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또는 아름답게 (5) >
홈에서 결승전을 포기하는 팀은 없다.
스코어는 3대 2가 되었지만, 뮌헨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한 명이 더 많았으니까.
그래서 정규 시간이 고작 10여분 남았을 때.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두 올라가!"
극도로 끌어올린 수비라인.
공격적인 포메이션 변화.
양쪽 풀백인 다비드 알라바와 뱅자맹 파바르가 미친 듯이 올라오고,
최후방 수비수 쉴레만이 후방에 남았다.
어쩌면, 그들은 내 체력이 다 떨어졌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직전 맨시티와의 FA컵 결승전에서 13km를 뛰었고, 지금도 풀타임을 뛰고 있으니까.
그들의 예상은 맞았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뭐, 좀 꼰대 같긴 하지만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 내라! 투지를 보여!"
오늘이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란 말이다. 다음 경기를 위해 체력을 아낄 필요도 없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아직 나는 더 뛸 수 있다. 까짓 다리근육이 미친 듯이 경렬할 때까지 말이다.
그랬기에, 이 경기 마지막.
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회자될 플레이를 보였다.
뻐엉!
단 한 번의 역습.
뮌헨의 공격진이 모두 올라가, 우리는 수비에 급급해 두들겨 맞기만 할 때.
카이 하베르츠가 최후방에서 단 한 번의 롱패스를 쏘아 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입에서 절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포효? 악에 차 외침? 모르겠다. 그냥 속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힘을 쥐어짜 달렸다. 냅다 질주했다. 양쪽 풀백의 오버래핑으로 인해 최후방은 헐거워지다 못해 끈 하나만 남아 있는 상황.
나는 미친 듯이 공을 치고 내달리면서 측면을 찢어발겼다.
"Nooooooooo!"
괴성처럼 소리치며, 수비들이 급하게 복귀한다.
나도 지쳐서 스피드가 조금 떨어진 것일지는 몰라도. 어쩌면 공을 몰고 달리고 있는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복귀하던 수비수들이 아슬아슬하게 쫓아와 이를 악물고 뒤에서 백태클을 해 오지만.
투욱! 툭!
누군가 말했다.
뒤에도 눈이 달렸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명쾌하다.
달리진 않았지만, 달린 것처럼 가끔 뒤에서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그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순전히 축구 센스다.
이쯤 되면 여기서 태클이 들어오겠지? 저절로 몸이 느끼고 경고한다.
이거는 노력으로 벌충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오로지 타고나야만 가능한 것.
내가 회귀 전 왜 축구 천재라고 불렸냐고?
이런 거 때문이다.
투욱! 툭!
"태클을 또 피했어!"
"빌어먹을! 어떻게 피하는 거냐고!"
"제발! 제발!"
그토록 간절한 외침이 상대방에게서 터져 나온다는 건.
좀 미안한 말이지만,
가슴이 간질간질 거리는 게.
기분이 참 좋단 말이야.
"웃지 마!"
쉴레가 내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봤을까.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에게 태클을 시도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각도를 좁혀 오며, 파울에 가까운 태클. 뮌헨의 수비가 복귀하는 시간을 벌어 주고, 운이 좋으면 공까지 걷어 낼 수 있다.
하나, 그건 일반적인 공격수에 한해서다.
그의 태클 실력이 우수한 것처럼, 내 실력도 우수하니까.
투욱!
"Yeaaaaaaaaaaaaaa!"
왼발 안쪽과 오른발 안쪽으로 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화려한 라 크로케타로 쉴레의 태클을 가뿐하게 피해 내자.
노이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오늘 노이어가 아니었다면 난 두어 골은 더 넣었을 거다.
그만큼 대단한 친구다.
그랬기 때문일까.
오늘 저 일그러진 표정을 한 번 더 볼 수 있단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개자시이이이익!"
보라.
저토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성을 질러 대는 모습을.
그랬기에 망설임 없이 슈팅 자세를 취했다.
허리와 어깨를 쭉 펴고, 발끝을 들어 올리는 슈팅 폼.
노이어의 동공이 순간 흔들린다.
그래.
패스로 보이겠지. 그렇게 보이는, 솔샤르 특유의 슈팅 폼이다.
하나 그간의 내 플레이를 미리 분석하고 연구했다면, 속지 않으리라.
노이어는 과연 속지 않았다. 골문 앞을 정확히 지켰으며, 달려 나오며 슈팅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툭!
