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이게 된다고? 되는데요? (4) >
통통통!
농구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조 우드락이 공을 몰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키도 작고, 축구 선수니까 농구를 그렇게 잘할 거 같지도 않고.'
조 우드락은 앞을 가로막는 제퍼슨을 흘깃 바라봤다.
사실 여기서 제퍼슨 보고 키가 작다고 말할 사람은 우드락밖에 없었다.
210cm인 조 우드락은, 괴물들이 모인 여기에서도 거인이었으니까.
키가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농구에서 신장이 크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 된다.
'흠. 대충 덩크 몇 번 꽂는 걸로 찍어야지.'
광고 콘셉트는 잘 안다. 제퍼슨이 예상외로 농구를 잘하면서, 거기서 자신이 놀라고 서로를 인정한다는,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은데.
조 우드락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특유의 성질머리가 발동했다.
결국엔 본래 콘티대로 촬영하더라도, 그는 최근 미국의 50개 주에서 끊임없이 이름이 외쳐지는 제퍼슨이란 사내의 콧대를 한번 눌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공을 튕겨 가면서.
어느 정도 지점에 도달했을 때, 조 우드락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길쭉한 다리만큼, 큰 보폭이 성큼성큼 바스켓 밑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덩크!
"허!"
"오오!"
여기저기서 감탄이 튀어나온다.
몸이 가볍다는 느낌이 있다.
발목에서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
근육이 출렁이며 거대한 몸을 띄울 때.
공을 잡은 손이 쭉 뻗어지면서 바스켓 위로 내리 찍을 때.
덩크 슛만의 그 짜릿한 쾌감.
그가 라이징 스타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화려한 퍼포먼스.
그는 쉬운 공도 덩크로 끝장내기를 좋아했다.
덩크만큼 관중들의 함성을 이끌어 내기 좋은 건 없었고, 덩크할 때 하늘에 붕 뜨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다른 선수들이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기분도 말이다.
한데.
"어?"
공중에 떴을 때, 조 우드락의 입에서 의문이 튀어나왔다.
'왜 눈이 마주쳤지?'
이상했다.
분명 자신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건만.
제퍼슨과 두 눈이 마주쳤다.
거기서 느껴지는 괴리감.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랑 같은 높이까지 떴다고?'
20cm의 키 차이를 무시하고?
투욱!
바스켓으로 꽂아 넣던 농구공은, 마지막에 툭 치는 제퍼슨의 손끝에 튕겨 나갔다.
완벽한 블로킹.
툭, 투르르르.
바닥에 떨어져 튕겨져 흘러가는 공을 보며, 조 우드락은 입을 쩍 벌렸다.
"좋아, 컷!"
그리고 신난 매클락의 컷 사인이 떨어진 뒤에도,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크으. 제퍼슨 저 자식 점프력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원래 풋볼에서도 점프가 중요하나?"
"물론이지. 러닝백은 붕 떠서 날아오는 공을 받아야 하거든. 선수 머리 위로 덤블링하는 놈들이 가득한데, 저 정도쯤이야."
"제기랄. 풋볼엔 괴물들만 득실댄다더니."
닉 버크는 조 우드락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껄껄 웃었다.
단 한 번에 멋진 그림이 연출되자, 매클락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좋아요! 곧바로 다음 씬 갑시다. 이번에는 제퍼슨 씨가 공격하고, 우드락 씨가 수비!"
매클락은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이미 뽑을 영상은 다 뽑았다. 몇몇 장면은 콘티와 달라졌지만,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선 당장 편집실에 달려가서 제대로 뽑아내고 심정이었다.
통통.
조 우드락은 입술을 깨물고 집중했다.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마지막 덩크가 실패한 거지?
그런 생각이 뇌리에 남아 맴돌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딴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공을 몇 번 굴리던 제퍼슨이, 어느 한순간 발을 성큼성큼 내딛었다.
