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96화 (196/258)

< 196. 이게 된다고? 되는데요? (1) >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어떨까?

그들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스포츠 분야는 그런 경향이 짙다.

물론 타고 난 재능도 중요하다. 하지만 수많은 천재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 위해선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몸을 깎는 노력이라고 해야 할까.

끊임없이 땀을 흘려야 하고, 근육을 스스로 찢고 붙여야 한다. 몸을 가혹하게 몰아붙여야 한다.

고로 오늘 나와 함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존경할 만한 위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서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맨 처음 얘기를 꺼낸 건, 여기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슈퍼볼 2회 우승에 빛나는 최고의 쿼터백.

NFL에서 현재 주가가 가장 높은 선수.

더 쿨(The Cool)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닉 버크였다.

"이봐, 친구. 제퍼슨이라고 했지? 고등학생 때 러닝백 MVP였다면서? 대단한데?"

"아, 뭐. 그랬죠."

"그런 재능이었으면 NFL까지 가서도 꽤 날았을 텐데 말이야. 고등학생 때 MVP 먹은 친구들은 프로에서도 날아다니더라고. 나도 고등학생 땐 러닝백이었는데, MVP 수상은 꿈에도 못 꿨지."

"지금은 최고 쿼터백인데, 원래 러닝백이었다고요?"

내 물음에 담긴 의아함을 느꼈는지, 닉 버크는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생 때, 내 팀에 있던 쿼터백이 좀 싸가지가 없었거든. 잘생기기도 했고, 키도 컸고, 똑똑하기도 했고 인기도 많았고."

"음. 그게 싸가지 없는 건가요?"

"그럼 그게 싸가지 없는 거지. 아닌가?"

어······음.

내가 알던 싸가지와의 기준이 좀 다른데.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닉 버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볼 때마다 재수가 없어서. 경기 중에 그냥 홧김에 이빨 몇 개 날려 버렸거든."

"음. 공으로 날린 건가요? 주먹으로 날린 건가요?"

"당연히 주먹이지. 싸가지가 없는 놈이니까."

그러니까, 이때 알았어야 했다.

이 양반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 의문을 가졌어야 했다.

"이빨 몇 개 날아가고, 콧대도 뭉개 줬지. 아 글쎄, 경기에 나올 수가 없다는 거야. 약아빠진 놈. 쉬고 싶어서 안 뛰겠다는 거겠지. 싸가지는 참."

내가 알던 상식의 기준이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쿼터백으로 좀 뛰었어. 근데, 와. 이게 내 천직이었나 봐? 하필 그날 왔던 대학 코치가 날 보고 반해서 스카웃했지. 그 이후로, 슈퍼볼까지 우승하고 말이야."

아.

이것이 재능인가.

그런데 싸가지가 없다고 주먹 날리는 건 좀. 아니, 얘기만 들어 보면 싸가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든 건,

아이스하키 선수인 '얼음 신'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린드로스였다.

"풋볼은 아주 재밌는 스포츠지! 나도 고등학교 때 풋볼 좀 했어. 이름 좀 날렸었지."

"오! 역시 스포츠 중 최고는 풋볼이라니까. 그래, 자넨 왜 아이스하키로 종목을 바꿨나?"

"그쪽이랑 마찬가지야. 나도 쿼터백을 두들겨 팼거든."

아니, 쿼터백이 무슨 잘못인데.

그리고 왜 저런 얘기를 듣고 호감을 표하는 거지?

닉 버크는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왜? 네 포지션은 뭐였는데?"

"오펜시브 라인맨."

"음? 체격이 작은데?"

작다고?

190에 90kg은 되어 보이는데?

아. 오펜시브 라인맨치고는 작다는 거겠구나. 그 포지션은 쿼터백을 보호해주고 리시버의 도주로를 확보하는 역할도 한다. 하여 체격이 아주 비대해야만 한다. 거의 필수적으로.

"아직 어렸을 때니까. 그땐 더 클 줄 알았지."

"아하. 그러면 체격이 부족해서 그만둔 거야?"

"아니. 내가 실수를 해서 쿼터백이 깔린 적이 있거든? 그러더니 지랄을 하더라고. 이 머저리 새끼야! 나를 지켰어야지! 막 이렇게 말하면서. 그거 듣고 그냥 홧김에 달려가서 니킥으로 얼굴을 찍었지."

"화끈하군."

"경기출장 금지 징계를 때리길래, 그냥 아예 때려치웠지."

저게 담담하게 나눌 얘긴가.

"그럼 왜 아이스하키로?"

"니킥으로 쿼터백의 얼굴을 찍으니까 알겠더라고. 아. 나는 격투기구나."

"축하해. 적성을 찾았군."

