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06화 (206/258)

< 206. 베테랑의 퇴장 (3) >

전반전은 내가 두 골, 산티가 한 골로 총 세 골을 넣었고, 올스타팀에서 추격골을 넣어 3대 1이 되었다.

후반전 들어서서 분위기가 다시 뜨거워졌다.

"Ohhh, Oh! Oh! Oh!"

어느새 분위기는 올스타를 응원하는 분위기로 확 바뀌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축구팬의 최우선은 국가대표다.

월드컵 시즌만 되면 나라 전체가 들썩인다.

그 순간만큼의 열기는, 유럽의 어느 곳보다 뜨겁다. 하지만 그에 반해 리그는 찬밥 취급받는 게 현실이다. 물론 이건 상대적인 거다. 월드컵과 비교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여기에 모인 대다수 관중은, 올스타팀에 속한 선수의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이름만 들어보고 실제 플레이를 제대로 본 적 없거나.

그런 대다수의 관중은 첼시, 그중에서도 나를 보려고 왔지, 올스타에 많은 관심을 가지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예상외의 경기 내용에 관중들은 점점 올스타를 응원했다.

"어우! 애들 너무 거친데?"

"진짜 리그 경기 같아."

내 동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올스타는 열심히 뛰었다.

맹렬하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뛰어!"

"거기 막아! 길 내주지 마!"

"못 막겠으면 몸으로라도 막아!"

치열하다.

올스타의 심정이 그럴 거다.

여기서 처참하게 패배한다면, 그건 이들에게 치욕이 되고. 여길 찾아온 관중들에게 케이리그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고 광고하는 꼴이 된다.

올스타란 이벤트 매치와는 달리, 그들은 스스로 리그의 대표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격차는 분명하다.

하지만 축구에서 늘 격차대로 흘러가면, 우승팀은 정해져 있고 꼴찌 팀도 정해져 있지 않겠나.

"제프!"

"맥케니! 패스를 줄 거면 반박자 빠르게 하라고!"

"거기 왼쪽 비었잖아?"

"내가 뛰면 네가 오른쪽으로 뛰어야지!"

우리 팀도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백업과 로테이션 멤버. 계속되는 선수 교체. 감독의 전술 시험까지.

덕분에 올스타와 치열한 경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제프, 쉴 생각 없어?"

"감독님. 오늘은 90분 다 뛸게요."

"끙! 네가 그런다면야. 우트를 투입해야겠는데."

"산티를 빼세요."

"아냐. 산티 플레이도 오늘 제대로 봐야지. 하나 실험할 거 있어."

감독의 선택은,

웨스턴 맥케니를 빼고 마크 우트 투입이었다.

제기랄.

"흐흐. 이 쓰리톱은, 지금 유럽 최고의 쓰리톱 중 하나일지도 몰라."

또 그 병적인 스트라이커 사랑이 발현됐다.

뭐, 뛰라면 뛰어야지.

현재 스코어 3대 1.

"우트!"

아직은 사이가 서로 어색한 산티와 우트.

산티는 우트를 부르며 패스를 쭉 찔러줬다.

우트는 빠르게 깔려 오는 공을 가볍게 트래핑했다.

사실 솔직히 말해 지금 폼으로썬 산티가 우트보다 위다.

하나 우트는 여기서 다른 선수들하고 호흡을 맞춰 왔단 장점이 있다.

교체 투입된 하베르츠가 뛰었고, 우트는 서로 말을 하지도, 신호도 주지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백패스를 내줬다.

하베르츠는 그 패스를 받고 다시 한번 우트에게 찔러주고.

우트가 급히 방향 전환하며 매서운 움직임으로 박스를 파고든다.

상대 수비수, 강두석이 빠르게 태클을 시도하지만.

투욱!

"우와아아아아악!"

"산티아고!"

이번 올스타 팀에서 가장 약한 수비 부분.

오른쪽 페널티 박스 부근.

전반전 내내 트라오레에게 시달려 헐거워진 그 공간에, 산티아고가 파고들어 갔다.

"뛰어!"

도대체 누구한테 소리치는 건지.

뭐, 그런 건 상관없다. 우트가 박스 안을 휘젓고, 공간이 생겼다. 이거다.

어쨌거나 스트라이커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편해졌다.

나에게만 집중되던 그 끈질긴 견제와 압박이 완화되니까.

우트의 맹렬한 움직임으로 이뤄진 수비의 균열.

산티아고는 오른쪽 박스 부근에서 들이닥치며 패스를 시도했다.

상대 수비는 허둥지둥했다.

그럴 수밖에.

박스엔 나와 우트 둘이 있었고, 둘 다 패스를 받기엔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산티의 선택은, 여기서 가장 친한 나였다.

투욱!

공중을 향해 살짝 띄워 준 볼.

수비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말 그대로 뛰어올랐다. 아니, 날았다.

