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이게 된다고? 되는데요? (2) >
앤 존슨은 이번 광고에 출연하기로 한 엑스트라였다.
다만, 평범한 엑스트라는 아니었다.
랜디 우버의 공을 타격해야 하는 타자 역할이었으니까.
그는 현재 제법 괜찮은 타율을 기록 중인 마이너리그의 타자였다.
프로선수가 이런 광고에 이름도 제대로 안 나오는 단역으로 출연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른다.
하나 상대가 누군가.
작년 사이영상에 빛나는, 빅 핸드 랜디 우버가 아닌가?
그의 공을 볼 수 있단 생각에 망설임 없이 촬영장에 나왔다.
그에게 요구된 PD의 주문은 간단했다.
"그냥 솔직하게 해. 랜디 우버 공을 칠 수 있으면 쳐. 못 칠 거 같다? 그냥 감정을 마음껏 얼굴로 드러내."
실제로 맨 처음 랜디 우버의 공을 받으면서, 앤 존슨은 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이게 사이영상 수상자의 투구!'
감탄스러웠다. 빠르고 강렬한 직구부터, 포크볼, 슬라이드 등 모든 구종이 완벽했고 도저히 칠 수가 없었다.
연기? 그딴 게 뭐가 필요하랴.
정말 속에서 우러나는 감탄이 얼굴로 저절로 드러나는데.
PD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컷 사인을 보냈다.
'랜디 우버는 랜디 우버구나!'
새삼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낀 앤 존슨은, 촬영장이 잠시 어수선해지는 걸 느꼈다.
"대역이 정말 필요 없겠습니까?"
"뭐, 그냥 한번 해 보죠."
답답해하는 듯한 광고 감독과, 옆에서 허허 웃고 있는 랜디 우버. 그리고 무뚝뚝하게 글러브에서 공을 뺏다 넣었다 하는 젊은 덩치.
'제퍼슨 리!'
그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아들놈이 갑자기 야구가 아니라 축구를 한다면서 보여 줬던 다큐멘터리를 봤으니까.
'진짜 스타들밖에 없군, 여기에.'
한쪽에는 아이스하키, UFC, NFL의 스타들이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내심 긴장된 앤 존슨은, 임시로 마련된 마운드에 제퍼슨이 올라오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랜디 우버 빼고는 대역이 공을 던진다고 했었는데?'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랜디 우버만 실제로 공을 던지고 다른 출연자들은 대역 선수가 던지기로 했던 터.
그렇게 합을 맞추는 연습을 촬영 전에 하지 않았던가.
왜 제퍼슨이 마운드에 서지?
"직접 던지려고 하나 본데요?"
같이 출연한 포수가 피식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감정이 물씬 느껴졌다. 앤 존슨도 어이가 없었다.
"저 친구 쿼터백도 아니잖아? 발로 하는 그 축구 선수잖아?"
"축구 선수가 공을 던진다고? 참나. 야구가 쉬워 보이나."
앤 존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송이.'
거만한 애송이.
재미도 없는 축구에서 스타가 됐다고 야구가 쉬워 보이나.
앤 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몇 개는 봐주고, 몇 개는 쳐 내자. 그럼 그림 좀 나오겠지.'
앤 존슨은 그런 생각으로 타격 자세를 잡았다.
제퍼슨이 투구 자세를 잡을 때. 앤 존슨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양발이 어색한 보폭을 유지한 것이, 꽤 어정쩡해 보였으니까.
'형편없군.'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순간 그의 눈앞이 번쩍였다.
화아악, 투욱!
"······어?"
"으응?"
잠깐의 당황스러움.
앤 존슨은 잠깐 사고가 멈춘 듯했다.
그건 포수도 마찬가지였다. 포수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포수의 글러브에 있는 공.
정중앙으로 때려 꽂혀 버린 스트라이크.
그제야 앤 존슨은 무슨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몸에 닭살이 돋았다.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
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진짜로 내가 못 봤단 말이야?
저 아무런 기교도 없는 단순 우직한 직구를?
아무리 마이너리그 타자라지만, 공을 보는 능력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공을 미처 보지 못했다고?
'아냐, 내가 잠깐 한눈을 판 거야.'
이해하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사람은 일단 부정하고 본다. 그리고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앤 존슨이 그러했다.
하나 이어지는 무심한 직구 세례.
화악, 툭!
투욱! 툭!
"······대체."
황당한 감정? 그딴 게 아니었다. 앤 존슨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동자로 마운드에서 무심한 얼굴로 직구를 꽂아 넣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휘익! 빠아아악!
겨우 한 번.
여섯 번의 정중앙 스트라이크가 꽂히는 동안.