"그런데 부모님이 반대하셨어. 그래서 뭐 야구를 하려 했지. 벤치클리어링이 매력적이었는데, 야구는 딱히 재능이 없었고. 그러다가 알아보니 아이스하키는 아예 싸움꾼 포지션이 있다네?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규칙도 있고? 이거다! 했지."

"잠깐. 격투기를 반대한 부모님이, 아이스하키는 허락하셨다고?"

"부모님 두 분 다 캐나다 분이시거든."

"아하. 이제 말이 되는군."

닉 버크는 꽤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그는 옆에서 이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는 사이영상 수상자, 랜디 우버를 보고 물었다.

"그쪽은?"

"나는 별거 없어. 그냥 평범한 루트야. 그쪽처럼 누굴 주먹으로 때리진 않았지."

"거 시시한 양반이었구먼."

"중학교 때였나. 선생 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서 창문 밖으로 보는데, 그 선생이 걸어 나가고 있더라고. 그러다가 문득 뭔가 던지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근데 안 맞을 거 같아서, 공을 한번 휘어서 던져 볼까? 했는데 웬걸? 뒤통수가 박살이 나더라고. 그때 알았지. 난 투수를 할 운명이구나."

"오호라. 요즘은 사이영상을 사이코패스한테 주나 본데?"

닉 버크의 조롱에도 랜디 우버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우버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버크의 시선은, 여기서 유일한 흑인 선수인 아데스타에게 향했다.

UFC 미들급 챔피언. 미국 국적이 아닌 나이지리아 국적인 그는 과묵했다.

"Hey, 자네 영어는 할 줄 아나?"

버크의 질문에 아데스타는 5초 동안 버크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나직이 뱉어냈다.

"Fuck you."

"오호! 이런! 텍사스 출신이면 말을 하지 그랬나!"

눈빛만 봐도 살벌하건만, 닉 버크는 재잘거리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쯤 되니 감탄스럽다. 슈퍼볼 우승은 입으로 했나 보다.

아데스타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난 독실한 크리스천이거든."

"응? 크리스천인거랑 격투를 하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아프리카에선 주먹질이 신앙과 관계있나?"

"내 주먹에 처맞으면, 다들 코피를 흘리면서 '오, 지저스!'하고 외치더군. 그래서 생각했지. 이게 내 신앙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설마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

닉 버크마저 말을 잃었다.

한 차례 헛웃음을 짓고 대화를 이어 간 건 랜디 우버였다.

"사이코패스가 사이영상을 받는 거라면, 내가 아니라 저 친구가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거기 가장 어린 친구, 제퍼슨이랬나?"

내가 보기엔 그쪽도 별다를 바 없습니다만.

이 이상한 양반들의 대화를 이제 끝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끝도 없이 알맹이 없는 말싸움이 이어지리라.

"그냥 다들 닥치고 촬영 얘기나 하죠? 하나도 안 궁금한 노친네들의 과거 얘기는 그만 듣고요."

"허어!"

"노친네들이라니."

"아직 한창 전성기들인데."

"딱 보니 다 늙어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그냥 촬영 감독 사인 들어갈 때까지 좀 조용히 있죠."

나이가 가장 많은 투수 랜디 우버와 쿼터백 닉 버크는 그저 귀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반해 29살의 아직 한창때인 아이스하키 선수 린드로스가 날 노려봤다.

"스무 살이라고 했지? 하긴, 그 나이에 세계에서 최고라고 치켜세워 주는데.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하지. 그래도 예의는 지키지?"

"사람 두들겨 패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한테 지킬 예의가 있던가."

"거 참. 이거 안 되겠네."

린드로스가 눈을 부라렸다. 아이스하키에서도 거친 플레이를 주로 하는 선수로 유명하다. 벌떡 일어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한데.

그런 위압감에 쫄 사람이 솔직히 여기에 어디 있나.

뭐, 해보자면 해보자는 거지.

***

우당탕탕!

문을 활짝 열고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

매클락은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안도감이었고, 하나는 당혹스러움이었다.

"뭐야 이게?"

대기실까지 달려오며 얼마나 암울한 상상에 시달렸던가.

서로 치고받는, 수백억 달러의 스타들.

그 끔찍한 상상은 다행히 상상으로만 그쳤다.

그래도 대기실 안 풍경은 꽤 어색했다.

양쪽 가장자리가 박살 나다 못해 으스러진 테이블.

그리고 한 손을 마주 잡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린드로스와 제퍼슨 리.

"어음. 무슨 상황이죠?"

"뭐, 팔씨름 좀 하다가 테이블 하나 날아간 상황이죠."

닉 버크가 껄껄 웃었다.

그 말에 매클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팔씨름을 해야 테이블이 박살 나죠?"

