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끝은 화려하게 (5) >
축구는 종종 괴로울 때가 있다.
결승전에서 지고 있단 사실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안겨 준다.
그건 팬에게도, 선수에게도, 코치진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재 사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모두가 고민할 무렵.
제퍼슨은 웃고 있었다.
"저 자식 또 웃는다."
"내버려 둬. 바이러스 옮아."
"무슨 바이러스?"
"이상해지는 바이러스."
"그건 우트 아니었나?"
"제퍼슨도 우트에게 옮았나 보지."
올리버의 말에 풀리시치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아서였다.
1시즌 전만 해도 저러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이번 시즌 우트와 어울리면서 약간 이상해졌다고 풀리시치는 느꼈다.
'아니지, 굳이 따지면 작년도 그랬어.'
뭐, 가령 골 넣고 상대방이 고통스러워하는 거 보고 껄껄 웃거나.
골 넣고 세레머니 안 하고 골키퍼의 표정을 관찰하거나.
'가만. 알고 보면 우트가 제퍼슨에게 전염된 거 아냐?'
그럴듯했다.
풀리시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아무튼.
오히려 전반전이 끝난 뒤, 하프타임 때 되어서, 선수들은 굳은 얼굴을 풀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팀 내 영향력이 절대적인 제퍼슨이 아무렇지 않게 웃고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첼시가 후반전에 변화를 가져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필마르크는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올리버, 조르지뉴 대신 후반전에 투입한다."
"넵? 네!"
"포백 바로 앞에서 포백을 보호해. 하프백처럼 뛰어. 뺏고, 달려들고 끊고! 하지만 명심해! 프리킥을 내주지 마라! 절대로!"
"알겠습니다."
올리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캉테와 올리버는 전반전 제프의 룰을 이어받는다, 공격진에도 계속 힘을 불어넣어."
"네."
"카이, 밑으로 내려와서 경기를 조율해라. 억지로 공을 몰고 들어갈 필요 없어. 전체적으로 경기 조율은 네가 해라. 우리 팀의 모든 패스는 너에게서 나와야 한다."
카이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프."
"네."
"으음."
잠시 고민하던 필마르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베르츠의 위치로 가. 지루와 타미 바로 밑에서 받쳐 줘라. 하지만, 수비 때도 수비 가담을 해 줘야겠다."
"네."
"1선, 2선, 3선, 그리고 측면까지. 모두 다 네가 움직여 줘야 하겠어. 그러니까, 후반전 네가 희생해 줘야 한다."
필마르크는 고통스러운 음색으로 쥐어짜 내듯이 말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제퍼슨에게 원하는 건 체력의 부담뿐만 아니었다. 90분 내내 헌신을 요구했다.
이 경기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부으라고.
당장 5일 후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있지만, 필마르크는 지금 제퍼슨만이 이 경기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필마르크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제퍼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필마르크에겐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넌, 수비라인만 빼고, 올라운더(All-rounder)다."
***
남은 시간은 45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소 1골.
그리고 나아가 2골.
쉽지 않다. 현재의 맨시티라면 더더욱 말이다.
마음 같아선 내가 최전방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감독은 쉬이 그러지 못했다.
맨시티는 무려 3주간 FA컵 결승 대비 훈련을 해 왔다.
그들의 패스는 정확했고,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우리가 그 틈을 비집기엔 어렵다. 내가 최전방으로 올라가면, 이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거다. 이미 한 골이 들어간 상황이니, 저번 리그 경기처럼 철저한 안티축구를 시전할 확률이 높다.
하여 감독은 날 2선으로 올리는 타협을 보였다.
공격할 수 있을 땐 스트라이커처럼,
그리고 주도권을 내줬을 땐 미드필더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경기에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부득이하게 해야만 했다.
모두 하나같이 헐떡댈 정도로 열심히 뛰고 있다.
이대로 패배한다면, 그리고 결승전을 코앞에서 놓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루, 페르난지뉴를 노려요."
"페르난지뉴?"
"스톤스는 상대하기 좀 버겁잖아요. 페르난지뉴는 현재 수비진을 사령관처럼 지휘하고 있죠. 싸워 주면 수비진 전체가 흔들릴 겁니다. 페르난지뉴도 이제 피지컬적으론 무너지고 있으니까요."
