 암 덩어리같은 놈들!"

내로남불이라지만,

이게 축구판 아니겠나.

< 209. 파리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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