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파리채 (1) >
아시아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한국에서 올스타전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일본에서도 2박 3일간의 투어를 마친 뒤, 시즌 첫 경기를 준비했다.
다음 경기는 UEFA 슈퍼컵이다.
챔피언스리그 우승팀과 유로파리그 우승팀을 가리는 UEFA 슈퍼컵을 시작으로, 커뮤니티 쉴드를 진행한다.
굳이 따지면, 두 대회 모두 권위 있는 대회는 아니다.
라인업만 보면 챔스와 유로파 우승팀이 붙고, 리그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긴 하지만. 글쎄. 둘 다 이벤트성이 짙은 경기라서.
친선경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더구나 우리는 작년에 두 대회에서 다 승리를 거두지 않았나.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두 대회를 포기한 건 아니다.
다만 힘을 빡 주지는 않았을 뿐이고.
새로운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경기인 만큼, 팬들도 기대 어린 시선으로 경기장을 찾아왔다.
UEFA 슈퍼컵, 상대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였다.
"우리가 유로파 우승팀일 땐, 슈퍼컵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을 꺾었지. 라이프치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건 걔들이 모르는 이야기야. 우리는 사실 그때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할 만한 팀이었거든? 자. 도전자를 위해 유럽 챔피언의 품격을 보여 줘라!"
첼시에 온 이후 모든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본 필마르크 감독.
그는 현재 첼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선수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언론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음!
카리스마?
솔직히 말해 몇 년 같이 지내 본 그는 카리스마라는 게 느껴지지 않지만,
신입생들은 다른가 보다.
대부분 긴장 어린 눈빛으로 연설하는 감독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외부에서 봤을 때 트레블이란 업적이 대단하지.
그 퍼거슨 이후로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처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감독이 좀 다르게 보이기도······.
"도전자의 도전을 뿌리쳐야지!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가장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야 해. 제프, 우트, 산티. 쓰리톱이다."
에휴.
저럴 줄 알았다니까.
***
[첼시의 새로운 공격수, 산티아고 차베즈가 전반 11분 만에 라이프치히의 골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기뻐하는 첼시 선수들! 제퍼슨 리의 예술적인 스루패스를 산티아고가 침착하게 득점에 성공합니다!]
[슈퍼컵에서 1대 0으로 앞서나가는 첼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우트가 제퍼슨에게 무언가 소리치는데요?]
[표정을 보면 약간 섭섭해 하는 얼굴인데요. 아하, 그 상황에서 우트에게도 공간이 열려 있었습니다만, 산티아고가 더 확실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트가 살짝 섭섭해 하는 것 같죠?]
[제퍼슨이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음, 뭔가 보여 주려고 하나 본데요?]
***
경기가 시작하고, 라이프치히 감독이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라이프치히라는 돌풍의 팀을 이끌며, 리그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을 위협하는 팀으로 성장시킨 감독이 바로 지금의 감독이다.
젊고, 감각적이며 유능한 감독.
유로파 우승을 차지하고, 다음 시즌은 챔피언스리그와 분데스리가 우승컵을 노리겠다고 자신만만할 정도로 야심이 가득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엔 떠오른 건 지독한 공포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세 명의 스트라이커를 라인업에 넣는다?
일견 보기엔 공격력이 강해지겠지.
하지만 중원은 약화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세 명의 미드필더가 있어도, 양쪽 측면이 빈다. 측면을 커버하기 위해 미드필더의 활동범위는 넓어진다. 자연히 중앙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중원에서부터 볼 배급이 안 된다면, 센터포워드 세 명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한데 이 어처구니없는 전술이.
"통한다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라이프치히가 유로파 우승을 차지할 수 있던 원동력.
최전방에서부터 중원, 수비진까지 이어지는 진득한 압박.
하드워커에 가까운 미친 듯한 활동량.
이 압박 속에서 미드필더의 조력을 못 받는 세 명의 센터포워드. 상성으로 봐도 이쪽이 유리한 게 많다.
하지만 결과는 스코어로 말해 주고 있었다.
가망 없는 기회를 완벽한 찬스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치명적인 공격수.
공이 오지 않으면 스스로 움직여 기회를 창출해 내는 스트라이커.
정말 우습게도,
라이프치히 감독은 자신이 배우고, 익혀 온 모든 전술적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저 스트라이커,
제퍼슨 리로부터.