"음. 죄송합니다, 감독님. 간단히 서로 소개 좀 하고 게임하느라 이리됐네요. 테이블은 제가 변상하겠습니다."

매클락은 제퍼슨의 정중한 어조에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들이닥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매클락은 노련했다. 단순한 게임이라고 표현했지만, 대기실에 감도는 미묘한 공기.

'흠. 이거 바로 씬 들어가면 되겠는데?'

스포츠 스타와 광고를 찍으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연기력이다.

원하는 그림이 쉽게 잘 안 나온다는 것.

한데 지금 출연자들의 표정과 미묘한 분위기.

딱 본인이 원하던 그림이었다.

이 느낌 이대로 살리면 될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고,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다 준비되셨죠? 바로 촬영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다만 린드로스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닉 버크가 어깨를 툭 쳤다.

"어리다고 봐준 거야? 그냥 일찍 끝내지 그랬나?"

"으음. 봐준 거 아니요."

"응?"

"제기랄. 테이블 부서진 거 보면 몰라?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짰다니까."

"허어. 그런데 비등비등했다고? 저 어린 친구가 힘을 좀 쓰나 보네. 하긴 러닝백 MVP출신이면 그럴 만하지."

닉 버크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더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린드로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촬영 준비를 하는 제퍼슨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단순한 말싸움이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프로였고, 깔끔히 팔씨름으로 한판 붙자면서 대결을 하기로 했다.

한데, 제퍼슨의 손을 잡은 순간. 그 우악스러운 힘이 느껴진 순간 몸이 살짝 떨렸다.

스틱을 매섭게 휘둘러야 해서 특히 어깨와 팔 근육이 발달한 게 아이스하키 선수다.

한데 제퍼슨은 발을 쓰는 축구를 하는데도, 그 악력이 엄청났다. 잡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온 힘을 다해, 팔을 넘어뜨리려고 악다구니를 쓸 때.

제퍼슨의 눈을 봤다.

이만큼 내가 힘을 쓰고 있으니 상대도 힘들어하리라고 생각했건만.

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바위를 두고 팔씨름을 하는 기분이 그러할까.

'제기랄. 완전히 농락당했군.'

입안이 씁쓸했다.

***

"거 진짜 대역 필요 없습니까?"

"일단 해 보죠."

매클락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대놓고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냈다.

글러브를 손에 끼고 있던 랜디 우버가 허허 웃었다.

"공 좀 던져 본 적 있나?"

현재 촬영할 씬은 랜디 우버와 제퍼슨 리의 경쟁 장면.

랜디 우버가 먼저 볼을 던지는 모습을 촬영하고,

그다음에 제퍼슨 리가 도전하는 장면은 연출하려 했다.

미리 준비된 마이너리그 출신의 대역 선수는 어정쩡한 자세로 뒤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퍼슨이 대역 없이 하겠다고 했으니까.

제퍼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기 전에 연습 좀 했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직구 하나만 찍어도 되죠?"

"으음! 그래, 한번 해 보시죠."

카메라가 빠르게 돌아갔다. 매클락은 곧바로 NG를 선언할 준비를 했다. 낭비할 시간은 없다.

제아무리 만능 스포츠맨이어도, 랜디 우버가 놀란 표정을 지을 만한 공을 던질 수는 없을 터.

만일 다른 종목의 선수였다면 모를까.

'발을 쓰는 축구선수 놈이 공을 어떻게 던져?'

시간이 금이다.

한 번만 던지는 거 보고 바로 NG 선언을 한 후에 대역을 투입할 생각이다.

그런 마음으로 매클락이 액션을 외치며 화면에 빨간불이 점등될 때.

휘욱, 툭!

"······어?"

조그마한 녹화 화면으로 보던 매클락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서 같이 촬영 중인 랜디 우버의 눈동자가 커졌다.

대본대로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는 랜디 우버.

그러나 매클락은 알았다.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라고. 랜디 우버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자신도 입을 벌리고 있으니까.

제퍼슨은 공을 들고 다시 한번 던졌다.

조금은 어색한 보폭, 그러나 휙 회전하는 유연성 넘치는 상체, 단단한 어깨 근육에서 터져 나오는 힘.

'번쩍인다.'

그렇게 표현된다.

벼락같은 움직임. 쭉 뻗어 나가는 피칭 폼. 날아오른다기보단, 무언가 번쩍인다고 느껴진 순간.

포수의 글러브로 '빠악'하는 소리와 함께 안겨들었다.

"······."

빠르고, 강렬한 직구.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휘휘 돌리며 "몇 번 더 던질까요?"라고 말하는 제퍼슨을 바라보며.

매클락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게 된다고?"

< 196. 이게 된다고? 되는데요?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