앤 존슨이 제대로 타격한 건 딱 한 번이었다. 심지어 헛스윙을 한 번 했다.
즉 4번은 그저 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고, 한 번은 헛스윙. 그리고 마지막 6번째야 공이 눈에 들어왔고, 간신히 쳐 냈다.
'시발.'
이해할 수 없었다.
'최소한 직구만큼은 마이너리그 투수급이다.'
아니, 자신이 마이너리그에서 꽤 잘나가는 타자니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무심한 눈빛으로 글러브를 벗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이게 된다고? 축구 선수가?'
물론, 이해는 할 수 없었다.
***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나도 돈을 받는 프로니까.
"미안해요, 대역 선수를 써야겠네요."
"······네?"
그저 날 멍하니 바라보던 매클락 감독은 뒤늦게 반응했다.
"아니, 아니. 금방 그림······ 되게 좋았는데? 타자 당황하는 표정도 좋았고, 우버 씨 표정도 압권이었고. 엄청."
"전 직구밖에 못 던져요."
"아!"
"몇 번 연습해 봤는데, 어우 타자 바로 앞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포크볼같이 기가 막힌 공은 어떻게 던지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말에 매클락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고, 옆에 있던 랜디 우버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미친놈아. 그게 됐으면 넌 나랑 사이영 경쟁했을 거다."
"전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후보 탈락입니다."
"끄응!"
랜디 우버는 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오케이. 제퍼슨, 알겠습니다. 하지만 금방 던진 직구 그림은 그대로 가져갈게요. 너무 좋았거든요."
"아, 예 알겠습니다."
"좀 쉬시고 계시죠. 다음 촬영 준비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뭐라 해야 할까.
나도 눈치란 게 있다.
내가 대역을 안 쓴다고 했을 때, 매클락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빛을 봤으니까.
한데 지금은 아니다. 두 눈이 반짝이고, 나를 대하는 태도나 자세, 표정 등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이! 거기 의자 깔고! 따뜻한 차라도 준비해! 빨리! 제퍼슨 씨가 앉을 자리라고!"
음.
좀 너무 과한 것 같기도.
***
빠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컷컷컷! NG!"
매클락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타자 앤 존슨이 온몸을 굼벵이처럼 움츠린 채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 죽일 일 있습니까!"
"끄응! 쏘리, 미안해."
"으흐음. 미안하군."
린드로스와 아데스타는 뻘쭘한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매클락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퍼슨의 직구를 보고 다른 출연자들도 자극을 받았다. 대역을 쓰지 않고 해 보겠다고 나섰다.
매클락은 제퍼슨이 해냈기 때문에, 나머지 선수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공은 빨라. 완벽해.'
아데스타와 린드로스 모두 어깨와 상체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선수.
거기서 터져 나오는 공의 속도와 힘은 완벽했다.
하지만.
'방향을 전혀 못 맞추잖아?'
그랬다.
정중앙으로 꽂히는 직구가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마구였다. 방금은 앤 존슨의 머리를 깨뜨리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대역으로 해야겠군."
새삼 제퍼슨이 방금 보여 준 퍼포먼스가 얼마나 대단했던 건지 절로 감탄이 일었다.
"오! 좋은데?"
"나이스 볼!"
"이야. 닉 버크도 메이저리그 가야겠는데?"
물론 닉 버크는 달랐다.
아데스타, 린드로스와 달리. 완벽한 직구를 선보였다. 제퍼슨보다야 힘이 딸리는 느낌이었지만, 깔끔했다. 그뿐만 아니라 포크볼과 슬라이드 같은 구종도 구사했다.
그 모습에 매클락이 놀랐다.
"아니, 스포츠 선수라면 다 그 정도는 하는 겁니까?"
"아니죠. 풋볼하는 친구 중엔, 야구도 같이하는 친구가 많거든. NFL하고 MLB에서 동시에 드래프트 선정된 친구가 매년 나오는 거 모르나?"
"아하. 그럼 제퍼슨도? 제퍼슨도 미식축구를 했다고 했으니까."
"글쎄."
닉 버크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매클락은 조금 이해가 됐다. 괴물 중의 괴물만 모이는 스포츠, 미식축구.
제퍼슨이 공을 잘 던지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던 것이다.
물론. 이건 매클락의 착각이었다.
쿼터백 포지션인 닉 버크가 공을 잘 던지는 건 당연하다. 애당초 쿼터백이 공을 던져 주는 역할이니까.
한데 제퍼슨은? 러닝백이었다.
공을 던지기보다는 돌파를 해서 수비벽을 뚫어내는 가장 위험하고 아찔한 포지션.