"시이이이바아아아알!"
페이크 슛 모션을 취하고, 오른쪽으로 살짝 내주는 쇼트 패스.
완벽한 스트라이커는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골만 잘 넣으면 된다.
그게 스트라이커의 본분이다.
한 시즌에 80골을 때려 박는 스트라이커라면, 완벽하다는 수식어를 붙여도 된다.
그러나 카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일한' 스트라이커가 되려면,
음.
패스도 잘해야 하지 않겠어?
아슬아슬하게 노이어의 손끝을 스치고 오른쪽으로 빠진 패스가 도달한 위치에는.
"오-도-이!"
나를 뒤따라 수비라인에서부터 여기까지 죽어라 뛰어온 오도이가 마지막 슈팅을 툭 밀어 넣었다.
"허억, 헉!"
그는 자신이 뮌헨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졌다.
"Gooooaaaaaaaaaaaaal!"
그제야 오도이는 넘어진 채 양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첼시 유스 출신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첼시를 위한 골을 넣었다.
멋진 이야기다.
"오늘 수고했어, 노이어."
"닥쳐! 개자식아!"
"음. 성격 좀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나 퇴장시키려고 긁는 거지? 이 빌어먹을 자식!"
"거 참."
자식, 성격 한번 참.
어쨌거나.
우리는 4대 2라는 스코어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뮌헨은, 역시 뮌헨이었다.
한 명이 앞서고 있는 수적 열세를 살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후반 91분 토마스 뮐러가 극적인 세 번째 골을 터뜨렸으나.
삐이이이이익! 삐익!
경기는 끝났다.
마지막 울리는 그 휘슬 소리가 얼마나 반가운지.
터져 나오는 격정과 환호 속에서.
우리는 모두 약속한 것처럼 필드 위에 널브러졌다.
말 그대로 존나게 뛰었다.
정말로.
이대로 잠들고 싶단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우리 이긴 거 맞지? 맞지? 우리가 이겼다고! 우승했다고!"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괴성을 질러 댔다.
뭐.
맞겠지.
우리는 웃고 있고, 뮌헨은 울고 있으니까.
그래.
맞다.
우리는 마지막 달콤한 승리를 취했다.
2011-12에 이어, 2021-22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10년 만에 빅이어를 우리 손으로 들어올렸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대 바이에른 뮌헨에게 4대 3.
우리는 우승했다.
***
필마르크 감독은 하프타임 때 선수들에게 웃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첼시 선수들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죽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웃으면서 울 수 있을까.
그 상반된 감정이 한 얼굴에 드러나는 건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첼시의 선수들은 모두 그렇게 울고, 웃고 있었다.
첼시의 캡틴 아스필리쿠에타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는 2012-13시즌에 첼시에 왔다.
직전 시즌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했던 첼시였기에, 그는 언제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릴 수 있으리란 판단으로 첼시에 왔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하늘이 선택해주는 거란 얘기가 있다.
그만큼 쉽지 않았다.
10년.
아스필리쿠에타가 첼시에서 뛴 시간이었다.
그 10년 동안 점점 조급해졌다.
선수로서, 프로선수로서, 그것도 월드클래스 평가를 받는 대단한 풀백으로서.
커리어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수많은 대회의 모든 트로피를 섭렵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의 격렬한 감정은 처음이다.
세 개의 트로피.
감독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일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그는 지금 자신도 모르게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팀의 캡틴으로 격렬하게 선수들을 이끌어 주진 못했지만,
이 선수들은 군말 없이 자신의 말을 잘 따라 줬다. 그리고 이 자리까지 함께해 줬다.
진심으로 고마웠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휘둘리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첼시에 남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시켜 주겠다고 했었지. 제기랄. 그걸 1년 만에 지킬 줄이야."
그는 어쩌면 저 제퍼슨의 자신감과, 그걸 지켜 내는 타고난 실력에 부러움을 느꼈다.
또,
자신은 이제 몇 년 남지 않았고.
저 친구는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아쉬움을 느꼈다.
'몇 년 만 더 젊었어도, 더 오래 함께 했을 텐데.'
그만큼, 같이 뛸 때 너무도 매력적인 선수였다.
***
상반된 감정이 필드 위를 교차했다.
우리는 웃었고, 뮌헨은 울었다.
쓰러진 채 고개를 숙인 뮌헨 선수들의 눈동자는 붉었다. 누구는 참지 못해 코치진의 위로 속에서 절뚝이며 벤치로 향했다.