비록 조 우드락보다는 작은 신장이지만, 제퍼슨도 하체가 발달되어 있었다. 점프하듯이 성큼 뛰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땅을 박차는 반동을 이용해 바스켓 림까지 단번에 뛰어올랐다.
'덩크?'
자신을 상대로 덩크를 하겠다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조 우드락은 붕 뜨는 제퍼슨을 보고 순간 강렬한 위기감에 휩싸였다.
'높다!'
엄청난 서전트 점프기록.
그는 급하게 뛰어올랐다.
20cm에 가까운 압도적인 신장 차.
그가 최선을 다해 뛰어 오르자, 순식간에 하늘을 덮은 듯했다.
그는 손끝을 뻗었다. 제퍼슨이 그의 덩크를 막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드락이 제퍼슨의 공을 살짝 건드렸다.
이 정도만 해도, 막판에 궤도가 틀어지면서 바스켓 안으로 빠질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제퍼슨의 무지막지한 악력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빠아악!
"······!"
바스켓 림이 부서질 것처럼 요동쳤다.
"허?"
"미친."
지켜보던 스태프와 다른 선수들이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분명 우드락이 마지막에 공을 건드리는 걸 봤는데.
'그걸 힘으로 내리 찍었다고?'
바스켓이 부러질 것 같이 강렬하게 흔들리는 파워 넘치는 덩크.
지켜보던 린드로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발. 살다 살다 축구선수가 슬램덩크 하는 걸 다 보네."
***
[imposssible is noting ADIDAS]
-광고 시작. 다섯 명의 스타가 모여 말싸움을 한다.-
ㄴ얘들 연기력 보소ㅋㅋㅋㅋㅋㅋ
ㄴ아데스타 빼고 다 모르겠다.
ㄴ저기 턱수염 많은 백인 닉 버크, NFL 슈퍼볼 2회 우승 괴물임
ㄴ랜디 우버를 몰라? 작년 사이영임
ㄴ린드로스 쟤는 모를 만할 듯. 아이스하키에서 별명이 '얼음 신'임.
ㄴ와 제퍼슨 개쩌네. 저런 애들이랑 광고도 찍고
-랜디 우버와 제퍼슨 리, 야구대결. 제퍼슨 리, 강렬한 직구.-
ㄴ오
ㄴ와!
ㄴ뭐임? 직구 개쩌는데?
ㄴ저거 몇 키로 찍히려나?
ㄴ정중앙으로 그냥 꽂아 버리네
ㄴ타자 얼빠진 표정 리얼한데ㅋㅋ
-아이스하키. 린드로스와 제퍼슨 몸싸움.-
ㄴ엌ㅋㅋㅋㅋㅋ
ㄴ방금 전까지 포효하던 얼음 신 어디 감?
ㄴ얼음 위에서도 선수를 날려 버리네
ㄴ프로날림러ㅋㅋ반다이크로 날리고 린드로스도 날려버림
-제퍼슨 리, 러닝백 플레이.-
ㄴ와, 소름;
ㄴ안 보고 공 받는 거 개소름;;
ㄴㅅㅂ 미쳤다 저거 축구에서 본건데?
ㄴ와 저 사이를 뚫어내네
ㄴㅁㅊㄷ!
-제퍼슨 리 아데스타에게 뒤돌려 차기.-
ㄴ엌ㅋㅋㅋㅋㅋㅋㅋ
ㄴ발차기 각도 시밬ㅋㅋㅋㅋㅋ
ㄴ각 제대로 잡혔다ㅋㅋㅋㅋ
-조 우드락 이겨 내고 슬램덩크
ㄴ?뭐임
ㄴ저거 조 우드락 맞음?
ㄴ조 우드락을 턴다고? 저렇게 턴다고?
ㄴ우드락이 수비력 약하긴 한데.
ㄴ아니 둘 키 차이 20cm가 넘는데?
