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204화 (204/258)

< 204. 베테랑의 퇴장 (1) >

해외 빅클럽의 내한이 꼭 한국 축구팬들에게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 유벤투스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축구팬들이 아닌가.

하물며 첼시의 친선 상대로 지목된 상대는 케이리그 올스타였다.

이에 대한 반응은 꽤 엇갈렸다.

"야, 올스타는 K리그 팬들의 축제가 돼야지."

"관심도 없는 해외 팀 친선 일정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K리그가 해외축구 팬들을 흡수할 수 있는 계기잖아."

"지랄. 저번 유벤투스 때처럼 들러리나 서겠지."

첫째는 케이리그 팬들의 불만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불만이다.

올스타는 케이리그 팬들의 축제나 다름없는 행사다.

오로지 케이리그를 즐겨 온 팬들을 위한 축제가 되어야 한다.

"해외 빅클럽이 방한에서 좋은 꼴 본 적 몇 번이나 있냐."

"으음. 그렇긴 해."

"그나마 올스타니까 시즌 도중에 할 수도 있지. 올스타랑 친선전이 아니라 다른 케이리그 클럽이랑 친선전 펼친다고 해 봐. 리그 일정까지 바꾼다고 부랴부랴 움직일걸?"

"쯧."

케이리그 팬 중에는 해외축구도 즐겨 보는 축구팬도 있지만, 대부분은 응원팀만 서포트하는 경향이 짙다.

아무리 유명한 빅클럽의 방한이라고 해도, 달갑게 여길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일정 조정 같은 거 요청하지 않았다면서?"

"올스타 일정에 최대한 맞춰서 온다고 하던데?"

"흐음. 그건 마음에 드네."

"어? 이미 한국 왔다는데? 뉴스 봐봐?"

"응? 3일 후에 경기잖아?"

"벌써 왔다고?"

그러나 이내 그들은 날선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이벤트 경기 당일에, 그것도 경기 시작 시간보다 늦게 상암에 도착했던 이전의 유벤투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첼시의 한국 첫 행보는 일찍 시작되고 있었다.

***

이번 아시아 투어는 내 입김이 꽤 많이 들어갔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일정보다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을 늘리자고 은근슬쩍 얘기했다.

뭐, 당연한 거 아니었나.

회귀 전 40년 가까이를 한국에서 살았는데.

실제로 한국에서 내 인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첼시 보드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장 규모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일정을 더 늘리고 싶은 것이 보드진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좀 더 오래있자고 주장한 결과. 거기에 겸사겸사 재계약 갖고 약간의 딜을 행한 결과.

이렇게 됐다.

"까르르르!"

"끄응!"

"나도! 나도!"

"노! 이건 골대로 가야 해! 이쪽 골대가 아니라, 저쪽 골대로!"

장시간 비행이라는 매우 피곤한 일정.

낯선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들은 확실히 프로페셔널했다.

첫 일정은 한 후원사에서 주최하는 '축구 꿈나무'들과 함께하는 일정이었다.

불우한 가정환경, 약간의 장애가 있는 어린 친구들. 하지만 축구선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이 친구들을 만나 축구지도를 해 주는 일정이었다.

물론, 구단 입장에서 보면 돈이 되는 스케줄은 아니다.

그래도 클럽 이미지에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더구나 한국은 이전 유벤투스의 내한 때 벌어진 해프닝으로 인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지 않나.

나 역시도 그랬고.

"오케이, 친구들. 너희 축구선수가 꿈인 친구들 맞지? 그러면 공은 골대에 넣어야 한단다."

"애들 그냥 놀러온 거 같은데?"

"이 친구는 전투기 조종사가 꿈이래."

"원래 애들 꿈은 늘 바뀌는 법이지."

아스피는 허허 웃으면서 애들하고 잘 놀아 줬다.

막상 해 보니 그냥 어린 애들 놀아 주는 기분이다.

올리버가 6살쯤 될 법한 아이와 공을 주고받다가 말했다.

"제프, 그거 알아?"

"뭐?"

"어린애들은 본능적으로 잘생기고, 이쁜 걸 알아본대. 지금 애들 나한테 몰려드는 거 보이지?"

"한 명?"

"······방금까지 세 명이었어."

글쎄.

애들은 캉테 곁에 많이 있는데.

흐음. 그러고 보니 내 곁에는 애들이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애들에게 인기가 없나 싶었지만, 트라오레도 쓸쓸하게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알겠다.

"너 같으면 키가 190cm이 넘는 험악한 근육 괴물에게 가고 싶겠어?"

음.

올리버는 애기 한두 명과 패스하면서 의기양양해했다.

쯧.

유치하게.

고작 애들 인기 하나 갖고 저렇게 으스대나.