그냥.
'제퍼슨이 괴물이지.'
닉 버크는 애써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제퍼슨은 여기 사람들을 더 놀라게 하리라. 그걸 미리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람들은 두 눈으로 봐야 믿는 법이다.
그가 본 제퍼슨은 확실했다.
'미친놈.'
가장 미친놈이었다.
***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아데스타를 보고 린드로스가 껄껄껄 웃었다.
"어이. 스케이트는 타 봤어?"
"닥쳐!"
"흐흐흐흐! 나이지리아에는 얼음이 없잖아?"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당장 예수님을 찾게 해 주지."
"오, 이런. 이 얼음 위에서는 내가 신이야! 얼음 신! ICE Fuck God! 그게 내 별명이지!"
"신성모독이군."
"Fuck you, Bro!"
매클락은 유치한 신경전을 펼치는 린드로스와 아데스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데스타! 스케이트 타는 거 조금만 찍어 보죠!"
"제기랄."
아데스타는 난폭하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촬영에 무척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매클락은 일그러진 표정이 쉬이 펴지지 않았다. 아무리 대역선수를 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아데스타가 빙판 위에서 하키 스틱을 들고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찍어야, 편집으로도 어떻게 살리지 않겠나.
한데 아데스타는 빙판이 정말 익숙하지 않은 듯 한숨만 내쉬었다.
그건 쿼터백 닉 버크도 마찬가지였다. 천의 운동신경을 가진 그도, 스케이트는 처음인지 제법 빙판을 탔으나 스틱을 들고 화려한 움직임을 하기엔 무리였다.
"음. 일단 아데스타 씨는 조금 연습하시고, 바로 제퍼슨 씨 가시죠."
매클락은 무심하게 필드로 나가는 제퍼슨을 보고 흠칫했다.
아이스하키 복장을 다 차려입은 제퍼슨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린드로스도 얼음 신이란 별명처럼, 빙판에서는 압도적인 분위기였는데. 제퍼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명이 빙판 위에서 마주 보자, 누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간단합니다! 퍽(Puck)을 두고 스피디하게 스케이트 타면서 몸싸움해 주시면 됩니다!"
"흥. 나야 가능하지만, 이 친구가 스케이트 타면서 몸싸움할 수 있겠나?"
린드로스가 콧방귀를 꼈지만,
이윽고 시작된 촬영 속에서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뻐어억!
"크흡!"
어깨에서 전해지는 둔중한 충격.
퍽을 향해 스틱을 쭉 내밀며 달려가던 린드로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맙소사!'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퍽은 놓쳤고, 그걸 제퍼슨이 스틱으로 쭉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골대 옆을 벗어났다.
'스틱은 처음 쥐는 게 확실한데?'
린드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스틱으로 퍽을 다루는 기술은 엄청 부족하다. 즉 스틱을 잘 못 다루는 건 확실하다.
한데.
빙판 위에서 이런 몸싸움을 한다고?
아이스하키를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초짜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스케이트를 타고, 어깨를 밀어 넣는 바디체크는 절대로 아마추어가 아니다.
린드로스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다시 달려들었다.
은근슬쩍 상체를 비틀며 가슴을 찍는 어깨.
옆구리에 순간적인 충격을 주고, 허벅지를 밀어 넣어 무게 중심을 흩뜨리는 교묘한 싸움 방식.
뻐억!
"끄읍!"
하나 다시 한번 튕겨 나오는 건 린드로스였다.
제퍼슨은 상체의 힘만을 이용해 린드로스를 박살 내고 있었다.
마치 몸싸움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린드로스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제퍼슨은 필드에서 늘 보여 줬던 거친 몸싸움을, 빙판 위에서도 아낌없이 뽐냈다.
"허어?"
"저 친구 스케이트 너무 잘 타는데?"
닉 버크와 아데스타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특히 방금 빙판을 경험한 아데스타는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스케이트를 잘 타는 거야 그렇다 쳐. 그런데 린드로스랑 몸싸움할 때마다 이겨 낸다고?"
"축구가 원래 몸싸움이 심한 스포츠이지 않나."
"빙판하고 잔디 위하고는 다르지. 저 얇은 스케이트 날로, 무게 중심과 균형을 완벽하게 이룬다는 거잖아?"
"······."
"오, 지저스. 저 허벅지의 근육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껴졌었는데. 균형감각까지 저럴 수가 있다니."
아데스타의 눈이 번쩍였다.
"저 킥에 맞으면 꽤 아프겠군."
조금 있을 격투 촬영이, 갑자기 기대되기 시작했다.
< 197. 이게 된다고? 되는데요?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