[제퍼슨 리! 또 한 번 공을 탈취하고, 측면으로 내달립니다! 그의 드리블은 정말 부드러우면서도 다이내믹하군요!]
[수비진이 우왕좌왕합니다! Oh! 환상적인 스루패스가 수비진 사이를 갈라 버리고! 맙소사! 우트가 나타나 골을 가볍게 밀어 넣습니다! 골! 골골!]
[골은 우트가 넣었습니다만, 하. 이런. 솔직히 제퍼슨 밖에 안보이네요 맞아요. 이건 제퍼슨이 만들어 준 겁니다. 첫 번째 산티아고의 선제골, 그리고 우트의 추가골까지. 제퍼슨의 사랑스러운 움직임이 라이프치히의 골칫거리로 떠올랐습니다!]
혼자 공을 2선에서 탈취해 측면으로 힘껏 내달린 뒤.
그를 가로막는 서너 명의 수비수를 특별한 발재간이 아닌, 오직 힘과 스피드로 떨쳐 내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여 주더니.
이제는 수비의 균열 사이를 가로지르는 환상적인 패스로 라이프치히를 농락했다.
그 순간, 라이프치히 감독인 느낀 감정은, 공포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생각해. 내가 여기서 뭘 해야 막을 수 있지?'
짧은 자문과.
이어지는 스스로에 대한 답.
"시발! 저걸 막을 수 있다면, 내가 라이프치히가 아니라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하고 있겠지!"
***
산티아고는 가슴 속에 묘한 설렘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즐겁다!'
자신이 축구를 시작했을 때.
거의 백인 일색인 미네소타의 고등학교에 갔을 때.
우연찮게 봤던 그때의 고등학생들의 축구 경기.
거기서 제퍼슨은 찬란하게 빛났고, 압도적이었으며 관중들의 마음을 훔쳤다.
산티아고도 그랬다.
제퍼슨을 그날 보고, 그가 뛰고 있는 고등학교 축구팀에 들어갔으며, 그를 따라 토론토까지 같이 갔다.
유럽으로 오면서 그는 스페인어권인 마드리드로 갔으나,
이내 그를 불렀던 시메오네가 떠나고 마음이 붕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첼시에서 온 러브콜.
그 러브콜이 온 순간, 산티아고는 에이전트의 협상과는 상관없이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제퍼슨과 같이 뛸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말이다.
또 한 번.
후욱!
"이번엔 산티야!"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미친놈! 게임 전체를 컨트롤하는 것처럼 굴고 있어!'
제퍼슨은 이걸 마치 게임처럼 생각했다.
우트에게 한 골 줬으니까, 이번에는 산티에게 주겠다는 저 말.
그리고 우습게도,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산티는 그 말이 허황된 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공을 따라 움직였다. 단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의 발끝에 거짓말처럼 도달하는 공.
맞다.
'이번엔 내 골이지.'
그는 침착하게 그의 발끝으로 도달한 공을 단 한 번의 터치로 밀어 넣었다.
첼시 데뷔전에서 멀티골.
"Yeaaaaaaaaaaaaaaaaaaa!"
"유럽 챔피언이다!"
"산티아고! 챔피언을 위해 마드리드를 떠난 걸 축하해!"
산티아고는 타고난 스트라이커였다.
만일 제퍼슨이 없다면 미국의 영웅은 그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도 '축구가 쉽다'같은 거만한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렇게 쉽나?'
상대가 강한 팀이 아니라서?
아니.
축구는 그런 게 아니다. 강팀과 약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나눌 수가 없다.
한데도 지금 쉽다고 느껴지는 건, 오로지 제퍼슨 덕택이다.
홀로 수비진을 모조리 찢어 버린 뒤에.
라이프치히를 말 그대로 붕괴시킨 뒤에 내주는 패스.
특별히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넣으면 된다.
어찌 보면 어려워질 수도 있는 이 경기를, 제퍼슨이 정말 너무 쉽게 만들고 있었다.
"제기랄! 제프! 다음은 나 줘!"
"시끄러워! 애도 아니고 찡찡대지 마!"
"아니, 나랑 너랑 1년을 같이 뛰었는데."
"우트, 여기서 질투하면 되게 뭔가 징그러운 거 알아?"
물론, 아직은 이 괴상한 팀이 어떻게 트레블까지 했는지 좀 의아스럽긴 했지만.
