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또는 아름답게 (2) >
첼시가 바이에른 뮌헨을 경계하는 것처럼, 뮌헨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했다.
뮌헨에게 있어 첼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AT마드리드를 상대로 대역전극을 선보였던 4강 2차전. 뮌헨은 결승 진출이 먼저 확정되고 TV로 지켜봤다.
"미쳤군."
"아틀레티코의 수비 방식은 우리랑 비슷한데, 저걸 저렇게 부순다고?"
"바뀐 건 고작 제퍼슨이 2차전에 투입됐단 사실 하나야. 근데 경기력이 이렇게 달라?"
선수단 사이에 치솟는 위기감은 심상치 않았다.
4강에서 바르셀로나와 힘겨운 싸움 끝에 결승전이란 무대에 도착했지만, 바이에른 뮌헨은 첼시의 도전이라는 강력한 장애물에 직면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뮌헨이 경계를 하되, 속된말로 쫄지는 않았다. 이쯤 뮌헨은 어느 정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우리는 세계 최고 메시를 막았다!"
준결승에서 리오넬 메시를 분명하게 막았다.
그에게 수많은 유효 슈팅과 많은 기회를 내줬지만, 어쨌건 두 경기 동안 한 골만 내준 건 훌륭하게 선방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뮌헨이 결승에 가게 된다면, 나는 이번 시즌 시작부터 첼시가 결승에 올라올 줄 알았다."
바이에른 뮌헨에게 희소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유흐 하인케스의 조력이었다.
9년 전 바이에른 뮌헨으로 트레블이란 업적을 세웠던 명장이자, 팀이 흔들릴 때마다 큰 도움을 줬던 축구계의 원로.
물론 은퇴한 지 한참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뮌헨의 뒤에서 수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인케스의 일화에는 여러 얘기가 있다. 대표적으론 과거에 바르셀로나를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모든 분석을 다 끝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바르셀로나는 명실상부 세계최강이었으나, 하인케스는 그들을 직접 무너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하인케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분석의 달인이었다.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과 코치진이 하인케스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분석한 자료들이지. 자네들이 참고한다면 도움이 될 거야."
축구계에서 은퇴한 지 시간이 지났지만, 하인케스의 분석 노트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
특히 하인케스는 뮌헨이 결승전에 올라간다면, 언젠가 그 중간이나 마지막에는 결국 첼시를 만날 거란 걸 예상해 왔다.
'첼시는 막강한 팀이다.'
첼시의 첫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보고 하인케스가 느낀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현실로 돌아왔다.
16강에선 레알 마드리드, 8강에선 유벤투스, 4강에선 AT 마드리드를 처참하게 부숴 버렸다.
그 모든 경기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파헤쳤다.
물론 이 결과물들을 이용하는 건 뮌헨의 감독과 코치진이리라.
하나 분석 자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감독과 코치진은 하인케스의 노트를 받고 크게 고마워했다.
"허어. 이 방법도 좋은데?"
"카이 하베르츠를 완벽하게 봉쇄할 수 있겠어. 물론 우리도 무언가를 내줘야겠지만."
"캉테를 상대하는 게 좀 골치 아팠는데, 이렇게 하면 무력화시킬 수 있겠는데?"
"수비수들 습관까지 다 분석되어 있어!"
코치진은 감탄했다.
하인케스의 분석 자료의 퀄리티가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각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부터 작은 습관까지 철저하게 파헤쳐 있었다. 그에 맞는 대응 방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현실적인 조언도 있었다. 가령 반칙으로 끊는 비율을 높여라, 몸싸움으로 파울을 각오하라, 등등.
감독과 코치진은 눈앞에 가득했던 안개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길이 보였다.
그들은 정신없이 분석노트를 탐구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
No 9. 제퍼슨 리.
제퍼슨에 대한 분석 자료를 눈앞에 두고, 뮌헨의 감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감독은 하인케스에게 직접 전활 걸어 조언을 청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두껍군!'
다른 선수와 다르게, 제퍼슨 리에 대한 분석 자료는 아주 두툼했다. 거의 나머지 선수들을 합친 것만큼의 분량이었다.
감독과 코치진은 모두 긴장어린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이 선수만큼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기를 보면 볼수록 말이다.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감독은 눈을 빛내며 마지막 자료를 살펴봤다.
"······."
최고조의 집중력을 보이며 자료를 살펴보던 감독과 코치진 사이에서 간간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말도 안 되는데? 이런 플레이가 가능해?'
'허벅지 힘이 장난이 아니야.'
'미드필더로 뛸 땐 어떻게 대처해야지? 막말로 호나우두에게 케빈 데 브라이너의 중원 장악력이 합쳐진 것이나 다름없는데?'