지루도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톤스가 나를 철저하게 마킹하던데."
"타미!"
"응?"
"스톤스 어그로 좀 끌어 줘. 측면보단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서 스톤스를 끌어내."
스톤스는 나에게 여러 번 당했으나, 아직 젊고 힘도 세다. 경험과 관록이 붙으면 더 무서워질 수비수다.
그에 반해 페르난지뉴는 노쇠했지만 베테랑이다. 현재 맨시티의 안정적인 후방은 오로지 그의 지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루가 스톤스를 상대하는 건 버겁다.
그러나 페르난지뉴를 상대로는 꽤 할 만할 거다. 적어도 페르난지뉴의 피지컬이 스톤스만 하진 않으니까.
타미가 스톤스만 끌어 내주면 된다.
"지루,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해줘요."
"으음. 타겟터 역할 말이지?"
"네. 버티고, 이겨 내고, 가져온 공을 동료에게 내주는 플레이요. 가장 클래식하면서도 단순한 거, 우리가 작년에 투톱으로 뛸 때처럼요."
"전형적인 빅 앤 스몰?"
"노노. 빅 앤 빅(Big and Big)이죠."
"좋아, 해 볼 만하겠어."
"아, 그리고 페르난지뉴를 상대하기 버거울 땐 이걸 써요."
난 순간적으로 지루에게 달라붙었다.
지루가 흠칫하면서 물러나려는 찰나. 그가 눈을 부릅뜨며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토했다.
"끄응, 아픈데?"
"방금 장면 카메라에 잡혔을 거 같아요?"
"······아니. 넌 언제 이런걸?"
"경기 뛰다 보면 제가 오히려 이런 거에 많이 당해요. 꼬집히고 맞고, 그러다 보면 좀 억울해서 똑같이 해 줄 때가 있죠."
내 말에 지루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케이, 최선을 다할게."
지루, 타미와 이야기를 나눈 난 곧바로 하베르츠에게 갔다.
"카이. 공을 무조건 최전방으로 길게 올려 줘."
"뭐?"
"솔직히 공간을 보고 주는 패스는 우리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아. 로드리는 공간을 읽고 대비하고 있어. 우리 팀 캉테처럼 말이야."
하베르츠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의 패스 성공률이 낮은 것에는, 지루와 타미가 좀처럼 그의 패스를 이해하고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 팀이 더 빨리 패스를 읽고 끊어 낸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요구한 건.
흔히 말하는 '뻥 축구'였다.
"지루. 지루만 보고 높게 올려 줘."
"제프, 솔직하게 말하지. 지루는 내 패스를 못 받아. 그는 느려. 가끔 센스는 빛나지만, 몸이 못 따라간다고."
하베르츠는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네가 돌파해. 측면이든 중앙이든, 내가 패스를 만들어 줄 테니까."
"결국 막힐 거야. 우리가 절박한 만큼, 저들도 절박하니까. 그리고 카이. 스트라이커에겐 부족한 건 없어."
"뭔 소리야? 그건 너 같은 애나 그렇지."
"아니. 스트라이커는 늘 완벽해야 해. 부족한 점이 있다고? 그럼 그 부족함을 미드필더가 채워 줘야지."
"······."
"넌 그런 미드필더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말 믿고 지루에게 공을 올려 줘."
하베르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똑똑한 친구니까 내 말을 이해했을 거다.
***
[제퍼슨 리의 압박!]
[이런! 맨시티가 공을 흘렸습니다! 제퍼슨, 공을 바로 후방으로 내줍니다! 카이 하베르츠가 받고, 곧바로 크게 지릅니다!]
뻐엉!
[올리비에 지루! 하지만 페르난지뉴가 한발 앞서 공을 걷어냅니다!]
[후반전 들어 지루를 향한 다이렉트 패스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루는 좀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 하고 있네요!]
지루는 최선을 다했다.
목젖이 튀어나올 것처럼 헉헉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허벅지는 푸들푸들 떨렸고, 복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이 저릿저릿했다.
그래도 뛰었다. 그래야만 했다.
제퍼슨은 오늘 캉테와 비견되는 활동량으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타미는 스톤스를 끌어내기 위해 뛰고 또 뛰면서 싸워 주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싸우고 있다.
하베르츠는 여전히 자신을 믿고 패스를 올려 준다.