물론 그럴 만했다. 중국에서부터,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까지. 올리버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압도적인 팬들이 나에게 몰려들었고, 나머지는 캉테에게 몰려들었다.

아시아에서의 본인 인지도를 체감한 올리버는, 지금이라도 이긴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 거다. 인기와 허영심 하나에 목메던 친구였으니까.

뭐.

맞춰 주고 싶긴 한데,

"으흐흐! 제프, 애들은 말이야. 너처럼 근육만 많은 괴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날렵하고 잘생긴 친구를······"

"애들아! 형이랑 공 뺏기 게임해서 이기면 아이스크림 사 줄게!"

"와아아아아!"

"좋아한다고······."

올리버의 말끝이 흐려졌다.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패스 놀이하던 애기마저 나한테 우르르 달려왔으니까. 올리버가 끝내 분통을 터뜨렸다.

"너 애들한테 무슨 얘기한 거야? 한국말 한다고 무슨 말을 한 거야?"

"뭔 소리야. 네 말처럼 애들은 잘생기고 예쁜 걸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뿐이야."

"이 자식!"

쯧. 유치하게.

"와아아! 형! 저 아저씨가 저한테 이 개인기 알려 줬어요!"

올리버랑 놀던 아이가 올리버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제 딴에는 팬텀드리블을 보여 준다고 조그 만한 발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저 애기가 뭐래? 나 갖고 뭐라 한 거 같은데?"

어.

그러고 보니 한국말 할 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네.

"너 되게 못 생겼대."

"뭐? 진짜로?"

"응. 축구도 되게 못하니까. 열심히 좀 하래."

"······너 진짜 유치하게."

뭐래.

***

-한국은 첫 방문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데리고 왔던 적이 있다. 하지만 기억은 잘 나질 않는다."

-한국에 오자마자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상당히 좋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첼시를 응원해 주는 팬들이 많다는 것에 감사해하고 있다."

-지금 살짝 놀랍다. 지금까지 비춰 온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제퍼슨 리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서.

"물론 필드 위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거만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나 필드 밖에서는 나도 평범한 사람이며, 팬들의 사랑과 지지 없이는 그저 평범한 스포츠맨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평범하다니. 차기 발롱도르 후보로 꼽히는 데 너무 겸손한 발언 아닌가?

"하하. 그럼 제프답게 말하겠다. 친선전 많이들 보러 오라. 세계 최고 선수의 플레이를 보여 주겠다."

-친선전인데도, 최선을 다할 것인가?

"나는 모든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경기장을 찾는 케이리그 팬들과 축구팬들, 첼시 팬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뛰겠다."

***

제퍼슨 리는 현 시점 세계 최고 선수 중 하나다.

일각에서는 메시와 호날두의 뒤를 이은 시대의 이름이라며 조명하기도 한다.

심지어 올해 발롱도르 수상자로 가장 강력한 후보로 꼽힌다.

물론 아직 메시도 건재하고, 음바페가 리그에서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보여 줬지만, 트레블을 달성한 제퍼슨이 가장 앞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한국에서 제퍼슨 리의 인기가 남다른 건, 한국계란 점도 컸다.

제퍼슨이 한국에 오기 며칠 전부터 스포츠 언론과 인터넷 기사는 제퍼슨 얘기로 가득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유명하지만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 슈퍼스타.

그것이 보통 제퍼슨의 이미지였다.

물론 그를 응원하러 런던으로 갔던 사람들은, 친근한 팬 서비스에 감탄을 터뜨린 적도 있다.

어쨌든 매년 수백억을 홀로 벌어들이는 슈퍼스타인 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하나 한국에서 첼시의 상황이 속속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며 상황은 반전됐다.

<방금 순댓국밥집 갔는데 외국인들 단체로 있더라. 보니까 유명한 사람들 같은데?>

ㄴ??

ㄴ어? 첼시 애들인데?ㅋㅋ

ㄴ형이 왜 여기서 나와?

ㄴ않이;;;

ㄴ국밥은 ㅇㅈ이지 아ㅋㅋㅋ

ㄴ제프가 애들 데리고 온 듯

ㄴ근데 국밥집 관광객들 자주 오는데가 아니라, 완전 쌩 골목에 있는 로컬집 같은데?