***
때론 패기와 객기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경기 전에, 라이프치히 감독은 유로파 우승팀이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을 꺾는 장면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패기와 객기.
이걸 나누는 건, 오로지 결과다.
라이프치히가 그만한 결과를 냈으면, 멋진 패기라고 칭송받았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이번엔 객기를 부린 거다.
"The Blues!"
점유율은 비교적 라이프치히가 많이 가져갔다.
그렇다 한들.
이건 의미가 없다.
축구는 스코어로 결과를 내니까.
스코어는 간단하다.
득점하는 것.
3대 0, 후반전 들어서서 라이프치히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반격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막혔다.
우리는 4-4-2로 전환했다.
트라오레가 우트 대신 투입되고, 나와 산티아고가 투톱을 선다. 우트가 다소 불만스런 기색을 내비쳤으나, 경쟁은 어쩔 수 없다.
라이프치히는 빠르고 역동적인 축구를 추구한다.
클롭의 리버풀처럼 말이다.
어쩌면 현대 축구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아닐까 싶다.
후반전 변화를 꾀한 라이프치히는 역습을 시도했고.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우리 중원이 벗겨졌다.
"Ohhhhhhh!"
하지만 역습이 늘 통하는 건 아니다.
하물며 우리의 수비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의 수비다.
시셀도가 감각적인 태클로 공을 빼내는 것에 성공했고,
우리는 그 즉시 재역습을 시도했다.
"Wuuuuuuuuuuuuua!"
역습에 이은 역습.
순간적으로 템포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관중들의 함성이 고조됐다.
중앙의 산티아고가 대놓고 수비수들의 시선을 끌고 비집고 들어가고,
오른쪽으로 트라오레의 무시무시한 스피드가 터져 나왔다.
트라오레는 단숨에 측면을 찢어발겼고, 그에게 도달한 패스를 가뿐하게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막아! 제발 막아!"
골키퍼의 외침이 왠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음.
크로스는 좀 아쉽네. 속도가 엄청 실려서 그런지 정확도가 아쉽다.
일단은 뛰어올랐다.
하지만 헤더 슈팅으로 연결시키기에는 거리가 있고, 공의 회전도 좋지 못한 상황.
껑충 뛰어 올라 이마로 툭!
"Big and small!"
산티가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우리가 맨 처음 축구했을 때, 가장 먼저 맞춰 봤던 그 호흡. 산티는 내가 떨어뜨려 주는 공을 거침없이 발리로 때렸다.
뻐억!
하지만 끝까지 집중해 있던 골키퍼의 아슬아슬한 슈퍼세이브.
라이프치히의 관중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지만.
공에 대한 집중력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잃지 않아야 한다.
아직 공은 나가지 않았다.
골키퍼의 손을 맞고 튕겨져 나오는 공.
나는 그 순간 위에서 땅으로 착지하고 있던 도중이었고,
튕겨 나오는 공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몸을 비틀어 내며 반동을 줘야 한다. 그리고 착지하면서 조금은 불안정하지만 확실하게 발등으로 튕겨 나온 공을 정확히 맞혔다.
'정확히' 말이다.
내가 이렇게 표현할 정도면,
확실하다.
뻐어엉!
"Blues!"
"Goaaaaaaaal!"
그래도 이번 시즌 첫 경기에서, 골은 넣어야 하지 않겠어?
스코어 4대 0.
우리는 라이프치히를 완전히 박살 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을 꺾겠다고 했던 그 패기로 뭉친 인터뷰는,
그저 객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
***
[유로파 슈퍼컵, 첼시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다.]
[첼시 감독, '산티아고의 화려한 데뷔전 축하한다.']
[팀 역사상 최초 슈퍼컵 2연속 우승팀! 첼시 감독, '3연속 우승팀이고 싶다.'며 챔피언스리그 우승포부 밝혀]
[라이프치히 감독, '첼시의 승리를 축하한다. 제퍼슨은 통제할 수 없었다. 어째서 첼시가 트레블 했는지, 오늘 제퍼슨을 상대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많은 선수의 이적과 영입에도 불구, 첼시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
[전 세계 도박사들 우승 배팅, 첼시 챔피언스리그 강력 우승 후보 중 하나!]
[제퍼슨 리, '요즘 어깨운동을 하고 있다. 들어 올릴 트로피가 너무 많으니까.']
< 207. 파리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