한데.
자신은 단 한 번도 그 패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언제 이렇게 됐냐. 이 멍청한 자식아!'
순간 울컥하고 속에서 무언가 치민다.
한때는 프랑스 국가대표였고, 아스날에서 뛰었으며 지금은 첼시에서 수년간 살아남다 못해 유로파 득점왕도 두 번이나 해낸 자신이 아니었던가.
씁쓸함이 아니었다.
무너져 가는 신체와 저물어 가는 선수 생활의 막바지에 치미는 아쉬움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이 중요한 경기에서, 동료들이 제각기 맡은 소임에서 최선을 다할 때.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단 죄책감.
'내가 누군데!'
화가 났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팬들의 응원이 기억났다.
그리고 반면 지금은 야유만이 쏟아지고 있다.
야유에 기가 죽는 것?
그딴 게 무엇이란 말인가.
지루는 이를 악물었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정신이 확 하고 밝아진 것 같았다.
'단 한 번이다.'
이 경기는 그만의 경기가 아니다.
그의 은퇴 전도 아니다. 첼시를 떠나도 그는 프랑스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하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
그 순간.
뻐어엉!
하베르츠의 패스가 다시 한번 최전방으로 떨어졌다.
투욱!
지루는 달렸다.
먼저 위치를 잡았다.
그리고 뒤에서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페르난지뉴를 힘껏 등으로 밀쳤다.
뻐억!
"크흠!"
그러나 압박감에 밀린 건 지루였다.
페르난지뉴의 폼이 아무리 무너졌다고 한들, 그 나이대에 아직도 맨시티의 센터백으로 건재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던 터.
하나 지루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밀린다면 이 패스는 또 한 번 무위로 돌아가리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간절히 빌고 몸을 뒤틀면서 페르난지뉴를 안듯이 크게 밀었다. 그리고 손을 살짝 안으로 넣으면서.
"컥!"
페르난지뉴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지루는 단 한 번도 손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 원래 스트라이커와 경합하다 보면 서로 손도 쓰고, 카메라가 보지 못하는 장면에서 쉼 없이 반칙이 오가기 마련이다.
한데 지루는 그런 것에 영 미숙했고, 페르난지뉴는 비교적 편안하게 지루를 상대해 왔다.
때문에.
그 경합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지루의 꼬집기는,
'제기랄!'
페르난지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나 그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고통을 꾹 참고 지루와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그것이 어쩌면 맨시티를 우승으로 이끌 수 있는 결정적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루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하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완 다르게 몸은 무너졌다.
공을 받고 지키는 것?
못한다.
헤딩으로 골문으로 갖다 때려 넣는 것?
가능할 리가 없다.
페르난지뉴는 끈질겼고, 그가 볼을 만지는 것을 방해했으니까.
하면,
답은 없었다.
지루는 그저 있는 힘껏 싸웠지만,
공은 결국 이마에 맞고 툭 하고 떨어질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실패했다.'
낙담했다.
또 한 번 공격이 실패했다. 있는 힘껏 싸웠지만, 그는 무너져 가는 신체를,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의 흐름을 이겨 내지 못했다.
아찔한 패배감이 온몸을 감싸고,
팬들의 야유가 귓가에 아스라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Wuuuuuuu······"
"Wuuuuuu······Yeaaaaaaa!"
아니, 야유가 아니었다.
아스라이 들리던 야유가 순간 함성으로 바뀌었다.
암울했던 어둠이 확 걷히고 햇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뻐어어엉!
그 아무도 없던 공간에 툭 하고 힘없이 떨어지던 공이.
그저 실패라고만 여겼던 그 공이.
간절함을 신이 들어준 것처럼.
누군가 달려와 벼락같은 중거리 골을 꽂아 넣었다.
"Yeaaaaaaaaaaaaaaaa!"
"제-------프!"
지루는 중심을 잃어 넘어진 채.
골문 안에 들어가 굴러다니는 공을 들고 센터서클로 돌아가려는 제퍼슨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지루에게 제프가 다가와 툭 어깨를 쳤다.
"방금 완벽한 타겟터였어요. 정말로."
그 말에,
지루는 그저 웃었다.
왜인지.
축구를 처음 할 때의 설렘을 떠올랐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 186. 끝은 화려하게 (5) > 끝