<방금 국밥집 왔다는 사람인데, 선수들이랑 사진 찍음ㅋㅋㅋ>

ㄴ와앀ㅋㅋㅋㅋ 부럽네

ㄴ누구 누구 있냐. 하베르츠, 캉테 와, 제프 몸 봐;

ㄴ제프 얼굴이 작은 거냐 어깨가 태평양인거냐

ㄴ본인 글쓴이인데, 원래는 식사 중이라 사인만 받으려는데 제프? 쟤가 와서 사진 찍고 가라 함 ㅋㅋㅋ 억지로 찍었음

ㄴ사진 강매ㅋㅋㅋㅋㅋ

ㄴ약간 분위기가 무서운 형들한테 억지로 '웃어'하면서 찍은 사진 같은데;

<님들 첼시 훈련장 찾아가셈. 그냥 멀리서 사진 찍으려 했는데 제프가 다가와서 핸드폰 억지로 뺏어서 셀카 찍어 줌;;>

ㄴ않이ㅋㅋㅋ여기저기 썰 올라오는 거 보면 제프 사진 안 찍으면 지가 와서 직접 찍어 주네 ㅋㅋ

<훈련장 찾아가라고? ㅈㄹ하지마라. 빠져나갈 수가 없다. 제프가 사진 안 찍으면 못 나가게 막는다.>

ㄴㄹㅇㅋㅋㅋ이쯤 되면 팬서비스 안 해 주면 구단에서 벌금 무는 게 아닌가 싶음

<지방에서 3시간 버스타고 올라왔는데, 우리 딸래미 제프가 목마까지 태워 줬어요.>

ㄴ애기 귀엽네요.

ㄴ제프도 귀엽네

ㄴ제프 어서 오고;

ㄴ제프 한국 커뮤도 하네

<제프뿐만 아니라 선수들이 다 친절함. 엄청 잘생긴 애가 조금 귀찮아하는 게 있었는데, 제프가 다가와서 뒤통수 후려 버린 뒤에는 친절친절함;>

ㄴ션 올리벜ㅋㅋㅋㅋ

ㄴ제프보다 형인데 ㅋㅋㅋ맞고 사네

ㄴㅋㅋㅋㅋ

상당히 파격적인 팬 서비스에 이어 첼시 선수단은 한국 식당을 찾아 식사하는 모습을 SNS 라이브로 방송하는 등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일까.

3일 내내 훈련장, 서울 시내 등 첼시 선수들을 목격한 경험담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하나같이 호의적인 내용이 가득했고, 축구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도 점차 흥미를 드러냈다.

하물며 첼시 선수단은 계속 이벤트 매치나 다름없는 올스타와의 친선전을 보러 와 달라고 경기를 홍보까지 했으니.

첼시 선수단 방한을 유도한 리그협회와 몇몇 후원사들은 호의적인 분위기에 환호를 터뜨렸다.

경기장 전석 매진은 물론이고,

경기 당일 첼시 선수단의 팬 사인회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꺄아아아! 올리버, 팬이에요!"

한 여고생 팬이 션 올리버 쪽에 다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올리버가 삐진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 하지 마. 입고 있는 건 제프 유니폼이잖아."

"에이. 안 속네."

"헤이, 걸. 방금 한국말로 뭐라고 한 거야? 제프, 뭐라 한 거야?"

"재수 없대."

"······한국어를 배우든가 해야지."

그리고 그 팬은 언제 올리버에게 환호를 터뜨렸냐는 것처럼, 제퍼슨에게 다가갔다.

"제프! 한국에 와 줘서 고마워요!"

팬 사인회에 참여한 건 제퍼슨을 비롯해 젊은 선수 네 명이었다. 그들에게도 많은 팬이 몰려들었지만, 제퍼슨이 가장 많은 인기를 구사한 건 거짓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어로 대화가 된다는 점.

사인을 하는 도중에 가벼운 대화가 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제퍼슨에게 인파가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제프, 얼굴에 김 묻었어요!"

"잘생김 하지마세요."

"어······."

"제프! 정말 플레이하시는 거 다 좋은데요. 이거 하나만은 고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어떤 거요?"

"제프를 볼 때마다 고장 난 제 심장이요."

"······."

"제프, 사람을 미치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알아요?"

"뭔데요?"

"하나는 말을 하다가 끊는 거고, 두 번째는······."

"아니, 어디가."

제퍼슨을 당황스럽게 할 만큼, 한국팬들은 짓궂으면서도 유쾌한 팬 사인회를 만들어 줬다.

"제프, 우리 아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해서, 제주도에서 올라왔어요! 아, 제주도는 저기 남쪽에 섬인데······."

"훈저옵서예!"

"어?"

물론 팬들이 제퍼슨을 당황시키는 경우 못지않게, 제퍼슨이 팬들을 당황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울 아들이 정말 팬이에요. 애도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데, 으음. 사실 다리가 좀 아파서요."

마지막 속삭이는 말에 제퍼슨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쑥스럼을 많이 타는지 흘깃 바라보고 있는 예닐곱 살짜리 아이는 발이 약간 휘어져 있는 장애를 갖고 있었다.

제프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사인해 주며 말했다.

"오늘 경기 좌석이 어디에요? 골을 넣고 아드님을 위해 아주 멋진 선물을 준비할게요."

< 204. 베테랑의 퇴장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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