ㄴ않이;;;;
ㄴ축구선수가 NBA 스타 터는 건 좀;
-선수들 웃으면서 등 돌리고, 제퍼슨 리 마지막으로 퇴장하면서.
impossible is nothing.-
ㄴ와;;;씨;;;
ㄴ이게 광고라고? 영화 한편 뚝딱인데?
***
광고는 꽤 화제가 됐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으니.
오랜만에 토론토 시절 감독이었던, 그랜드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광고 봤지! 휴유! 엄청나던걸? 그 대단한 닉 버크랑 미식축구하는 거 보고 내 심장이 벌렁거리더라고.
"닉 버크 잘 알아요?"
-잘 알지! 미국인 중에 그 친구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간, 그런데 그거 정말 네가 다 찍은 거냐?
"야구에서 공 던지는 거 몇 개는 대역이 했어요."
-나머진 다 실제라는 거네? 맙소사. 넌 정말 미친놈이야.
"왜 사람들은 절 칭찬할 때 다 욕으로 할까요."
-그게 아니면 이 과격한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거든.
그랜드 감독은 전화상으로 껄껄 웃었다.
그러고 보니, 광고를 본 사람의 대부분은 닉 버크와 찍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다른 선수들도 대단하지만, 슈퍼볼 2회 우승자라는 그 업적이 미국인들에겐 느껴지는 게 차원이 달랐다.
뭐, 우리 부모님은 좀 다르다.
NBA팬이신 어머니는 조 우드락에 관심을 가졌다가, 내가 그놈 인성을 설명해 드렸더니.
"흥, 조만간 망하겠구나."
라고 짤막하게 한마디 남겼다.
아버지는 아데스타에게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는 광고에 나온 내 킥에 말이다.
흑백 구도에서 아데스타의 강렬한 얼굴과 내 킥이 작렬하는 순간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아데스타. 확실히 멋진 놈이지."
"격투 좋아하셨어요?"
"은퇴하고 격투계에서 스카웃 제안이 왔었거든. 물론 거절했지만."
"하셨으면 꽤 잘하셨을 것 같은데요."
"흐흐. 네 어머니가 반대하셨다. 내가 괜히 격투하다가 사람 죽일까봐 걱정하셨거든."
"무슨 소리! 어디 가서 맞고 올까 봐 반대했지!"
어머니가 저기서 빽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민망하듯이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광고를 찍은 이후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웹플릭스 다큐에 이어 광고까지 영화처럼 뽑혀 나오면서, 지금 북미의 브랜드 가치 상위권에 내 이름이 올라갔단다.
-닉 버크보다 가치 높은 스포츠 선수라고 기사가 떴던데?
"그러게요."
-크으! 내 손안에서 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제프.
"감독님은 근데 왜 아직도 영국에 계세요? 휴가 안 보내세요?"
-휴가를 보내기엔 할 게 너무 많다. 이직했으니까 직장 파악 좀 해야지.
"이직이요?"
-어? 아직 기사가 안 나갔나? 오늘 저녁 BBC 뉴스 기대해라. 껄껄!
이직이라.
딴 구단으로 가셨나? 아스톤 빌라를 12위까지 이끌었으니, 그의 지도력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하긴, 다른 구단에서 그랜드 감독을 탐낼 만하겠다.
그리고 그날 저녁.
BBC 뉴스를 보고, 난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그 9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미국 국적의 그랜드 감독 선임, 3년 계약]
와.
맨유로 간다고?
······12위팀에서 9위팀으로?
굳이 왜?
***
"맞아. 나한테 미리 얘기했어."
미국에서 만난 로드릭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마음껏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가 내 연락을 받고 캘리포니아에서 미네소타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듣기론, 그랜드 감독님이 널 데리고 간다는 루머가 있던데?"
"그것도 맞아."
"왜 표정이 안 좋아? 맨유면 돈도 많이 주고, 명성도 높잖아."