철-썩!

이마에 정확히 맞는 헤더.

팀의 네 번째 골이 들어갔다.

그리고.

어, 내 해트트릭인가?

"Yeaaaaaaaaaaaaaaaaa!"

"우와아아아아!"

어우.

귀가 먹먹하다.

여기가 런던이야, 서울이야?

***

경기는 끝났다.

그리고 올스타팀에 대한 관중들의 평가를 예상하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이 정도?

적절한 평가이리라.

4대 1로 우리가 앞서던 도중, 올스타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만회골을 하나 더 터뜨리면서 경기는 4대 2로 끝났다.

유럽 챔피언을 상대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경기장을 찾아 주신 관중 여러분. 경기 종료 후 대한민국 국가대표 수비수, 케이리그의 리빙 레전드 강두석 선수의 은퇴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관중 여러분께서는 강두석 선수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우렁찬 박수로 배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기 종료.

터널로 향하던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터널을 통해 이번 행사 스태프들이 뛰어나오고, 구석에서는 은퇴식을 기념하기 위한 작은 단상을 부랴부랴 준비하고 있었다.

흐음.

두석이 형은 나랑 딱 반 시즌 정도 같이 뛴 선수다.

내가 유럽무대에서 부상하고, 철저하게 실패한 채 케이리그에 잠깐 왔을 때.

국가대표와 상비군을 오가던 그는, 케이리그를 벗어나 유럽에 한 번도 못 가 본 선수였다.

그래서 어렸던 나는 그를 오히려 무시했던 적도 있지만.

그는 친절하게 날 대해 줬다.

수비수치곤 피지컬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케이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수년간 뽑혔었는데, 그건 영리한 수비가 있어 가능했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간단히 말하면, 악과 깡이다.

부족한 피지컬에도, 기죽지 않고 상대 선수와 싸우는 방법.

비겁해 보이더라도, 손짓으로, 때론 거칠게 상대를 이겨 내는 방법.

거칠고 덩치 큰 선수들을 상대로 심리전에서 이겨 내는 방법.

어쩌면 내 플레이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외적인 부분을, 저 사람한테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말이다.

마음 같아선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내가 갑자기 말을 걸면 오히려 어이없어하겠지.

쩝.

그래도.

은퇴식은 곁에서 봐 줘야 하지 않겠나.

저번 생에서는 보지 못했다.

케이리그에서 잠깐 뛰었다가, 곧바로 일본으로 이적했으니까.

"감독님."

"엉?"

"라커룸에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요."

"으응?"

감독의 의아한 시선에, 나는 대답 없이 손을 뻗어 한곳을 가리켰다.

라커룸으로 들어가지 않고 필드에서 기다리고 있는 올스타 선수들.

그리고 설치되고 있는 작은 단상.

"아아. 은퇴식?"

대답이 돌아온 건 감독이 아니라 막 터널로 들어가려던 아스피였다.

아스피는 잠시 많은 생각이 잠긴 눈빛으로 단상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감독은 나와 아스피를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날 뭐로 보는 거야? 어? 평생을 필드에서 뛴 베테랑을 보내 주는 상황인데. 너희들 당장 뛰어가서 축하해 주지 못하겠어?"

끙.

이럴 땐 화끈해서 좋단 말이야.

감독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우리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쳐다보는 올스타 선수들.

아스피가 버럭 소리쳤다.

"당장 튀어나와! 이것들아!"

"끙. 갑자기 캡틴이 왜 저래?"

"조용하다가도 뜬금없이 소리를 지른다니까."

다들 입으로는 불만을 주절거렸지만, 이내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망설임 없이 다 밖으로 나왔다.

얼떨떨해하는 올스타 선수들의 표정.

난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서로 마주 보면서 설까요?"

***

터널은 고요했다.

터널 밖은 관중들의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터널 밖으로 나가는 이 순간은, 오로지 그의 발걸음 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은퇴식을 위해, 그의 출장 경기 수 503번이 마킹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가는 길.

이 터널을 나가며 강두석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500경기. 진짜 많이 뛰었네."

거의 매 시즌 전 경기를 뛰었다.

몇 번 부상으로 반년 정도 날린 걸 제외하면, 입대해서 상무 시절까지. 그는 케이리그에서만 뛰어온 베테랑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케이리그의 리빙 레전드.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말했다.

유럽 진출은커녕, 케이리그에서만 평생 뛴 그저 그런 수비수,

또는 그들만의 레전드.

상반된 평가를 들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두석은 그 모든 평가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나는 즐길 만큼 뛰었나?"

스스로 자문해 보지만,

그에 대한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즐기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뛰었겠나.

하나 그는 아직도 가슴 속에 한줄기 미련이 남는 걸 느꼈다.

유럽 진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놓쳤다. 에이전트의 잘못된 협상, 실수, 그리고 부적합했던 시기.