'고난이도의 테크닉하며, 이 힘은 대체!'
분석 자료 내용은 일견 믿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개인기.
물리학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무브먼트.
190cm가 넘고 90kg이 넘는데도 주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선수 두셋을 가뿐하게 무너뜨리는 힘은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제퍼슨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 이렇게 습관 하나까지 분석된 내용을 보니 새삼 그 실력이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후우."
"쓰읍."
탄식은 점점 줄어들고, 코치진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건 지독한 위기감과 부담감, 그리고 압박감이었다.
하나 그래도 마지막 장까지 넘기는 그들의 손길엔 아직 희망이 있었다.
철저하고도 완벽한 분석.
이 분석들을 바탕으로 그에 맞는 대응법이 분명······
"으응?"
하나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하고 튀어나온 건 당황스러운 음색이었다.
빽빽한 잉크로 채워진 분석과는 다르게, 파훼법과 대응 방법에는 단 몇 개의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확인한 감독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이게 무슨······."
[제퍼슨 리의 대비책]
1. 수비진의 컨디션을 완벽함, 그 이상의 상태로 유지할 것.
2. 최소 두 명 이상의 수비수가 협력할 것.
3. 제퍼슨에게 공이 가는 빈도를 최대한 줄일 것.
4. 그를 완전하게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늘 주지하고 있을 것.
5. 설령 막지 못해도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지 말 것.
6. 승리를 원한다면, 차라리 성당에 가서 간절히 기도할 것. 어쩌면 그것이 제퍼슨을 막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냉철하고 철저한 분석력으로 이름 높은 하인케스의 분석 보고서.
그것의 마지막을 장식한 건 분석과 사실을 기반으로 둔 논리와 이성이 아니었다.
하인케스는 끝내 백기를 올린 것이다.
수없이 분석하고, 파헤쳤지만.
단지 거기에 그쳤을 뿐이다.
감독과 코치진은 마지막에 적힌 문구를 보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미친 듯이 분석하고, 파헤친 그 치열한 노력.
그 노력에 대한 마지막 결과물을 내놓을 때.
'차라리 신께 기도하라'라고 마지막 문구를 써놓을 때.
그 대단한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하인케스의 심정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인쇄된 글자에 코치진은 처참한 심정을 느꼈다.
도저히 방법을 찾지 못해 고통 어린 표정으로 마지막 문구를 적는.
하인케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FC Bayern, Stern des Südens, du wirst niemals untergehn.FC Bayern,(남부의 별, 너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거야!)"
"FC Bayern, 독일의 챔피언, 그래 그게 내 클럽의 이름이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할!"
경기가 시작되기도 이전에, 알리안츠 아레나는 말 그대로 뜨거웠다.
그들의 응원가인 Stern des Südens가 울려 퍼지고, 반대편에선 소규모의 푸른 유니폼이 블루스를 끊임없이 열창했다.
우리는 상대팀과 악수를 했다.
흐음.
착각인가.
"얘들 왜 악수할 때 내 손을 꽉 쥐지?"
다들 하나같이 눈을 부라리며, 손에 힘을 꽉 준다.
이거야 원, 신경전인가.
신경전하면 질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끄읍."
손에 힘을 좀 주니, 마지막에 악수하던 상대편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난 뻔뻔하게 웃으며 툭 쳤다.
"좋은 경기 하자고."
"······."
거, 이 자식들.
얼굴에 웃음기 싹 다 뺐네.
그러면 나도 뭐, 웃음기 다 빼고 해야지.
그래도 결승인데 말이야.
***
바이에른 뮌헨의 중앙 미드필더인 티아코 알탄카라는 훌륭한 선수다.
비교적 볼키핑과 탈압박이 좋지 않은 뮌헨의 중원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실력을 지녔다.
수비 때는 패스 길목을 미리 차단하고, 주도권을 쥘 때는 경기 템포를 조절하고, 공격 때는 볼을 뿌려 대는 중원의 사령관 역할을 하는 선수다.
즉.
"이 자식이 보이면 죽여 버리면 된다."
가끔 느끼는 건데 감독이 갈수록 과격해지는 것 같다. 프리미어리그의 미친 일정이 그의 성정을 바꿔 놓은 걸까.
뭐, 그렇지만 내 생각과 일치했다.
알칸타라를 일찌감치 제압하면 우리가 원하는 흐름을 만들 수 있을 터.
그리고 우리의 미드필더진은 감독의 과격한 지시를 철저하게 이행했다.
특히 캉테와 하베르츠의 조합에 올리버의 결승전 선발 출전.
올리버는 감독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르다 못해 거의 신들린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Wuuuuuuuuuuuuu!"