내 얘기에 로드릭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가 봤자 우리 감독이면 또 공격만 시킬 텐데. 수비에 부담이 장난 아닐걸?"
"흐음."
"그리고 맨유 간 게 뭐. 12위 팀에서 9위 팀으로 가는 건데. 특별할 거 있나."
뭐, 그렇긴 하지.
"난 첼시로 가고 싶었어."
"오퍼 왔었어? 우리 팀에 수비수가 급한 입장은 아닌데."
우리 팀은 아마 지금 공격수를 찾고 있을 거다.
지루가 떠나는 게 확정적이고, 지금 타미도 이적설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스트라이커는 적어도 4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필마르크 감독이니, 최우선 목표는 스트라이커이리라.
"그러니까. 안 왔지. 그리고 올해 겨울에 월드컵이잖아? 월드컵 전까지 경기 뛰면서 컨디션 유지해야 하니까. 그랜드 감독님이 그건 반드시 보장해 주겠다고 했거든."
"음. 그렇지. 그랜드 감독님이면 충분히 그러겠지. 더구나 감독의 축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수비수가 너잖아?"
"이해는 무슨. 다 공격하러 뛰쳐나가는 거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걷어 내는 축군데 뭐."
하나 역설적으로, 그런 축구가 로드릭을 성장시켰음을 부정 못 한다.
한없이 공격 위주의 축구. 미드필더의 수비가담을 기대할 수 없는 전술에서, 로드릭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자연히 태클과 대인마크 능력에서 엄청난 성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 감독이 데리고 간다고 맨유가 덥석 그 선수를 사겠는가?
적어도 스카우트진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라는 판단으로 로드릭에게 오퍼한 것이리라.
어쨌든, 로드릭의 성장은 나에게도 달가운 것이다. 월드컵에서 중요한 건 결국 수비다. 강한 팀의 필수 조건이고, 토너먼트에서는 공격보다 수비가 더 중요할 때가 많으니까.
"제프."
"응?"
"넌 맨유 갈 생각 없어?"
"내가?"
"빌어먹을. 맨유 가 봤자, 다음 시즌에 너를 막아야 되는 건 똑같잖아?"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맨유를 가냐."
"왜? 거기 명성 높은 팀이라면서!"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에서 9위 팀으로 가라는 건 좀."
"······."
할 말 안 할 말 가려서 해야지.
아무리 친구라도 말 너무 심한 거다.
맨유로 오라니.
이 무슨······.
지이잉!
"아, 나 잠깐 전화 좀."
친구하고 얘기할 때, 웬만해선 전화 같은 건 잘 안 받는 편이다. 하지만 액정에 뜬 사람이 다름 아닌 제크 팀장이었으니, 받아야 했다.
그가 전화할 때는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니까.
"예, 팀장님."
-오, 제퍼슨.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뭐 급한 얘기인가요?"
-아뇨, 급한 건 아니고요. 좀 재미있는 스케줄 제의가 들어와서요.
"스케줄이요? 광고는 더 찍고 싶지가 않은데."
-광고 얘기도 많이 들어왔습니다만, 이건 광고라기보단. 음. 제프. 혹시 게임 좋아하세요?
"게임이요?"
게임? 스포츠 말하는 건가?
-아뇨, 그냥 비디오 게임이요. PC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하는 게임 말입니다.
"어. 뭐, 좋아하죠."
-진짜요? 의왼데요? 운동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더니.
게임 싫어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니, 정확히는 게임 싫어하는 '한국인'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본래 제퍼슨 리였다면 모를까, 회귀 전 지독한 슬럼프에서 가끔씩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줬던 건, 우습게도 평범한 오락 게임들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운동만 하느라, 게임 같은 건 손도 안 댔네.
-그럼 좀 괜찮겠네요. 게임 관련해서 스케줄······ 이라기 보단. 좀 재밌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어떤 건가요?"
-그건 말이죠······.
< 199. 이게 된다고? 되는데요?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