여러 요소가 맞물려서 실패했다.

중국의 거액 오퍼? 일본에서 오퍼?

아주 많았다. 하지만 팀을 지키겠다고 남았다. 어디선가에서는 그를 멋진 의리 있는 선수로 포장했고, 그 단순한 칭찬에 그저 속으로 웃었던 적도 있다.

한데 오늘 가슴속에 남아 있던, 다 떨쳐 냈다고 생각했던 미련이 살아있음을 다시 느꼈다.

유럽 챔피언 첼시.

그저 이벤트 매치니까 설렁설렁 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전반전 내내 그들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프리시즌이라 발이 안 맞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들의 기량과 정신 상태는 의심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맞붙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럽이란 무대, 가 봤으면 좋았겠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이다.

그것도 이제 은퇴식을 위해 터널 밖으로 나가는 가운데서, 그런 미련을 느끼다니.

강두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다 털어 내고 은퇴해야 하건만.

그의 신체도 모두 무너지고, 전반전도 뛰기 힘들어졌건만.

축구선수에게 미련은 그렇게 남아 끝까지 사람을 괴롭혔다.

그 미련이 대답을 망설이게 했다.

"강두석 선수, 지금 터널 밖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어두운 경기장.

밝게 켜진 눈부신 조명 불빛이 터널 입구로 새어 들어왔다. 터널 입구에서 한참 망설이고 있던 그를 무의식에서 벗어나게 했던 건, 경기장 스태프였다.

강두석은 그제야 입술을 한번 깨물고, 어두운 터널 밖으로 나갔다.

<여러분! 대한민국의 영원한 레전드, 강두석 선수입니다!>

터널 밖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장내 아나운서의 사우팅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동시에.

짝짝짝짝짝짝짝!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관중석 전체가 일어나 쏟아 내는 기립박수.

경기는 끝났음에도, 아직 나가지 않고 손뼉을 쳐 주는 그 모습에 강두석은 울컥 무언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형님! 우리 팀 코치로 오십쇼!"

"P급 자격증 따고 우리 팀 차기 감독 맡으셔야죠."

"아니지. 형님 사람들 잘 웃기니까 안 선배처럼 예능 좀 나가 보세요!"

오른쪽에선 올스타 선수들이 손뼉을 치며 반겨 주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에선.

"어?"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다 젖은 유니폼 그대로 쭉 한 줄로 나열해서 손뼉 쳐 주는 첼시 선수단.

그 모습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강두석은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한쪽은 케이리그 최고 선수들.

한쪽은 유럽 챔피언들.

그 사이로 걸어가며 강두석은 이 상황이 순간 믿기지 않았다.

'허 참.'

터널로 나오며 했던 생각.

유럽 챔피언 첼시를 보고, 자신도 유럽에 진출했으면 어떨까 했던 한 줄기 미련.

한데 그 선수들이 자신의 은퇴식을 축하해 주고 있다.

아무런 연고도, 접점도 없건만.

그저 늙은 축구선수의 은퇴식이란 사실에, 라커룸에 가서 샤워도 하지 않고 여기서 한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이다.

'챔피언의 박수를 다 받아 보네.'

그 끝.

마지막 단상 앞에 가까워졌을 때.

불쑥 누군가 물었다.

"은퇴를 앞둔 기분이 어때요? 즐거우셨나요?"

갑작스러운 낯선 목소리에 강두석은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씁쓸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선수.

오늘 경기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막지 못했던, 현재 세계 최고 선수 중 하나.

그를 보며 강두석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한국어를 잘한다고 하더니, 이건 뭐 거의 현지인 수준이다.

"글쎄요. 지금 기분은 잘 모르겠네요. 설마 첼시 선수단이 이렇게 나와서 손뼉 쳐 줄 줄은······."

말끝이 흐리다가 강두석은 문득 다시 제퍼슨을 바라봤다.

"축구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죠?"

제퍼슨은 순간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몇 년 되지 않았죠."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유럽 챔피언에, 벌써 세계 최고라니. 발롱도르도 거의 확정이라던데."

"운이 좋았던 거죠."

"앞으로 최소 15년은 필드에서 뛸 것 같은데, 매 순간이 즐겁지는 않을 거예요."

강두석의 대답에 제퍼슨이 멋쩍게 웃었다.

그 웃음을 강두석은 자신이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말까지는 마쳤다.

"하지만 필드에서 공을 찰 때만큼은 늘 좋았습니다. 아까 저한테 물으셨죠? 즐거우셨냐고."

터널로 나오면서 자문했다.

과연 나는 즐거웠는가?

강두석은 제퍼슨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젠 마음 한편에 남긴 미련이 사라졌다.

명쾌하게 답할 수 있다.

"예. 나는 즐거웠습니다."

가장 즐거웠노라고.

< 206. 베테랑의 퇴장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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