"축하해."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레반도프스키가 다가왔다.
컴플리트 포워드의 대명사로, 저 나이에도 이번 시즌 뮌헨을 속된 말로 캐리한 선수다.
마음속에 깊은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넌 내가 본 스트라이커 중에 최고군. 메시와 호날두도 만나 봤지만, 너처럼 스트라이커로서 최고라고 느껴지는 건 처음이야."
레반도프스키는 씁쓸하게 웃으며 나에게 박수를 쳐 줬다. 유니폼을 교환하자고 얘기하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니폼은 한 30년 후면 억만금이 될 텐데."
"그걸로 재테크라도 하시게요?"
"나중에 보험이라도 해야지. 수고했어. 진심으로 축하해. 아, 완전 진심은 아니야. 한 99%는 질투와 시기에 빠져 있으니까. 넌 1%만 받아들여."
"그 정도면 충분하죠."
레반도프스키의 씁쓸한 미소를 뒤로하고.
필드를 쓱 둘러봤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감독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선수들을 토닥이고 안아 주고 있었다.
흠.
본인 두 눈에 맺힌 눈물 좀 닦지.
어쨌건 시간이 좀 지나고 상황이 정리됐다. 우리는 준비된 단상으로 올라갔다.
이 순간이다.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아스피가 조심스럽게 맨 중앙에 서서 빅이어를 들어 올렸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그의 얼굴엔 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경기 뛸 때보다 더 긴장한 거 같은데요?"
"농담하지 마, 제프. 오줌이라도 싸 버릴 거 같으니까."
"땀에 젖어서 안 보일 거예요. 조심스럽게 볼일 보세요."
"제기랄! 제프! 웃기려고 하지 마! 모양 빠지잖아."
웃기기는 무슨.
눈동자에서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빅이어를 들어올리고, 파란색 꽃가루가 미친 듯이 휘날리는 순간.
아스피는 웃고, 울었다.
아스피뿐만이 아니다. 이 시퍼런 것들은 모두 울면서 웃고 있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찰칵!
저 맨 앞에서 할리가 찍고 있었다.
"잠깐만요. 잠깐, 잠깐!"
나는 소리치면서 단상에서 내려갔다.
휠체어에 앉아 사진을 찍고 있는 할리에게 다가갔다.
"뭐 해? 지금 가장 멋진 사진 찍고 있는데?"
할리의 의문에 난 빙긋 웃었다.
"그건 두 번째로 멋진 사진이고, 가장 멋진 사진은 이제 찍어야죠."
"응?"
"웃차!"
"어어!"
"미친놈!"
"휠체어까지 같이 들어 버리네?"
할리가 당황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는 그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통째로 들었다.
끙, 조금 무겁긴 한데. 못 들 정도는 아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떨떨해하던 동료들 중, 가장 눈치 빠른 올리버가 피식 웃으며 뛰쳐나와 휠체어를 같이 들었다.
내가 할리의 휠체어를 들고 올라온 건 단상 위.
그 중앙에 내려놓았다.
할리가 아직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해 얼떨떨해할 때.
캡틴 아스피가 눈물을 닦고 빅이어를 조심스럽게 할리의 손끝에 쥐어 줬다.
"아!"
그제야 할리는 붉어진 눈동자로 감탄을 터뜨렸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붉은 빛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사진사가 사진 안에 있어야 가장 멋진 사진이죠."
할리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저 멍한 얼굴로 빅이어를 꽉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40년 동안 첼시의 모든 역사를 찍어 온 사진사가.
사진 한 장이라도 남기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내가 웃으면서 할리의 오른쪽 어깨를 꽉 잡았고,
아스피가 한쪽 무릎을 꿇고 할리의 왼쪽 어깨를 감쌌다.
"빅이어, 들어 올리시죠. 막 미친 듯이 소리도 질러 보시고. 40년 만에 처음이잖아요?"
아스피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할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곤,
아주 조심히,
"Woooooooohhhhh!"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Yeaaaaaaaaaaaaa!"
첼시 구장에 걸릴 사진은 맨 처음 찍은 사진이 아닐 거다.
아스피가 빅이어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의 사진도 퍽 감동적이고, 멋졌으나.
지금 할리가 중앙에서 빅이어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사진이 또 있을까.
누군가의 끝은 화려하거나.
또는 아름답거나.
2021-22시즌이 끝났다.
< 192. 또는 아름답게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