뮌헨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돌파를 시도하던 이반 페리시치의 드리블을 올리버가 거친 차징으로 밀어 버린 것이다.
하나 페리시치는 그 와중에도 넘어지면서 볼을 살려 냈고,
그 볼을 뮌헨으로 완전 이적해 버린 쿠티뉴가 다시 키핑한 채 패스를 이어 갔다.
끝끝내 소유권을 내주지 않는 뮌헨의 끈질긴 집중력.
미세한 실수마저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한 장면이, 오늘의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보여 줬다.
이거, 쉽진 않겠는데?
***
"뭐야? 다쳤어?"
코너킥 상황.
손목을 매만지고 있는 티아고에게 노이어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티아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악수할 때 저 애송이 9번하고 신경전을 좀 펼쳤지. 악력이 장난이 아니네."
"허. 악수 한번 했다고 엄살 떠는 거야?"
"엄살은 무슨. 너도 조심해. 슈팅 잘못 막다간 손목 부러질지도 몰라."
티아고는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매만졌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힘 하나는 무지막지하군. 아까 허벅지를 보니 발목 힘도 장난 아닐 거 같은데.'
흘깃 제퍼슨을 바라봤다.
거대한 덩치와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을 보자,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경기는 서로 조심스러워하면서, 지독히 안정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아직 서로 부딪친 적은 없으나,
티아고는 왠지 그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걸 피해야한다고 직감하고 있었다.
괜히 부딪쳤다간 페이스에 말려들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뻐엉!
그때, 하베르츠가 올려 준 코너킥을 노이어가 한 발 앞서 긴 팔을 쭉 뻗어 펀칭해 냈다.
"뛰어!"
떨어지는 세컨 볼을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요슈아 키미하가 받았다.
곧바로 역습으로 뛰어나갈 수 있는 위치다.
키미히는 달려드는 첼시의 선수진 속에서 공을 침착하게 지켜내고, 중앙으로 치고 나가는 알탄카라에게 패스했다.
"오, 티아고! 우리는 너를 믿어!"
관중들이 응원을 쏟아 냈다.
티아고는 곧바로 볼을 뿌릴 준비를 마쳤다.
역습은 스피드다.
망설임 없이 패스가 단박에 쭉쭉 이어져야 한다.
그 점을 떠올리면, 지금 역습은 실패에 가깝다.
티아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언제?'
공을 줄 곳이 없다.
캉테가 앞을 막았고, 왼쪽 측면은 빠르게 수비 위치로 복귀하는 풀백 아스피가 막고 있다. 슬쩍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뛰쳐나가는 토마스 뮐러가 보였다.
퍽!
"큭!"
하지만 뒤에서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제퍼슨의 거친 바디체크에 티아고의 발을 떠난 패스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달려 나가는 뮐러의 발 앞이 아니라, 그 뒤를 향한 것이다.
그리고 제퍼슨의 손짓을 보고 미리 움직이고 있던 올리버가 한 발 앞서서 볼을 터치라인 바깥으로 걷어 냈다.
"나이스! 올리버!"
"이쯤이야!"
올리버는 신난 기색으로 소리쳤다.
티아고는 성난 얼굴로 제퍼슨을 노려봤다.
악수 때부터,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방금 전 순간적인 압박은 기가 막혔다.
패스할 타이밍을 정확히 노리는 압박.
그것이 순전히 운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볼을 잡자마자 압박을 할 수 있었음에도, 기다린 것이다. 자신이 패스할 순간을 말이다.
'자칫하면 역습에 무너질 수도 있는데,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타이밍을 쟀다고?'
새삼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자신이 중원의 사령관이며,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현재 첼시에서는, 이 스무 살짜리 9번이 '사령관'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그가 공을 잡지 못하게 만들라고 했지. 하지만 공을 잡지 않아도 경기장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눈치가 빠른 티아고는 순식간에 제퍼슨의 영향력을 깨달았다.
선수들에게 전체적으로 손짓을 하고, 끊임없이 소리치고 외치면서 위치를 조정하고 움직이는 제퍼슨 리.
공을 잡지 않았음에도 제퍼슨의 외침과 손짓은 필드 내에서 적절하게 먹혀들고 있었다.
하물며, 이런 선수가 만일 공까지 잡는다면?
척추를 타고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절대 공을 내줘서는 안 된다.
그것이 승리를 위한 첫째 조건이었다.
하지만 신에게 기도하라는 하인케스의 조언을 듣지 않았던 걸까.
뮌헨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제퍼슨 리에게 카이 하베르츠의 패스가 배달됩니다! 제퍼슨 리! 공을 잡았습니다!]
제퍼슨이 공을 잡았다.
< 189. 또는 아름답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